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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온한 여행자의 궤적 – 김유조의 문학세계

원평재 2022. 1. 18. 10:45

한 불온한 여행자의 궤적 – 김유조의 문학세계

 

한혜경

 

프롤로그 –호모 비아토르의 삶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로 정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몸에는 끝없이 이동하는 본능이 새겨져 있다. 김유조는 그 본능이 유독 강한 이이다.

그는 시집 [[여행자의 잠언]] 서두에서 우리 삶이란 ‘여행자의 궤적’이라고 단언하는데, 여기에서 여행이란 몸의 이동만이 아니라 의식의 움직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육체의 이동이면서 정신의 이동이기도 한 여행은 문학을 탄생시키는 산파의 역할을 한다. 몸이 이동하는 장소마다 겪고 깨닫는 것들을, 몸이 이동하지 않는 경우에는 의식의 변화를 글로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로, 수필로, 때로 시로 표출된다.

수상록 [[열두 달 풍경]]은1월부터 12월까지의 풍경과 심상을 묘사한 글들의 모음인데, 각 풍경은 그의 삶과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들은 자연 풍광이나 세상에 대한 단순한 스케치를 넘어서,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관통하는 정수, 곧 이동의 정신으로 구축된 일종의 종합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1. 문학청년의 정체성

 

김유조는 건국대 영문과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미시간 주립대의 객원교수, 연변 과기대 객원교수를 거치는 등, 연구와 번역, 강의 준비로 치열하고도 바쁜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환절기마다 “마음은 신열을 앓았”는데,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는다. 곧 “문청의 꿈이 바스라지면 생기는 발진 같은 것”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고등학생 때부터 시를 썼으며, 대학 시절엔 학보사 기자를 하며 소설을 쓴 문학청년의 감수성이 내면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표면으로 분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놓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 후, 그는 ‘트랙의 규정된 지점’이 보이는 나이에 이르러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수필을 쓰기 시작한다.소년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문학을 향한 열정이 드디어 꽃 피어난 것이다.

문학청년의 정체성은 이동의 심상과 결합하여 더욱 빛을 발한다. 문청의 기질은 이동의 심상을 자극하고, 이동의 심상으로부터 문학작품이 태동되는 선순환을 이루기 때문이다. 몸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의식을 빚어낸 열매로서 그의 글들은 ‘생애의 지속적 투어’에서 배태된 ‘여정의 글마당’이며, 이동의 심상이 확장된 결과라 하겠다.

이동이란 움직여 옮겨지는 것을 뜻하므로, 이동의 심상은 흐르는 물이나 바람처럼 자유롭고도 유연한 유동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경직된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다각도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능하게 하며 드러나지 않은 이면까지 응시하는 열린 태도로 인도한다.

이동의 심상은 또한 가벼움을 지향한다. 이 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지로 넘어가는 여정에서 과도한 소유물과 욕망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요소일 뿐이다. 이곳에 잠시 머무르다 훌쩍 떠나는 것이 인생이므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 투어’ 중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러한 특성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여행과 방랑을 떠올리게 한다. 영문학자로서 그 누구보다 낭만주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김유조에게 낭만정신은 ‘자유로운 영혼들’의 정신이며 ‘혁명정신’이다.([청포도의 시절])곧 기성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정신이며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반기를 들고 변혁을 시도하는 정신이다. 이전까지 진리라 여겼던 가치를 거부하고 다르게 해석하는 시선, 고정불변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갈망하는 것으로서, 이는 문청의 감수성에서 발아되어 ‘불온한 이동의 심상’으로 완성된다고 하겠다.

 

 

2. 불온한 이동의 심상

 

시집 [[여행자의 잠언]] 서두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식이나 생활의 동선이 항상 이동의 심상임을 밝히면서,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할 따름이지 불온한 이동의 심상이다.”라고 덧붙인다.

‘불온함’이란 “통치계급이나 기성세력의 입장에서 보아 온당하지 않음” 또는 “사상이나 태도 등에서 맞서고 대립함”이란 의미를 갖는다. 스스로 ‘불온한’이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기성세대에 저항적인 기질과 혁명정신이 내재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곧 이성적인 학자의 이면에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가 숨 쉬고 있음을, 그리고 정도(正道)가 아니라 곁길을 선호하는 성향이 숨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교수이자 학자의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했겠으나 그의 내면을 흐르는 문청기질은 ‘불온한 이동의 심상’을 거스를 수 없었다고 하겠다.

그의 불온함은 그렇다고 무조건적 저항이나 감상적인 반항, 또는 허무주의로 채색되지 않는다. 잘못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동시에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열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잿빛 현실 앞에서 암울해 하기도 하지만, 절망하거나 자조에 빠지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 게 가능하다. 이로써 힘겨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은 뜻하는 바를 위해선 열정을 다하는 태도와 동궤에 놓이게 된다.

‘암울했던 사춘기’ 시절, 직접 가볼 수 없다고 절망하는 대신 세계지도를 그리며 세계를 깨우치고, 잿빛 시공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봉’ 글자를 세 번씩 쓰며 꿈을 키우는 소년, ‘까마득한 날들의 끝에’ 진짜 희망봉을 찾아왔으나 꿈꾸던 풍경과 다른 실체를 마주했을 때 실망하지 않고 희망이 “항상 심장 뜨거운 곳에 있어서” “식지 않고 이어왔음”을 깨닫는 모습들에서, 문학청년의 감수성 위에서 발현되는 열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그는 불의에 항거하는 열정을 높이 평가하는데, 윤동주의 목숨 바친 조국애, 육사의 독립 향한 ‘열렬한 바람’, 만해의 의지적 시정신을 논할 때 잘 나타난다. ([빼앗긴 들의 봄밤에 별을 헤며 기다리는 님과 초인]) 현 사회의 무미건조함과 ‘자아상실’에 이른 상태를 비판하면서 “복받치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싶다”는 바람이나, 2.28 의거 때“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일어서라”는 외침에서 ([2-28 민주의거 60주년의 함성])작가의 가슴을 달구는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에 분노하는 마음 한편에는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감이 숨어있다. 이는 [나무들의 계절]에서 아우의 과학적 사고와 대비되어 흥미롭게 나타난다.

미국 동부에 사는 아우의 집은 깊은 숲속에 있어 작가에게 ‘명상과 평화와 정일의 터전’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은퇴를 앞둔 아우가 집을 정리하려고 하므로 작가는 마음이 어둡다. “평화로운 숲의 모습이 너무나 아쉬워.” 작가의 말에 아우는 “숲을 놓고 평화를 논하는 것은 가장과 위선이고 허구”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과학자이며 의사인 아우 내외는 숲속만큼 생존경쟁의 모습이 적나라한 곳도 없다면서, 이 싸움에서 늙은 나무가 항상 젊은 나무에게 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이에 비해 작가는 “진심으로 탄식”하고 “기막힌 심정으로” “흠칠하였다” 등의 감정적 반응을 보인다. 아우가 전하는 사실들은 ‘진리’임이 틀림없지만, “인문학 전공자이자 낭만주의자인” 그에게는 ‘너무나 처절한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실과 상관없이 위안 주던 대상이 스러져가는 것이 애달플 뿐인 작가의 심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결국 그는 늙은 나무의 패배란 ‘일종의 순환법칙, 선순환의 과정’이라는 인문학적 해석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무리한다.

또한 어린 시절 ‘쑤우’라 불렀던 작은 숲 동산에 얽힌 일화에서 실용적 관점과 거리가 먼 정서를 보여준다. 일 년에 한 번 낙동강이 범람하여 큰물이 지는 위기에 어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가재도구 건져내기 바쁘지만, 아이들은 놀 궁리만 한다. 논과 밭, 소와 돼지, 집들이 떠내려가는 난리임에도 아이들은 “나무들이 자신의 머리꼭지를 물 위로 내놓고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재미와 위안’을 얻는다. 이는 생활의 감각과 무관한 탐미적 태도라 할 수 있는데, 김유조 낭만정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같이 자유로움과 열정, 공감, 재미로 이루어진 ‘불안한 이동의 심상’은 또 한편으로,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는 시선을 낳는다. 불온함이란 태생적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기질이므로, 불온한 시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3. 숨은 곳을 향한 시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점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들춰낸다. 이는 겉과 속 양면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리얼리스트의 시각이라 볼 수 있는데, 그 대상은 자연 현상에서부터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 인물과 사회현상, 축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령 1월의 어원인 ‘야누스’가 두 얼굴의 신으로 인간의 양면성을 상징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브라질의 카니발 축제, 미국 남북전쟁의 양면성, ‘신대륙’이란 단어의 양면성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빛의 세계와 대조적인 ‘어두움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브라질의 삼바 축제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인데, 화려한 퍼레이드가 가능하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뒷받침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삶에 대한 사유를 덧붙이고 있다. 곧 퍼레이드에 나오는 작품을 움직이기 위해 3-4000명에 달하는 삼바 학교 학생들이 “이름도 없이,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무대 밑에서 바퀴도 밀고 손으로 돌린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사의 아이러니랄까 혹은 화려함을 뒷받침하는 어두움의 세계가 극적으로 존재함을” 체감한다. ([2월의 삼바춤])

그리하여 세상일이란 “화려한 낮의 행사, 즉 아폴론이 지배하는 영역이 있다면 어둠의 세계 디오니소스적인 요소가 함께 존재한다”란 이치를 깨달으며, 삶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리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함을 직시한다. “거창한 프레임의 이면에는 항상 뺏고 빼앗김, 실리와 욕심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는가”라는 관점에 의거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 아래 숨겨진 전쟁의 실상을 들춰낸다. 그리고 남쪽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남부 명예가 강조된 왜곡된 기록이 많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숱한 기념비의 진실을 재고하게끔 한다. ([전쟁의 달 6월])

‘신대륙’이란 단어의 경우, “유럽사람들이 정복자의 입장에서 붙인 발견이란 이름의 미화일 따름”이므로 원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끔찍한 ‘살육의 역사’란 사실을 외면한 일면적 표현임을 강조한다. ([문화와 문어의 달 10월])

이처럼 모든 현상의 양면을 인식하는 것은 감추고 싶은 측면을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이어진다. 작가는 미국 사회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하퍼 리의 소설을 비롯해 조지 워싱턴의 신화, 링컨의 일화, 남북전쟁 때 영웅적 병사 이야기 등, 어떤 이야기라도 허구로 지어낸 것은 밝혀내는 미국 사회를 성숙한 사회로 간주하고 있다. ([팔팔한 8월을 기대하며])

결론적으로 세상일에는 화려한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으므로, 양면을 직시하고 부정적인 측면이라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에필로그 – 여전히 길 위에

 

‘불온한 이동의 심상’에서 촉발되어 모든 현상의 이면을 아우르는 시선으로 조각되는 여정을 지나면서 김유조는 삶의 이치를 깨닫기에 이른다.

“가을의 풍요로움 속에는 이제 길고 고단한 겨울이 예비되어” ([문화와 문어의 달 10월]) 있으나, ‘뜨끈뜨끈한 군불의 추억과 따끈따끈한 동지 팥죽’이 ([12월을 데워주는 뜨거운 사랑]) 있으므로 엄동설한을 견딜 수 있고, 다시 봄이라는 ‘회복의 전령’을 ([봄봄]) 맞이할 수 있다는.

그러므로 우리 삶은 “삼도천이나 요단강 환승 뱃길까지”지속적으로 노 저어가는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