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해림의 미완성 기념관

원평재 2005. 7. 16. 01:11
 

해림의 미완성 기념관

 

목단강에서 해림(海林)까지는 도시 고속도로가 개통되어서 과연 한 20분 만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가지는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조선족 민속촌이 해림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주로 식당가였다.)

 



 

 

김좌진 장군을 기리는 기념물들은 최근 이 곳 동북 지방, 역사의 땅에 속속 들어서고

있어서, 나도 두어 달 전에는 생가 복원 기념식에 참석하자는 초대를 받았으나

강의 때문에 따르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해림 진(海林 鎭)"에 김좌진 장군의 기념관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박 기자의

소식통에 따른 것인데, 장소와 기타 정보는 림 선생으로부터 얻어들은 토막 지식이

전부였다.

림 선생께서는 얼마 전 준공식 때 참석해서 테이프를 끊었다는데, 해림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작은 마을에 덩치 큰 기념관”이라---, 금방 못 찾을 일이 없었다.

 


                              (해림 시가지---, 생각보다 매우 컸다.)

 

우리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20분 이내 도착이라는 약속을 지킨 고물 차 사기(우리말로

택시 기사)의 사기도 당당하였다.

하지만 일은 이제부터였다. 막상 해림에 들어가보니 도시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고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라는 거대한 팻말은 아무데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사기는 그래도 문제없다는 듯이 조선족 식당이 문화재처럼 개발된 특구로

우리를 일단 안내하였다.

그곳은 도심에서 좀 떨어진 한 부락으로 지금도 인근에 조선족들이 집거하고 김좌진

장군이 세운 초등학교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렴 기념관이 선다면 이 근방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논리는 정연했으나 추리의 결과는 허탕이었다.

 

인근에서 여러 명의 조선족 어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그런 게 있는 줄을

몰랐다.

마침 권여사가 아는 사람을 오랜 만에 만나게 되어서 통사정을 하니 그곳에서는 꽤

먼 곳을 가리키며 그리로 가보라고 한다.

그 사람을 태워 가면 좋으련만 택시 사기가 잘 알겠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말을

따랐다.

하긴 사람 하나 더 태울 공간이나 하중 능력도 우리 차에는 가당치 않았다.

 


 

 

더운 날씨에 택시가 빨리 달리지도 못하며 좌우를 살펴도 돌아가신 장군님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윽고 시계(市界)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그제야 사기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시간은 자꾸 흘러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쳤는데

림 선생과 김 사장으로부터의 호출 신호는 권여사의 핸드폰을 불이 나게 했다.

우리는 다시 해림 역에서 시작하기로 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내가 무언가 확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외쳤다.

 

“이게---.”

그러자 박 기자가 이심전심인지 얼른 받았다.

“아, 그렇죠. 이게 개관을 안했거나 아직 문패도 못단 거 아닐까요?”

그러자 내가 또 받아 채었다.

“간판 없이 청기와나 하여간 그런 외양을 한 큰 집을 찾읍시다.”

“바로 여기 있네요!”

역시 박 기자.

 


 

 

건립 전말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김좌진 장군님의 따님, 김을동 전의원은 통이

컸다.

넓은 공간을 가운데에 두고서 한쪽은 빌딩을 지었고 건너 쪽에는 절집의 큰 도량 같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복합 건축물로 들어가는 청기와 대문에는 태극 마크가

선명하지 않은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직도 무슨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방과 부엌이 붙은

한쪽에서는 단란한 한 가족이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 목적을 말하니 책임자인 듯한 분이 점심을 같이 들자고 진심으로 권하다가

사양의 품새가 완강한 것을 보고 달려 나왔다.

 


 

 

“사단법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 직책을 맡은 이해창 씨였다.

설명을 거두절미하면 성금과 유족의 출연으로 거창한 건물을 짓기는 하였는데 아직

유물, 유품의 기증이 미미하여서 이제 서울에서 겨우 짐을 꾸려 발송하는 단계라고 한다.

 

하필이면 이 곳에 기념관을 지은 것은 역시 김좌진 장군이 사학, 학숙을 연 곳이기도

하고 아직도 조선족이 많이 살며 조선족 전통 특구가 있는 것 등이 이유이고 또 몰라서

그렇지 한국에서 방학 때면 젊은이들이 김 장군의 승전전적지와 족적을 따라 이

근방으로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여기 겨울이 좀 길어야지요. 이제 여름이 벌써 시작했으니 열심히 공사를 마무리

해봐야 금년 행사는 파장이고 그래서 내년을 바라보고 천천히 완전한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자니 간판 다는 게 오히려 불편해서요---.”

 

기념관의 옆에 서있는 최근에 지은 값비싼 아파트가 조선족들로 채워지다시피 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의 백야 장군 기념관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설명을 빨리 듣고 작별도 아쉬울 정도로 빨리 마치고 나오니 사기는 그 사이에

기술자를 불러서 차를 고치고 있었다.

 


             (차를 얼마나 여러번 고쳤는지 모르겠다.)

 


 

 

라디에이터에 얼마나 물을 부어댔는지 차 밑이 온통 물바다였다.

그리고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차는 조급해진 우리를 태우고 조금 달리더니 한가해 보이는 식당 앞으로 방향을 돌려

들어갔다.

우리 점심은 목단강에 준비가 되어있었고 여기 식당에서는 차에다가 냉수를 먹이는

순서였다.

 


 

 

벌컥 벌컥 냉수를 마신 차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또 배를 안고 쪼그려 앉았다.

역시 식당 앞이었고 물 한대야가 차의 내장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차는 톨게이트까지 주춤주춤 가서 주인이 표를 사자 억지로 고속도로로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피식 피식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중국인 사기도 기계의 고통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듯, 차는 고속도로 유턴 표지도 없는

곳에서 어거지로 돌아서 도루 톨게이트를 나왔다.

가만히 보니 통행료는 둘려 받는 모양이었다.

 

이제 외곽의 톨게이트를 도루 빠져나오고 보니 식당도 없었고, 사기는 인근에 있는

농가에 가서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에게 냉수 한 대야를 청하여 차에다가 먹이었다.

박 기자가 할머니에게 무어라 물었고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라고 했소?”

내가 물었다.

“물 값 받았느냐고 물어보았지요.”

“뭐라고 합디까?”

“이런 차 사기에게 무슨 물 값이냐고 하는군요.”

 


 

 

우리가 빨리 대용차를 부르라고 사기에게 소리를 질렀더니 벌써 불렀단다.

믿기지 않으니 다시 독촉하라고 또 소리를 치는 사이에 벌써 비상 대용차가 달려왔다.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었다.

 

고장 난 차의 사기는 지금까지 고생하며 함께 달린 요금으로 우리에게 100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한심했으나 싸울 시간도 없었다.

더욱이 그분이 지체부자유자라서 아무 말 없이 요금을 내주고 이제 다시 목단강으로

달렸다.

 

“조선 대반점”의 김 사장 댁에서 점심으로 한 상 떡 벌어지게 받은 식사 이야기는

기차 시간이 바빠서(표현이 이상하다?), 여기에서 설명할 시간이 없다.

아마도 평생에 소, 돼지, 개, 기타 해산물, 야채 등의 요리를 그렇게 성대하게 받은 적도

없었던 듯 하고 앞으로도 그런 경험은 어려울지 모르겠다.

산해진미를 입과 코로 집어넣고 우리는 목단강 역으로 달렸다.

기차는 정각에 도착하여 정각에 출발하였다.

 

오후에 타는 침대차는 한산했고 우리 칸에는 여섯 명 자리에 셋만 들어왔다.

우리 둘 말고 그 세 번째 승객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족 젊은 여자였다.

박 기자가 한어 연습 겸 말을 부칠려고 했으나 몇 마디 끝에 그녀는 맨 위 침대로

올라가서 발씸한 엉덩이를 우리 쪽으로 내밀고 이내 잠이 들었다.

 

아이 하나가 유난을 떨며 복도를 쫓아다니다가 승무원에게 한어로 주의를 들었다.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아 새끼 에미가 미국으로 가서 버릇이 없구마.”

할머니로 보이는 조선족 여인이 이 말을 대여섯 번도 더 하였다.

LA쪽과 뉴욕 쪽에 최근 몇년간에 조선족 동포들이 각각 4-5만명씩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기왕에 "디아스포라"라면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증거가 주위에 나타난

것이다.

이 분들은 물론 모두 중국의 공민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하여간 이 시대의 로마 제국

으로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로마 시대의 명 연설가이자 비극작가인 세네카(Seneca)의 동상을 그의 출생지인

스페인의 꼬르도바에서 발견했을 때의 감명은 남다른 바가 있었다.

하버드의 졸업식에서 본 인종박람회도 경이적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위층에서 엉덩이가 예쁜, 아니 얼굴은 더 예쁜

한족 아가씨가 내려왔다.

조심스레 계단을 밟는 발도 예뻤다.

“니 한주?”

우리가 한어 연습을 시도했다.

“오, 예스.”

답이 영어로 나왔다.

 

글이 길어져서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면 그녀는 고등중학, 그러니까 하이 스쿨만

나왔다는데 영어를 곧 잘했다.

목단강 시에 있는 백화점 점원으로 있으면서 연길에는 거의 매주 놀러 나왔는데 이제는

직장도 그만두게 되어서 아예 연길로 거처를 옮긴다고 했다.

 

“지금 가면 무얼 할 거요?”

내가 물었더니 친구가 연길 병원에 입원했는데 우선 병간호부터 좀 해주고 직장을

구하겠다고 한다.

오라는 데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물론 영어로 이어졌다.

 

“Is she in serious condition?"

중병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웃으면서 she가 아니라 보이 프렌드이고 한국 청년인데

가벼운 병이라고 했다.

“영어를 잘하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 있소?”

우리가 물으니 그러면 좋겠지만 지금 같아서는 한국으로 갈 가능성이 더 많다고 했다.

보이 프렌드 때문이냐고 다잡아 묻지는 못했다.

한동안 그녀와 박 기자는 한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에게 자기가 몇 살쯤 되어 보이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손자병법에 버금가는 만고의 지략으로 “하이틴” 같다고 했다.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자기는 스무 여덟 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 아이가 하나있는데 지금 여덟 살이고 할머니가 키우고 있다고 했다.

이혼한지는 벌써 사년이나 된다고도 했다.

아이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만나서 사랑을 했고 그러다보니 쉽게 이혼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I have many thoughts, now."

그녀가 조용히 되뇌었다.

“A lot of thoughts---."

내가 응대하였다.

현대 중국의 젊은이들도 고민은 세계사적이었다.

 

차는 역마다 서면서 통근자들을 쏟아놓기도 하고 빨아들이기도 하더니 마침내 어둠을

뚫고 달리다가 연길 역으로 달려들었다.

여섯시간 반 만이었다.

 


    (기차는 영안 역도 거쳤다. 우리가 아는 곳이라고 공연히 정감이 갔다.)

 


(나도 학교 다닐 때에 통학 열차를 탄 적이 있다. 가족이 기다린다는 것이 축복

이던 시절이다. 아직 그래도 중국에서는 그런 광경이 남아있다.)


 

 

하여간 그녀와 우리 사이에 오늘 오후 내내 일어난 인연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었다.

우선 긴 여행이 얼마나 재미있게 잘 지나갔으며 지루함을 퇴치해 주었던 가---.

박 기자가 인연이라는 표현을 한어로 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잘 이해하지 못한듯했고

나도 영어로 human relationship이니 bonds니 입에 떠올려 보았으나 모두 정확한

정황 설명으로는 부족하였다.

 

그때 그녀가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을 펴게 하고 따뜻한 체온을 실어 무어라고 썼다.

緣分(연분)이라는 한어였다.

아, 연분---.

무얼 어떻게 도모하자는 심산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연분을 맺고 싶어한다.

모두 외로우니까 그럴 것이다..

 

그녀가 볼펜을 꺼내더니 이른바 “연변 총각”인 박 기자에게 수첩을 꺼내라고 하여서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박 기자는 여행지에서 돌아 온 그 주말에 화룡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전승비를 보러

갔다가 수첩을 소매치기 당하고 만다.

나는 윤동주 특강을 들으러 가느라 따라나서지 못했었다.

하여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내 집 전화번호까지 그 수첩과 함께 날아 가버린

상태로 한동안 박 기자는 고생을 했으니까 다른 일들은 말해 무삼하랴---.

 

(이번 여행기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