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백두산 벋어내린 곳에서 두만강 원류를 찾다

원평재 2005. 7. 20. 00:39
 

백두산 벋어내린 곳에서 두만강 원류, 만족 원지, 조중 변경을 답사하다. 


백두산 길은 12년 전에 왔을 때와 사뭇 달라져서 미안한 말이지만 여행객의 흥취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산골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그만큼 향상된 것이 아니겠는가.

곳곳에 인삼밭까지 넓게 펼쳐져 있으니 발전 가속도가 앞으로 무서울 것이다.

북한으로도 길이 열린다고 계속 뉴스가 나오니 그 쪽, 삼지연 쪽으로도 내왕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든다.

 


(일출 때에 천지에 손 담근 기록을 확실히 내 놓으라고

해서 한 컷 올립니다. 물 묻은 손으로 사진을 찍어댄

것이 나중에 디카에 무리를 준듯 합니다.)

 

아무튼 이 쪽도 그 사이에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못다 고친

초가들이 산재해 있는 등, 처음 왔을 때의 예전 기억을 아직도 많이 되살려 주어서

마음 편한 나그네는 아련하게 먼 추억의 고향땅을 다시 밟는 기분이었다.

 

백산 시가지를 빠져나온 우리의 대형 리무진 두대는 시멘트 포장이 잘 된 올 때의 길을

버리고, 아직 포장이 되지 않고 곳곳이 패인, 그러나 왕복 양차로가 확실한 새길을 따라

조심조심 달리기 시작하였다.

 


 

운전 사기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으나 이 “조중 국경”에 새로 난 길을 달리기로 애초에

회사와 계약이 되어있다고 우리 대학의 멋쟁이 과장님이 안내와 설명을 해준다.

평소에 금지된 구역은 아니지만 교통상황과 양국 관계 등으로 인하여 아직은 그렇게

활짝 공개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안내 이야기가 나왔으니 안내원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우리 차의 안내양은 연변대학교의 관광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앳된 여학생으로

방학 중 현장실습을 나왔는데(우리로 치면 OJT일까), 젊은이로서의 열정과 순수함이

겹쳐서 드물게 훌륭한 안내를 받았다.

 

연길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로과”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살았는데

지금은 “화룡”에 부모가 계시고 본인은 연변 대학에 진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따로 지낸다고한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지만 꿈은 단단하고 당당하여서 앞으로 큰 호텔을 경영하고 싶다고

하였다.

강 가의 물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고래"가 되겠노라고 연변 사투리를 적당히 섞어 쓰는

이 여학생, 윤 양의 장래에 하늘의 축복이 내릴 것을 기원하고 싶다.

 

그녀의 친구들 서너명은 한국으로 벌써 시집을 가서 아이도 낳고 했으나 윤 양은

가난한 가운데 대학까지 보내준 부모님의 뜻을 져버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천녀가 목욕을 한 호수라고 비석에 새겨져 있다. 만족의 원지라는 글은 옆과

뒤쪽에 긴 설명문으로 나와 있다.)

 

차는 가다가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원성지로 여기는 호수 가까이에서 멈추었다.

한 5분정도 소로를 걸어 들어가니 맑고 큰 호수가 나타났는데 만주족이 조상으로

여기는 천녀가 매일 여기와서 목욕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만족 혹은 만주족의 시조가 된다.

짧은 소견으로는 원시 모계사회의 흔적이 보이는 건국 설화가 아닌가한다.

 

우리 안내양도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으나 처음 와본다고 한다.

어쨌거나 아직도 이토록 오염되지 않고 맑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공연히 아쉬웠다.

차는 다시 달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력이 들어가서 만든 비포장의 곧은 도로이건만 마치 인적미답의

지경같았다.

좌우로 들어찬 미인송과 자작나무, 백양나무들이 아름답고 울창하였다.

 


               (두만강의 최초 발원지는 바로 이 옹달샘이었다.)

 

차가 조금 더 달리더니 다시 섰다.

두만강의 발원지에 왔다고 하는데, 관목 숲이 울창한 시내가였다.

문득 생긴 그 시내가 두만강의 원류라는데 또다시 그 시내의 원류가 되는 연못이

바로 위에 있어서 그 한가운데의 옹달샘에서는  물이 퐁퐁 힘차게 솟아올랐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압록강과 송화강으로 내려가는 줄기는 처음부터

분명한데 두만강 쪽으로는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가 이 곳에서 물이 솟으며 물줄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백두산의 화산이 분출될 때에 용암 밑으로 수맥이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는

학자들의 의견이라고 한다.

 

물에 손을 잠그니 차기가 얼음 같다.

실개천 건터편 쪽은 바로 북한 땅이다.

최근에 비만 많이 오지 않았으면 그 쪽으로 경계가 불분명한 데에까지 나아가서

북한 군인들과 대화도 하고 위문물품도 전달 할 수 있으며,

그 쪽 야산에 있는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돌촉, 돌칼 등도 수습할 수 있다고

한다.

 


                      (오른 쪽 야산에 원시 문명터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물이 많아서 건너기도 그렇고, 사실 일정 부분 위험을 감수할 요소도 있다고 

하니 접근하지 못하여서 별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차는 또다시 달렸다.

이번에는 조어대라는 곳에서 차가 섰다.

바로 북쪽 영웅의 낙시터가 있는 곳이었다.

큰 바위 위에 낙싯대를 드리울 만한 공간이 있었고 두만강의 물살은 적절하였다.

국경의 폭은 그저 10미터나 될까---.

 

건너편으로 북한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손을 흔들었다. 대화가 되는 날도 있다고 한다.

물건을 던져줄 수도 있는데 오늘은 어쩨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 그 쪽 사정이 여의치

않는가 보다고 했다.

촬영은 모두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아예 카메라 등을 차에 두고 내렸다.

중국 쪽이나 그 쪽이나 병사들의 키는 모두 작았다.

키에 관한 것이 그날만의 공교로운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만감이 교차하였다.

우리의 안내양도 눈이 크고 마음도 크고 담대하였으나 키는 작았다.

 

두만강의 물길은 이 곳에서 제일 좁은 것 같았다.

그동안 두만강, 압록강을 좀 돌아다녔다고 자부하였는데 이렇게 좁은 곳이 연속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점심 먹기 전에 숭선이라는 곳에서 차가 다시 섰다.

바로 건너편은 북한의 남평이라던가 하는 곳인데 짧은 다리만 건너면 나라가 달라지는

곳이었다.

 

관광버스는 우리 안내원 윤양이 나서 자란 "로과"라는 곳을 지나쳤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인데 그나마 더욱 작아진 듯 하다고 윤양이 탄식하듯 외쳤다.

이 곳을 떠난 이래 처음 와본다고 하였다.

초등학교도 사라져 무슨 창고가 되었고 집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나는 왜 그런지 "로과"라는 지명이 생소하지 않았다.

버스는 이제 두만강을 멀리 하며 가파른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소학교 다닐 때에는 소풍이라고 겨우 이리로 놀이를 왔으며, 두만강에서도 물놀이

많이 했지요.”

그녀의 음정이 감상으로 떨렸다.

“저 조선 쪽 민둥산은 제가 여기에서 소학교 다닐 때 불 질러 태우고 다락 밭을 만들

었는데, 그 때 연기가 사흘이나 마을을 뒤덮었지요. 지금 우리가 올라가는 이산에는

유명한 시인의 시비도 있어서 올라가 놀았지요.”

 


(북쪽의 민둥산과 다락밭---. 다락밭을 만들 때의 연기는 두만강을 건너서

로과에도 3일간이나 연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 시인이 누구요?”

내가 물었다.

“남씨던가, 기억이 잘 안나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유명하고 애국자라고 하셨는데요---.”

그때  나무에 가린 산 정상 쯤에서 하얀 대리석 비석의 꼭대기 부분이 얼핏 보였다.

한자로 “李(이)”라는 글자만 언듯 보이다가 사라졌다.

“에이, 이씨인데---.”

내가 혀를 차니 윤 동무는 얼굴을 붉혔고 나는 궁금증만 더해갔다.

차가 정상을 넘자 포토 플레이스가 나타났고 우리는 모두 내렸다.

무산이었다.

 


                    (중조 국경에도 민감한 곳은 철조망이 있다.)

 


 

아, 철광석의 도시 무산이 나타났다.

두만강변 북한의 다른 도시보다는 규모가 컸고 새로 개축한 가옥도 눈에 띄었으나

전반적으로는 활기가 보이지 않는 옛 모습의 도시였다.

 


 

두만강 변에서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이 망원렌즈에 들어왔다.

북을 비방할 생각이나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나 한때 찬란했던 국경의 철광 도시가

우리의 포항제철 등을 염두에 둘때, 이렇게 무기력하고 전근대적 모습을 보이고

가라앉아 있는 것은 가슴 아팠다.

 


                                             (무산시 문화관)

 



(무산의 철광석이 보인다. 규모가 대단하다. 중국 쪽으로 수출하는 황색 대형

트럭을 많이 보았다.)

 

“아버지 저예요.”

윤양이 여유를 갖고 휴대폰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저 잘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오늘은 글쎄 로과에 왔어요. 학교도 다 사라지고

마을이 많이 줄었어요. 이사 나오고는 처음이잖아요. 오늘은 백두산, 두만강, 숭선,

로과를 거쳐 이제 룡정으로 갈꺼에요. 그런데 로과에 그 시비는 누구 것인가요?

네에---. 그럼 몸 조심하세요, 아버지. 저는 잘 있어요.”

끝 말도 많이 떨려나온 듯 하였다.

 


(이욱 시인의 시비에 박기자의 다람쥐 두 아들이 달라붙어 있다. 우리와 동행은

아니었고 백두산 쪽은 뺀 여정을 나중에 다녀왔다며 찍은 사진을 많이 보내주었다. 

박기자가 갔을 때에는 산으로 올라가서 이 시비를 답사하였다고 한다.

윤 양의 간접 공로였는지는 모르겠다.)

 

“리욱 시인이라네요, 선생님---. 아버지는 지금도 기억을 하시는데---.”

“아, 이욱 시인--. 그 분은 김학철 선생님이 소설가로 갖는 무게를 시인으로 갖고

계신다네,”

“김학철 선생님을 아세요?”

그녀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나는 금년도 '도라지'  최신 3호에 나온 “리욱 시인이 연변 문학의 시조냐, 그 보다 더

올라가야하지 않느냐”,

“그 분은 서정시인이냐 민족시인이냐” 등의 격론과 반론을 얼핏 떠올렸으나 더 이상

그녀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바다의 고래"를 꿈꾸는 이 관광학과 여학생에게 그런 메타피지컬한 논쟁을 뜬금없이

주입할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그래, 이욱 시인의 고향이 로과이지---. 그래서 익숙한 이름이었구나---.”

우리는 그 날 화룡과 용정을 거쳐서 연길로 돌아왔다.

멀리 일송정의 소나무가 외로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