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장백 폭포 거쳐서 백두를 다시 오르다

원평재 2005. 7. 18. 00:21
 

장백 폭포 거쳐서 백두를 다시 오르다.


(오늘 북한 쪽으로도 백두산을 밟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지난 주간은 정신이 없었다.

미국 소수민족 문학을 공부하다가 우리 연변의 조선족 문학에 눈이 뜨여서 여기

“연변 과기대”에 객원교수로 온 김에 조선족 동포문학과 관련하여 못난 논문도 하나

작성하였다.

마침 이 논문은 과기대학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 학회 행사 직전까지 요행히 완성

날짜를 맞추게 되니 학교로 부터 첫날에는 발표하고 둘째 날에는 좌장까지 하라는

요청이 와서 무책임하게도 책임을 맡았다.

 


 


 

교수하는 고향 동기에게도 두어 달 전에 발표를 권하였더니 이번에 연구원 두 사람까지

동행하여 요즈음 사회적 관심사인 노인 문제에 대하여 남들이 착안치 못한 분야의 발표를 마다않았는데,

사실은 덤으로 온 예쁜 연구원들의 발표 내용이 “청출어람”이었다.

 


학술행사가 끝난 날 오후에는 백두산 특별 등정 계획에 따라 희망자들만 두 대의

버스로 “이도백하”를 지나서 백두산 장백폭포 바로 밑의 “천상 호텔”에 늦은 여장을

풀었다.

 


                   (천상 호텔에서의 4시 30분, 천지로 출발 직전)

 

아, “이도백하”에는 오래된 휴게소가 있는데 그 곳에서 보통 관광객들이 물건은 사지

않고 반쯤 공개된 화장실만 이용한다.

나도 일을 반공개적으로 대충보고 흐르는 냇가에서 공개적으로 손을 씻고 올라오는데

사람들이 빙둘러서있고 누구랑 사진을 찍으며 난리이다.

가만히 보니 저 유명한 “새(조류) 박사”, 윤무부 교수가 아닌가.

우리 연구원 아가씨들도 사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내가 힘이 좀 있다.

“이거 윤 교수 아니오? 나---.”

“우와, 오랜만이군요.”

 


 (인연이 있는 윤무부 교수와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백두산 쪽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가 예전에 나에게 새소리 녹음한 카세트를 3개쯤 선사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그걸 다 기억해냈다.

 

일 년의 삼분의 일을 야외 텐트 속에서 지내는 이 양반의 젊은 날의 일상에는 말하자면

팩션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발을 붙이고 있다.

지금은 회갑 잔치한지도 꽤 되었다.

이양반이 하도 천의무봉하게 터놓고 사는 사람이라서 내가 이 정도만 변죽을 울리고

치고 빠져나가도 별일은 없을 듯 하다.

 

내 덕분에 우리 연구원들은 순서에 관계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윽고 버스는 곧장

떠나버려서 다른 사람들은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물론 함께 사진 못찍었다고 이국에서 벌금낼 일도 아니지만---. 

그 버스의 앞과 뒤에는 “새 박사 윤무부 교수 ---” 무어라 적혀있었는데 다 읽지는

못하였다.

 

버스가 떠나자 나는 그와 나누었던 짧았던 대화를 음미해 보았다.

“윤 박사, 백두산 자주 오세요?”

“일년에 꼭 세 번은 오지요.”

“어때요? 여기 생태계가---.”

“비관적이지요. 개체 수가 자꾸 줄어요. 갑자기 늘어나는 종도 있지만 그것도 길게

보면 생태계 이상이나 파괴의 신호이지요---.”

그의 근심을 조금 더 듣고 싶었으나 그를 모델로 쓰려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중단하고 말았었다.

백두산을 12년 전에 왔을 때에는 천지의 물에 손을 담그는 기회가 힘들었는데 이번에

보니 폭포 옆의 계단길이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어서 점점 많은 관광객들이 그리로

몰리고 있었다.

환경보호에는 붉은 신호 지수가 막 올라가는 현상이려니---.

 


                             (7월인데 아직도 눈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좌우간 내 이야기나 해야겠다.

10여 년 전에 처음 왔을 때에는 너무나 운이 좋아서 구름 한점 없는 천지를 아날로그

사진기에 마음껏 담아냈었다.

 

어쨌거나 최근에 잘 개발이 된 이 장백폭포 코스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널리 개방이

되고 있어서 일생일대의 경험들을 하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

나도 이 흐름에서 일탈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새벽 4시에 일어나 장백폭포의 힘찬

포말에 옷을 다 적셔가면서도 숨차 오르는 길을 힘든 내색 없이 따라 올랐던 것이다.

 

학회에서 발표를 했던 내 친구는 한창 때에 티베트까지 올라갔다 온 역전의 용사였지만

작년에 심장 수술을 받고나서는 조심하느라 중간에서 내려가고 젊고 예쁜 연구생들만

펄펄 날았다.

 


 

천지에서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일출을 보고나서, 다시 올라간

천문봉 영봉에서 내려다 본 천지는 최고의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조상님 음덕은

조금 본 셈인지,

12년 전 완전하게 천지를 관찰한 이래의 행운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한번만 더 이런 날씨를 타서 올라오면 그랜드 슬램이 되겠지만 글쎄 다음에는 현재

공사 중인 삭도(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와 볼 꺼나---.

삭도 쪽이 생태계 보존에는 더 낫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전에 백두산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비포장도로에서 바퀴가 펑크가 난 특이한 체험도

했으나 이번에는 자작나무 숲과 미인송 사이로 리무진 버스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려왔었다.

 


 


 

하지만 돌아내려 갈 때에는 아직도 포장이 안 된 “조중 군사도로”를 따라 앞뒤 공간에

오로지 우리 두 대의 버스만 달리는 특이한 주행 체험을 했으며 특히 만주족이

발상했다는 "원지"와 최근 발견된 "두만강 발원 샘터" 방문,

그리고 김일성의 낚시터(조어대)에서 북한 병사들과 손 인사 등을 나눈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이었다.

 


(천녀의 목욕 장면이 아니라, 목욕 호수와 두만강 발원지 옹달샘 등의 사진은

다음에 올립니다.)


이제 북한 쪽으로 백두산에 들어가서 올라가게 된다면 장군봉에서 일출을 보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