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단상

산수유 봄 소식/겨울호 이야기들

원평재 2010. 4. 6. 09:09

 

 

 

 

 

봄이 왔다.

늦은 걸음으로 잰체하던 봄이 숱한 어려움과 슬픔을 안고와서 우리 주위에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봄 소식은 대략 "산수유"로부터 온다.

산수유는 내 친구 수필가 한 사람이 표현했듯이 어린아이 "옹알이" 같다.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일 수도 있지만 잘 못 알아듣는 말 내용이 답답하기도 하다.

"산 수유" 모습이 그렇게 이중적이다.

 

그래도 봄이 왔기에 몽촌 토성으로 가서 요즘의 세상사처럼 다루기 힘든 산수유를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어찌하랴.

세상사 그러하다고 닫힌 가슴을 하고 있으면 무엇하랴,

가까운 공원에서 심호흡이라도 해야지.

 

지난해에는 상복이 좀 있었나보다.

계간 <문학 마을>에서는 "남해 가는 길"이라는 단편 소설로 "문학마을 소설가 상"을 받았다.

그게 또 어떤 계간지에 인터뷰 기사와 함께 실렸다..

아래에 그 단편 소설을 잠시 다시 싣고 싶다.

"한시적 게시"라더니, 그처럼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서초 문학상(소설 부문)"을 받았다.

단편 소설, "해금 산조"가  상을 갖고 왔다.

다음 차례에 봄 사진과 함께 여기에 싣고싶다.

 

수필과 몇가지 잡문들이 금년 초에 몇군데 게재, 혹은 연재되고 있음도 알리고 싶다.

역시 앞으로 봄 소식 사진을 올리며 함께 소개하고 싶다.

졸문들이라서 더욱 격려를 받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계간 <화백 문학>에 이 계절의 작가로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계절이란 지난해 겨울 이야기입니다.

 

 

 

 

 

 

포토 에세이도 함께~~~.

 

 

 

 

 

                                                       <단편 소설>

 

                                           남해 가는 길

  

새벽에 출발한 당일치기 남해 가는 관광버스에 추억 속의 페티 페이지가 홀연 기사석 위의 노래자랑

모니터에 나와서 구슬픈 노래를 아침부터 처연하게 불렀다.

나이 든 사람들의 평일 관광에 맞춘 선곡이긴 하였으되 가을 관광을 나선 사람들의 흉금이 조금 심란하게

돌아갔다.

선곡이 틀렸다기 보다는 "체인징 파트너" 어쩌고 하는 내용이 짝없이 나선 나그네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적당히 새판을 짜고 그 새판의 짝들에게 협찬사의 상품을 구입하여 서로 선물로 교환토록하려는 상술인지도

몰랐다.

하긴 대부분 커플로 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개중에는 홀로 나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니 언제 젖갈을 사셨어요?"

노래 때문에 생긴 스산한 분위기를 깨려는듯, 앞 좌석에 다정스레 앉아있던 중년의 부부가 뒤를 돌아보다가

홀로 온 김범수가 품에 꼭 안고 있다시피한  항아리 모양의 꾸러미에 문득 시선이 가더니 자기들은 혹시

좋은 물건을 놓친거나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가 꼭 껴안고 있는 작은 보통이를 젖갈이 담긴 작은 단지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3만 8천원만 내면 되는 당일치기 남해 관광 버스는 내려오면서

벌써 협찬사 방문이라는 핑게로 지방 특산품 회사를 몇군데나 들렀지만 아직 젖갈 공장 같은데에는

들리지를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그가 껴안고 있는 보퉁이의 모양이 그렇게 젖갈 항아리로 보인 모양이었다.

  

"저 양반 보퉁이가 젓갈 항아리라구요---? 에이, 아닐테지요. 여기까지 내려오며 언제 우리가 젓갈 시장에 

들렸어야 말이지요.

남해군이나 삼천포 항이 나오면 그제서야 필경 들릴텐데---."

김범수의 건너편 쪽으로 앉은 곱게 늙은 할머니가 얼굴에 맞게 고운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런 관광에는 이력이 난듯이 보였다.

"아, 그럼요, 할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젓갈이라니오---,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범수는 황급히 부인하면서 보퉁이를 다시 꼭 껴안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에 잠실을 떠난 관광버스는 협찬사를 두어군데 들리면서도 벌써 하동 평사리, 박경리가 쓴

대하소설 "토지"의 본향을 바로 좌우로 거느리며 화개 장터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45인승 리무진 관광 버스에는 한 서른명 가량의 중년과 노인들이 짝을 맞추어, 혹은 홀로 평일의

가을 관광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남해는 왜 가시나요?"

머리칼은 반백이었지만 얼굴은 아직 동안인 잘 생긴 남자가 얼굴이 고운 그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미국에서 살다가 왔거든요. 번 돈도 없고 자식들도 미국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고 해서 부부가

65세 되던 해에 연방 정부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엘 들어갔지요. 건강 보험은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으니

별로 걱정할게 없었구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뉴욕시 플러싱의 양로원에 영감과 함께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영감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어서 백년해로가 깨어졌어요."

"상대는 한국계 여자였나요?"

젊어보이는 혼자 온 어떤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왠걸요, 한인들은 주로 그 양로원 건물의 1, 2층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3층의 필리핀 여자와 눈이 맞았어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주제에, 호호호."

할머니가 곱게 웃었다.

"하여간 그렇게 되고 보니 희망도 없고 주위에 민망하기도 하여서 귀국을 하고보니 미국 시민권자는

1년에 한번은 미국으로 나갔다 와야한다네요. 돈도 문제이지만 열 몇 시간을 비행기 타고 들락거리는게

나이가 들고보니 여행이 아니고 고문이예요."

 "우리나라로 역 이민을 하시면 되잖아요?"

역시 아까 그 혼자 온 사내였다.

"그렇게 되면 연방 정부로부터 노후 연금도 안나오고 메디케이드 혜택도 사라지니까 감히 엄두가 나지않죠.

그런데 최근에 빙고가 터졌어요!

두가지 행운이 지금 내게 찾아온 것 같아요. 하나는 여기 남해군과 제주도에 미국 마을이 생긴다나봐요. 

그리고 미국 마을에서 살게되면 이곳 남해에 이미 생긴 독일 마을처럼 1년에 한번씩 밖으로 나갔다 오지

않아도 되나봐요. 무슨 거소증인가 하는걸 수속하면 된다는군요.

그리고 이제 곧 우리가 들어갈 남해섬을 보세요. 보물섬 남해군이라는 별명이 어울리게 정말 경관이 좋고

먹거리도 많고 겨울에는 춥지도 않답니다. 또 독일 마을이 가까이 있어서 나같이 외국에서 살다온 늙은이에게는

정서적으로도 교류를 할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 서독 광부로 갔던 할아버지들이 좋아요, 호호호."

그녀가 또 곱게 웃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할머니께서는 여러차례 오셨군요. 그런데 왜 또 관광 버스 타고 오셨어요?"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물어보았다.

"혼자 승용차를 몰고 올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관광 버스가 싸잖아요. 협찬사들이 있어서 우선 여행비가

싸게 나오고, 나는 그런 협찬사 물건을 하나도 사지 않으니 결국 비용이 싸게 먹히지요.

물론 여행사들로부터는 찍혔어요. 영업 방해가 된데요, 호호호."

 

"그럼 두번째 빙고로는 뭐가 터졌지요?"

고운 할머니는 이제 차안의 인기인이 되어서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네, 두번째 빙고는 서해안 당진에 있는 내 친정의 땅값이 아주 많이 올라서 시집간 내게도 유산이 생겼다는게

아니겠어요.

민법이 바뀌어서 시집간 딸들도 상속권이 인정되더라구요. 그래서 친정에서 생긴 돈으로 서울 서초동에 무슨

하이빌이라는 작은 주상복합 아파트를 일단 근거지로 하나 마련했고, 결국에는 남해군 앵강만에 생긴다는

미국 마을로 아주 내려올까해요.

앵강만에는 또 청정 유기농산물 재배지도 있고해서 노인들에게는 여간 살기가 좋지 않아요---."

"에이, 할머니는 서독 광부 할아버지 한분과 눈이 맞았잖아요."

어느틈에 서울에서 따라 온 여자 관광 가이드가 할머니 바로 옆에와서 반쯤 놀리는 소리를 했다.

 

"나 참, 가이드 언니, 아니 그렇게 면박 주면 가이드 아줌마라고 부를거야. 내가 애인이 하나가 아니라니까.

여러 나이든 신사분들과 그저 지나간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 여기 한국에서와는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마치 공유한 추억처럼 반추하고 나누며 지내다 서울로 올라가요.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이 충남 당진의 송악과 서울의 청량리인데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도 예전 청량리와

분위기가 비슷한 뉴욕의 플러싱에서 죽 살았다오. 

한국에서 미국으로 관광 온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에 이런 후진 곳이 있느냐고 놀라는 곳 청량리, 아니

플러싱, 요즈음은 또 중국 사람들과 조선족 동포들이 몰려와서 더욱 예전 청량리 같이 보이는 그 곳이

나는 아직도 살갑고 고향같아요.

그래서 내가 분위기는 좀 썰렁해도 그 곳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배신한 남편이 거기 양로원에 살고 있으니 

그 동네는 꼴도 보기싫고 서울 청량리도 완전히 변해서 아는 이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런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살아야 할 곳이 내가 노년을 의탁할 곳이 아니겠소.

그런데 남해가 그래요."

가슴 아픈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제 각각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관광버스는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정해역을 끼고 어느새 남해 군청으로 들어왔다.

 

남해 군청에서는 어떤 중년의 부인이 관광버스에 올랐다.

"저는 남해 군청에 관광 안내 자원 봉사자로 등록된 서해심이라고 합니다.

자원 봉사 1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이 안내 제도가 생기자 마자 제일 먼저 등록을하여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월요일 관광 안내를 맡는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에 아주 겸손한 거동으로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였다.

 

"네, 이분이 젊어서 이미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시고 한국 문인협회와 펜 클럽 회원이신

서해심 시인이시지요. 저같이 문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읽어보아도 쉽고 깊은 내용이 담긴

시를 쓰시더라구요, 

남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과 또 자연보호자로도 이름난 서해심 선생님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그동안 벌써 많은 분들이 놀랍게도 이 분의 관광 안내를

받으려고 월요일 관광버스를 탈 정도라니까요.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서울에서 따라온 관광 안내원이 서해심 안내 봉사자를 극진히 칭찬해 마지않았다.

 

"맞아요, 맞아. 저 서해심 시인이 대단한 분이세요. 남해군, 앵강만에 대한 애정도 그렇지만 외우고

계신 시는 또 얼마나 많다구요."

할머니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아이구, 할머니 또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서 시인은 중년의 나이에 얼굴이 넓고 육덕이 있는 착한 부인의 인상이었다.

"저는 여기 남해섬 출신으로 고등학교는 진주에 나가서 했지요. 진여고 다닐 때에 가까운 곳에 있는

진고 남학생을 만나서 연애를 하느라 공부는 시원치 않았는데 책은 밤을 새우며 많이 읽었어요.

그 남학생과 결혼을 해서 여기 제 고향 남해로 돌아와 농사도 짓고 시도 짓고 어업도 좀 하고 그렇게

지낸답니다."

 

이 날 오후에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남해를 대상으로 한 시를 외운 것은 십여 작품이 넘었다.

김범수가 타고온 관광버스는 특별히 문학 기행을 목적으로 한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연한 듯이 시 낭송으로 관광 가이드의 첫 임무를 시작하겠다는 자세였고 탑승한 관광객들도

고즈넉히 그녀의 문학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그녀가 낭송한 첫 시가 고두현의 "남해 가는 길"이었다.

 

남해 가는 길

 

고두현.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리 뱃길 시오리

나루는 아직 닿지않고

석양에 비친 알몸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같은 저 섬으로 가고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을 모아

화전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그녀의 낭송에는 서부 경남 특유의 모음 혼란이 언뜻언뜻 스몄으나 "슷갓처럼 읖드린 앵강에 묻혀

다씨는 살으스 덜아가지 아너리---"

하는 마지막 두 행에서는 듣는이의 가슴을 줘어뜯는 페이소스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관광 안내는 이렇게 모두 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름난 시인의 시의적절한 작품이 없는 경우에는 그녀가 지은 시를 수줍게 낭송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도 했다.

 

그녀가 개다리 소반만한 남해섬이라고 하였지만 크기만 따져도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이었다.

"제가 먼저 이 섬을 개다리 소반만하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진여고 다닐때 이 섬에서 그리로 같이 간

여학생이 또하나 있었는데 저와는 단짝 친구였지요.

그 친구가 항상 그런 말을 했지요. 

그 친구와 저는 집이 부자라서 진주로 유학을 간게 아니었어요.

그때 독일에 광부로 가신 아저씨들과 간호원으로 가신 언니들이 어떻게 인연이 되어 여기에 있는

가장 가난한 두 여학생을 진주여고로 유학을 보내주신 것이지요.

이 장학금은 오래 계속 되지는 못했어요. 아마도 우리가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중의 한 학생은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가버리고 저는 또 고향에 돌아와서 별로 이름난

사람이 되지를 못했기에 장학금을 주신 그 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여서, 그래서 후배들을

기르지 못했던가, 자책도 하지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문득 친구 이야기까지 나오고 보니 안부가 그립군요. 그럼 고두현 시인의 안부라는 시를 한편

낭송해 드릴께요."

그녀가 이내 고두현의 시를 다시 한편 외었다.

 

 * 안부 
-유배시첩 3 - 고두현

동물 끝 바위 갈매기 한 쌍 닿았구나.
벼랑 아래 끊임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눈에 뵐 만하면 멀어지고
나랏님 열두 번 벼슬
때마다 사양하고 혼자 예 앉으니
망망한 대해가 내게로만 무너지네.
어지러운 잡풀 사이
소나무처럼 우뚝 선 새
해풍에 상하지 않을까
밤이 되면서 근심이 깊어졌다.
물소리 쿵쾅이는 잠 속에서도
새는 떠나지 않고
부리만 갈고 있다.
속절없이 웅숭거리는 바람 따라
하얗게 일어서는 저
뼈, 혹한보다 더 시린
그대의 안부.

 

 

그녀의 시 낭송은 마침 관광버스가 앵강만에 삿갓처럼 떠있는 노도를 내려다보는 지점에서 절절히

흘러나왔다. 

노도의 앞에는 아주 작은 무인도 붓섬이 노도에 유배 온 서포 김만중의 진짜 붓인양 붓처럼 생긴

자태를 당당하게 뽐내고 있었다.

 

"제 친구 정희는 진여고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이 개다리 소반만도 못하게 작은

남해 섬에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무작정 상경을 하더라구요.

가서 무엇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자리를 잡았다고 하고 이어서

결혼을 하였다는 소식도 왔지요---."

이야기가 그쯤 진행될 무렵부터 서해심 시인은 김범수 쪽을 자꾸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하여튼 정희는 잘 난 청년을 만나서 결혼을 하였고 잘 산다고 가끔 전화 연락을 하고 지냈지요.

딸도 하나 낳아서 잘 기르고 있다고---.

내가 때때로 따졌지요. 결혼식이 애들 소꿉장난도 아닌데 어찌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청첩을 하지

않았냐고.

그 애네 집이 가난하고 어렵다는 면에서는 저와 사정이 비슷했어요. 아버지는 고깃배 타고 나가셨다가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미역과 전복 따는 잠수(潛嫂), 그러니까 해녀 노릇을 하시다가 뭍으로 개가를

하셨지요.

그러니 남해와는 연고가 다 끊기고 말았어요.

저희 집은---, 그냥 가난했어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김범수를 한동안 쳐다 보았다.

 

"제가 개다리 소반만한 남해를 지키려고 한 것은 네 귀퉁이의 개다리처럼 모양이야 별건 아니지만

하나라도 없으면 안되는 그런 뚜렷한 이유가 있었지요.

첫째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니 버릴 수가 없다. 두번째는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고장이다.

셋째는 모두가 버리고 떠나버리는 곳이라서 불쌍하고 가련한 대상이다, 나만이라도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네번째이자 끝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지키면 마침내 언젠가는 비장한 승리가

돌아오리라---, 그런 고집 때문이었어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 예언과 고집은 어느정도 적중했다고 감히 선언을 해봅니다."

"옳소!"

항아리를 안고 있던 김범수가 그녀의 시선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그의 돌출 반응에도 별로 웃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느 때 부터이던가 너무 진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그의 외침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저는 사실 지리산 빨치산의 후예쯤 되는 사람입니다. 제 외할아버지께서는 1950년대 초에 입산

하셨다가 전사하시고 제 어머니께서는 유복자로 태어나셨답니다.

어렵게 자란 이 처녀는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뱃사람 청년하고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하고 저를

낳았는데 그 해에 연평도까지 올라간 제 아버지의 고깃배가 북으로 들어갔답니다.

북에서는 의거 월북이라고 하고, 결국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지요.

한참 전에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김만철씨 가족이 남으로 내려왔는데 그분들이 이 곳

남해에 큰 집을 짓고 정착했지요.

지금은 이 곳을 떠났지만 여기 계실 때에는 가끔 만나보기도 했는데, 제 아버지의 처지와는 반대인

그 분들의 모습에 감개와 감회가 무량했어요.

저는 박해 받은 사람은 무조건 동정하고 그 편이거든요.

지리산에 들어가신 외조부도 좌익, 우익이 아니라 자유의 편이셨을 겁니다.

그런데 김만철씨네는 딱하게도 사기를 당해서 이 곳을 뜨고 말았지요. 저 큰 집이 그 분들이 지어서

숙박업을 하려고 했던 곳이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팬션같은 집을 지어 살고 싶었던것 같아요.

저 앵강만을 내려다 보면서 말이지요."

그녀가 가리키는곳에 큰 기와집 하나가 주위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렇게 앉아있었다.

"저기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절하게 자리한 저 섬이 '노도(櫓島)'라는 유인도이고, 그 앞에

다소곳이 고개 숙인 작은 섬이 '붓섬'이라는 무인도이지요.

서포 김만중은 저 노도에 유배를 와서 마침내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붓섬을 말하자면 예로부터 저 섬을 바라보며 책을 읽은 사람들이 과거에 많이

급제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리로 꽤 내려와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많아요, 호호호."

그녀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그녀는 원래 어두운 얼굴 모습이 아니었는데 이날은 어쩐지 얼굴에 그늘이 끼어있어서 갑자기

웃는 모습이 차라리 의외로 보였다.

 

"서포는 저 섬에서 죽는날 까지 '구운몽'과 '사씨 남정기'를 썼다고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깊은

의미가 있었지요.

'사씨 남정기'는 장희빈에게 빠진 숙종 대왕에게 세자책봉과 관련하여 정도를 걸으라는 상소문의

성격이었습니다.

두 작품 중에서 제가 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쪽은 '구운몽'입니다. 구운몽은 생이별을 하고 떠나온,  

한양에 있는 어머니에게 위안을 드리기 위하여 저술했다는 이야기로 제 가슴이 져밉니다.

서포는 마포나루에서 어머니와 망종 뵙고 유배길에 올랐지요.

다시는 돌아가서 어머니를 뵐 수 없으리라는 걸 예측하면서 하직한 별리였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구운몽이 이 곳 아닌 다른 데에서 쓰여진 것일 수도 있다는 일부 학계의 고증

따위는 저 같은 시인의 안목에서는 주요치 않다고 봅니다.

저는 지리산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그리고 그 유복자로 태어나신 제 어머니와 숙종 시대

서포의 행적이 항상 가슴 속에 오버랩 될 따름입니다.

그리고 서포가 당시로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산문 문학, 지금의 소설 장르에 손을 댄 용기와 탁견,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과 도전, 전통 시가에 반역을 한 그 모반의 자유정신을 높이 기릴 따름입니다.

 

 

시대의 금줄을 넘어 앞으로 뛰쳐나간

서포의 도포 자락 펄럭이는 바람을 꼬아서 

앵강만에 높이 뜬 방패연의 연줄을 삼는다.

 

유리가루 묻힌 저 모반의 긴 산문,

그 연줄 잡고 유복자 어미의 못난 딸은

붓섬의 묵향 찍어 하늘에 뿌리니

자유의 날개 좌우익으로 단 해조 한마리 되어

가슴 조차 풀어헤치고 앵강만을 너울거린다. 

 

서포의 산문을 위하여 언젠가 저는 이렇게 운문을 읊은 적이 있었지요.

'유배지의 좌우 날개'라는 제 졸작 시의 일부입니다. 

서포도 유복자였습니다.

병자호란 때에 강화도를 지키던 아버지 김익겸 생원은 순국을 하고 조선의 맹모(孟母)라고 일컫는

어머니의 극진한 뒷바라지로 벼슬 길에 오른 서포였지만 아까도 말씀했다시피 숙종조,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봉하는 문제에서 왕의 노여움을 사 유배를 당하는등, 끝없는 정쟁의 희생물이 되다가

결국 이 곳 노도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그런 서포를 생각하면 저는 제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유복자로 태어나셔서 아들 하나도 낳지 못하고 딸아이 저만 낳으신 어머니는 평생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단 한가지는 제가 효도한 것 같아요. 어머니 살아 생전에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 시 부문에 장원을

하였거든요. 지병을 앓으신 어머니는 기쁜 소식을 정월 초하루 날자의 신문에서 보시고 숨을

거두셨지요."

 

그 말 끝에 그녀는 조금 눈시울을 적셨다.

관광 버스에 탄 사람들도 모두 비감해 하였다.

"아니, 서해심 시인님. 매주 월요일마다 그렇게 우십니까?"

김범수가 또 소리를 빽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도 물끼가 배어 있어서 아무도 탓하지는 않았다.

아까 '가천 마을'이라는 곳에 있는 암수 바위를 구경하고 옆에 붙은 가천 막걸리 집에서 술잔을 모두에게

한순배 돌린 것이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듯 하였다.

가천 마을의 술은 잘 익어서 맛이 있었고 조금 독했으며 점심 시간을 넘기면서 사람들의 이래저래

고픈 배에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네, 그러고 보면 제가 자원 봉사 나오는 월요일마다 가슴을 저려 조금 눈시울을 붉힐 때가 많군요.

꼭 그 가천 막걸리를 한 잔하고 난 다음에 그러하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제가 본 처음부터 계속 끼고

계시는 그 항아리가 무엇입니까.

암수 바위를 보러 저기 해안쪽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와 막걸리를 마실 때에도 품에 안고 계시니

무슨 금송아지라도 들었나요?

올라오시다가 휘청하면서 아차하면 깨뜨릴번도 하셨지요. 제 가슴이 철렁하면서 기절할뻔

하였다니까요."

가끔 소리나 지르는 까다로운 관광객을 그녀는 탓하지 않고 잘 보듬었다.

"에이, 말씀 감사합니다만 차라리 저기 암수 바위에서 깨뜨려 버릴걸 그랬어요. 하지만 물미 해안

지나서 금산 보리암까지는 갖고 가야겠네요. 제가 두고내리지 못하고 항상 안고다니는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풀어헤쳐 보려고 해서 그래요.

여러분들, 제발 나좀 그대로 놔두시면 좋겠네요."

김범수는 술이 약한지 한잔 술에 말이 헤퍼졌다.

"아니, 물미 해안을 어떻게 아세요? 물미 해안은 물근리에서 미조 해수욕장까지의 해안을

말하는데 저기 보시다시피 절경의 연속이랍니다."

서해심 시인이 물미해안이라는 김범수의 말에 반색을 하며 다시 그에게 시선을 꽂았다.

"아이구, 서 시인님. 물근리가 뭡니까. 물건리라니까요, 물건! 매번 내가 고쳐드려도 안되나 봐요."

고운 할머니가 서해심의 모음 혼란을 웃으며 지적하였다.

"물건리에 독일 마을이 있고 저는 거기에서 내린답니다. 독일 마을에 있는 팬션은 일박에 7만원이지만

방도 많고 시설이 아주 좋아서 가족이 있는 분들은 함께 오시면 정말 좋아요.

저는 혼자니까 방 한칸만 디스카운트를 받아서 지내지요. 그 곳 계신 분들과 격의없는, 그리고 격조

높은 대화를 즐기다가 돌아와요.

오해는 마세요. 동지 여러분! 호호호."

 

"네, 할머니께서는 정말 멋있게 사세요. 30년 이상을 다른 나라에서 사시다가 이제는 어느 곳에도

하이마아트가 없는 고향 상실자가 되셨는데 이렇게 진정한 고향 사람들을 비록 소수이지만

물근리에서 발견하신게 얼마나 다행이신지, 결국 할머니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서해심의 잔잔하고 고운 말이었다.

"아, 물근리가 아니고 물건리라니까요, 물건!"

할머니가 또 외쳤다.

"그리고 자꾸 할머니라고 하지 말아요. 아직도 청춘이랍니다."

그녀가 웃으며 항변하였다.

 

"네, 뉴욕댁. 그런데 어떻게 시집간지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 친정 유산을 받을 수 있었나요?"

멋쟁이 중년 신사가 자기는 처음부터 그게 궁금하였고 관심이 있었다는 듯이 그제서야 전말을

물어보았다.

"아, 그건 내가 종가집의 딸이기 때문이었지요. 종가의 종답과 선산이 모두 우리 일족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는데 그렇게 두고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요.

그런데 그 땅들이 서해안 고속도로 만들때 수용되고 또 인터체인지로 들어가고 물류 센터로

흡수되고 하면서 시가 보상이 되니까 아들, 딸 구별없이 똑같이 배당이 됩디다. 빙고였어요,

호호호."

그녀가 또 격의없이 곱고 크게 웃었다. 

"할머니, 아니 뉴욕 댁. 아니 뉴욕 아씨. 저도 여기 물근리, 아니 물건리에서 내리면 안될까요,

하하하."

멋쟁이 중년 신사가 농담인척, 사실은 진담을 털어놓았다.

 "독일 마을에는 예약이 없어도 방이 있겠지만 물건리 정류소에서 내리고 말고는 본인의 자유가

아닐까요. 저하고 한 방 쓰실 것도 아닌데, 호호호."

"제가 오늘 밤에 서울 올라가지 않으면 쫓겨납니다. 하하하."

중년 신사가 신사답게 손을 들었다.

그제야 근심스럽던 얼굴을 안심스런 얼굴로 바꾼 서 시인이 입을 열었다.

"저 아래 아름다운 물미해안을 보며 시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역시 고두현 시인의

'물미 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입니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리 해안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 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드는 거 좀 보아요. 


이제 뉴욕 아씨는 내리실 때가 되었네요."

서 시인이 시를 낭송하고나자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를 세웠다.

 

"이번 함께 온 일행들이 참 좋았어요. 다시 남해로 내려오시려면 월요일

버스 편을 예약하세요.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게요. 그리고 저 항아리 끼고 계신 아저씨,

금산 보리암까지는 꼭 끼고 가신다니 무언가 짐작은 되네요.

다만 그 사연이 궁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서 시인께서 듣게 되시면, 아니 꼭 들으셔서

그 사연을 제게 알려주세요. 슬픈 사연같네요."

고운 할머니는 독일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 가에서 내렸다.

차는 서로 손 흔들 여유도 주지않고 휭하니 달려갔다.

 

"아, 할머니께는 점심도 드리지 못했군요? 그래도 됩니까?"

중년 신사가 뉴욕 아씨를 다시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복귀시키며 유감의 뜻과 깎듯한 예의를

표했다.

"아이, 걱정마세요. 알아서 챙기시는 분이거든요. 말씀 듣고보니 사실은 선생님께서 점심 독촉

하시는 것처럼 들리네요. 뉴욕 아씨께는 매번 점심값을 빼드리지요. 독일 마을에 가시면 소시지

겯들인 식사가 끝내주거든요.

선생님들은 곧 미조 해변 끝 쪽 식당으로 모셔서 죽방염으로 잡은 멸치 쌈밥을 대접할께요.

죽방염은 대나무로 만든 큰 고깔 모양의 그물인데 그렇게해서 잡은 멸치는 남해 특산의 크고

맛있는 특징이 있고 또 잡을 때 상처도 나지 않아서 떼깔이 좋다고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서울에서 따라온 가이드 아가씨가 나서더니 달변으로 설명을 하고 일행을 아담한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정말 아무데에서나 보기는 힘든 큰 멸치가 삶은건지 조림을 한건지 큰 양은 냄비에 수북이 담겨서

식탁마다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고, 갖은 양념 그릇과 여러가지 채소들이 이름도 모를 젓갈 종류와

함께 또한 식탁을 장식하였다.

이 시대에 누가 밥을 탐하랴만 여행객의 빈 속에 마음껏 퍼먹도록 큰 양푼 대야같은 데에 흰밥과

오곡밥이 고봉으로 나오니 모두들 푸짐하고 너그러운 마음들을 오랜만에 맛보는듯 하였다.

풍성한 마음이 생겨서 그런가, 그 식당에서 사람들은 따로 파는 마른 죽방멸치를 모두 듬뿍 샀다.

시중의 멸치값보다도 몇배 비싼 가격이었다.

그 식당은 죽방 멸치 쌈밥만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

"유자 막걸리"라고 하는, 유자 열매를 누룩으로 띄어 만들었다는 술이 이름은 거칠었지만 내용은

맑은 청주처럼 고운 빛갈로 식탁마다 한병씩 나왔는데 맛에 취한 여행객들은 이윽고 개인 부담으로

더 시켜서 마시고 또 마시며 기분을 냈다.

 

"유자 막걸리라면 제가 또 고두현 님의 유자 시를 읊습니다.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그런디, 선생님은 이제 항아리를 두고 오셨군요."

 

서해심이 섬진강 너머 동네의 사투리를 시어의 낭송 끝에 섞어쓰며 김범수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유자향의 고운 술에 얼굴이 잘 익어있었다.

"할머니 말씀 때문에 눈치 빠른 분들께는 비밀도 이제는 대충 다 탄로났는데 탓을 하지 않으셔서

고맙지요, 뭐. 좌석에 잘 모셔두고 왔습니다."

"정희를 아시지요?"

서해심이 이제 대단할 것도 아니라는 듯이 김범수에게 망설임없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김범수가 약간 우물쭈물했다.

 "아, 정희가 기어코 죽었군요."

"네---."

"제가 문인협회 지부를 맡으며 가끔 서울을 다녔어요. 그 때마다 정희에게 연락을 했으나 만난건

몇번 되지 않았지요. 예쁜 얼굴이 날이 갈수록 많이 상했으나 패기는 옛날 같았고---."

"그게 다 허세였지요. 우린 아무 것도 없는걸요."

김범수의 말이었다.

"강남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서도 한번도 데리고 가지는 않더군요."

"강남이라니요. 우리는 평생 경인 전철변에 전세살이이지요."

"그래도 전화는 항상 555국, 강남 전화국이던데요. 제가 전화는 자주 걸었어요. 최근에 특히 정희가

자꾸 죽는다고 하여서---."

"그 전화 번호는 보험 회사 점장하면서 받은 것이지요. 전화는 영업상 점장에게 따로 나오지만 방은

여럿이 함께 쓰지요. 그래도 그게 무료이고 강남 전화국 번호의 전화라서 외근이 아닐 때에는 휴대폰

그만두고 꼭 그걸 이용했답니다."

"그게 그렇군요. 그건 어쨌든 제가 선생님 얼굴을 사진으로는 본 적이 있어요. 작년 어느 날인가 

정희가 가족 사진을 갖고 나왔더군요. 어리고 예쁜 따님이 가운데에 있는---. 오래 된 사진같았어요.

선생님도 젊을때 모습이었는데 사실 지금 그 얼굴 기억은 없지만, 아까부터 선생님 모습을 보며

무언가 느낌이, 직감이 오더군요."

"제가 최근에 더더욱 팍삭 늙었습니다."

"반년 전에 정희가 자기는 곧 죽을 것 같다고 전화를 했어요. 우리의 고향이, 남해가 그립다고도

했어요. 생활이 너무 고달프다고도 했고---. 서울 간 정희가 그런 말 한건 그 때가 처음이었지요."

 

"그런 이야기를 그나마 하던가요. 제가 마누라를 알게된건 동평화 시장 꼭대기 층에서 였지요.

나는 대학생 위장 취업자였고 정희는 그때 미싱사로 달려라 삼천리,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고

있었구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의거 이래, 달려라 삼천리, 그 미싱사들의 상황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래도

밑바닥 인생이었지요. 우리 둘이는 눈이 맞아서 살림을 시작하면서 오바로꾸와 미싱 자수 쪽으로도

자리를 옮겨보고 했지만 개미 체바퀴 돌듯한 생활은 나아질 여지가 없는 데에다가 제가 위장취업

이란게 탄로가 나서 둘다 쫓겨났지요.

그 바닥 근로자 민주투쟁도 시들해졌고 그래서 정희는 생활 설계사, 그러니까 보험업을 시작했으며

나는 급한데로 서적 외판을 했어요."

"요새 무슨 서적 외판이 되나요. 제가 그쪽은 좀 알지요만---."

서해심이 딱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네, 잘 아시겠지만 인터넷 시대에 누가 책을 사봅니까. 또 책을 사도 인터넷 주문 체제가 되고 보니

저는 완전히 손을 들어버리고 집안 살림과 아이 학교 보내는 책임을 맡은 꼴이 되고 말았지요.

다만 아내는 영업 실적이 좋아서 표창도 받고 인센티브도 받고 한동안 잘나갔지요.

내친 김에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는지 점장이 되면서 주로 법인 보험에 매달렸어요.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지요."

"법인 보험이요?"

"네, 법인체에도 화재 보험에서 부터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하는 의무 보험 제도가 많지요. 잘하면

한껀 만으로도 대박이 터진답니다.

총무과장, 법인과장, 경리과장 등이 로비의 대상인데 이때 남녀간에 사고를 칠 수가 있나봅니다.

어떤 재벌회사의 괜찮은 과장과 정희가 사랑을 했어요. 나는 그때 완전히 망가져서 술이나 퍼마시고,

그래도 집안에서 밥과 빨래 같은건 도맡아서 하던 때였지요.

한때 노동운동을 현장에서 해내던 이상주의자가 완전히 성격이나 정신이 파탄된 상태였어요.

그런데 정희가 느닷없이 이혼을 해 달라고 그러더군요, 작년 이맘때였어요. 딸 아이도 자기가 데리고

가겠다면서---."

"아, 그때가 제게 사진을 보여줄 때였나보군요, 세상에!"

"놀랄 것도 없지요. 당시 나는 너무나 심신이 망가져서 정희가 제대로 진정한 사랑만 새로하고 있다면

그냥 보내주고 싶었어요."

그는 팻트 병에 든 유자 막걸리 하나를 다시 따서 서해심에게는 작은 잔으로 채워주고 자신은 맥주

컵에 잔뜩 부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제가 술을 끊었다가 다시 입에 대는군요. 하여튼 아내와 그 중년 과장과의 사랑은 진정한

모습이었어요. 과장은 상처를 했더군요. 남의 부인과 자식을 빼앗는다는 자책감에 괴로워도 하고,

그래서 정희와는 그냥 그런데로 현상을 유지하며 지냈으면 하는 가련한 도둑놈 심뽀도 간직한

이 시대의 불운한 중년이었어요."

"만나 보셨군요?"

"그럼요, 술도 두어차례 마셨지요. 하지만 어찌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였지요."

그가 또 팻트 병을 기우려 유자 술을 하나 가득 맥주잔에 따루었다.

 

김범수는 그 유자 술을 혼자 다시 비워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회사의 오너가 법인 보험 결정의 최종 프레전테이션 장소에서 정희를 보고는 첫 눈에 반했다는군요.

섹시한 여자라고 거의 대놓고 감탄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릴 때부터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정희에게 끌린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가난과 불평등을 이겨내고 제도를 고쳐내야겠다는 순전한 도전 정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의의 기개,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심과 빠른 학습 능력, 미래에 대한 순수한 희망과 기대,

뭐 이런 것들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정희의 그런 정신보다는 몸매만 바라보았네요.

무슨 나쁜 마음이 있고 없고 간에 그런 느낌이, 그런 필이 정희를 보고나면 꽃힌데요.

팔자인지도 모르지요. 사실 내가 반 평생을 같이 살며 알기로 정희는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숙맥이거나 초연했어요."

그는 유자 술을 다시 따루어 이번에는 우선 한모금만 들이키고는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런건 어쨌든 그 오너라는 작자는 실무자 선의 가계약을 파기하고는 자기와 직접 흥정을

하자고 나섰다는군요. 그리고 정희를 능욕, 글쎄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통정을

하고---. 이 멍청한 여자는 버릴 수 없는 야심 때문에 그 더티 게임에 말려든 모양이었겠지요.

자, 이제 이 여자가 벌여놓은 덫과 말려든 덫이 얼마입니까.

나는 그 불운한 과장과 두어차례 술을 나누었지요,

자신의 순정한 사랑을 능욕하였다고 그 오너에게 대들었다는군요.

너무 분해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랍니다. 정희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함께하여서 말이지요.

이게 참 가당찮은 이야기인데도 사실이랍니다. 마누라와 그 과장이 한동안 나를, 이 김범수라는 존재를

아예 안중에서 제외한 결과 같기도 하고 내가 또 내 존재를 그렇게 영락시킨 결과이기도 하겠지요.

내가 어느날 그의 연락으로 술 자리에 나갔을 때 이미 백수가 된 그는 나처럼 폐인 비슷하게 되어

있더군요. 정희가 그 계약의 조건으로 과장과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오너의 엄명을 받아들이자 과장은

회사 오너의 부인에게 사진과 글을 보내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고 하더군요.

그는 정희가 아무리 돈에, 아니 성취욕구에 눈이 어두웠을지라도 자신과 헤어지고 어떻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를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정희는 자기로 인하여 새로 만들어졌다고도 소리를

질렀는데 나야말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정희가 류케미어, 그러니까 성인 혈액암, 백혈병에 걸린건 그때쯤이었어요.

정희가 아프고나서부터 병원에서 하도 많이 들은 말 류케미어, 그 성인 류케미어는 급속히 진전 되었어요.

반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오고 어느 날, 정희는 과장과 예전에 즐겨다니던 길을 드라이브

나갔더군요.

남한강변, 카페 길에서 과장은 술을 많이 마셨고 돌아오는 길은 정희가 핸들을 잡았는데 큰 사고가

났어요. 사실은 사고인지 운전자의 자살 사건인지, 바로 아내가 다니던 그 보험회사하고 지금 법정 다툼이

일어나 있어요---.

아내가 수취인을 딸로하여 큰 보험을 들어놓았더라구요.

하여간 만취의 과장은 경상으로 살아났는데 정황때문에 정희에게 유리한 증언이 제대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지요.

아, 정희는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즉사---.

그래서 저 항아리에 담겨있지요.

보험사와의 분쟁 때문에 화장도 늦게 했어요.

정희는 자신의 병을 알게되자 남해 이야기, 특히 서 시인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금산 보리암 이야기도 간절하게 많이 했구요.

진여고 때 방학만 되면 서시인과 거기 화강암 바위 밑으로 자주 갔다고---.

서 시인께서는 남해를 지키려했고 자기는 결코 남해에서 살지 않겠다는 젊은 날의 꿈과 각오도 거기에서

나누었다면서요---."

 

"결국 그렇게 된 셈이잖아요."

서해심이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대꾸하였다.

"서 시인께서는 그렇게 뜻을 이루셨지만 정희는 서울가서 제 뜻을 펴고 산 것도 아니고 이렇게 죽어서

돌아왔으니---."

 "죄송하지만 이제 일어서시죠, 가시면서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셔도 되고. 조금 늦었네요---."

서울에서 온 가이드가 조용히 채근하였다.

어느새 그녀와  아까 중년 신사, 그리고 항아리에 아침부터 관심이 많았던 중년 부부들이 둘러앉아

귀를 기우리고 있었으나 두사람은 별로 개의치 않았고, 떠들지도 그렇다고 소리를 죽여 말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김범수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듣고 탄식을 하다보니 계획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으나

누구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차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시라고 해서---."

어느새 기사도 귀를 기우렸는지 다시 그렇게 말했다.

"아니,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어요. 다만 조금 혼자 생각할 시간이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김범수는 맨 뒷좌석으로 가서 혼자 눈을 감았다.

차가 출발하자 서해심 시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보리암 이야기는 가서 현장에서 설명 드리고 저는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이라는 시를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 시는 알듯 모를듯하지요.

조금 어렵다 할만한 시지요. 몇년전에 시를 쓰신 이성복 교수를 여기에서 뵈었는데 그 분도 자신의

이 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시데요.

화이부답,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할까요.

물론 현장에서 기암괴석의 화강암 모양과 또 여러가지 불교 석조물들을 보시면 시인의 시상에 그냥

함께 잠기게 되기도 합니다만---.

아, 피곤하신 분은 눈을 좀 붙이시고 저는 저기 항아리 들고 오신 손님의 사연과 제가 어떤 식으로든

깊게 엮여있어서 조금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서해심 시인은 방금 낭송한 시를 다시 음미하듯이 뜸을 들이더니 마이크를 고쳐잡았다.

"아까부터 다들 들으셔서 제 친구 이야기는 감출 것도 없네요.

하여간 제 학창의 둘도 없던 친구는 그렇게 죽어갔군요.

그런데 저는 방금 자세히 들은 제 친구 정희의 의식의 흐름을 유추하고 반추하면서 마침내 따뜻한

동정과 공감의 시선을 보내고자 합니다.

정희나 저나 참 가난하고 어렵고 외로운 청춘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그러나 일찍부터 남해 사나이 하나

붙들고 또 이 남해의 풍광이 주는 넓은 가슴에 묻혀서 생래의 외로움을 극복하며 살아왔지요.

제 필명이 감히 해심, 바다의 마음이잖아요.

저보다 욕심이 많은 정희는 그러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그런 넓은 가슴, 아늑한 품을 찾지못한듯

합니다. 저기 항아리 손님이 계시지만 두 분은 이 땅의 노동 문제에 온 몸을 던지고 민주 투쟁을 하면서

자신들의 거칠어진 서정은 묵과하고 놓쳤어요.

조실부모한 정희의 외로움은 민주투사를 자칭한 두분의 투쟁사 속에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대 담론으로

환치되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거칠어진 심성은 어딘가에 잠복되어 치유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문자를 좀 쓴다고 욕하지는 마세요.

아무튼 제 친구 정희는 상처한 과장을 만나고 부터 그의 한없는 호의 속에 깊이 침잠되면서 일찌기 겪지

못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군요. 그런데 그 뜨거운 사랑이 얼마인가 진행되었을 때 정희는 더

거대한 유혹에 부닥칩니다.

정희는 그걸 유혹이라고 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또하나의 손길로 보았을 것입니다.

무지개의 빛갈이 하나가 아니라 오색 영롱하듯이 정희는 받아보지 못한 사랑의 빛갈로 그 모든 현상을

받아들였군요. 그러니까 그 오너의 손길을 향유하면서도 정희는 그 회사의 과장이나 저기 항아리 아저씨를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너의 엄명 때문에, 그 현실 때문에 그녀는 잠시 두분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아마 정희가 이혼을 해달라고

저기 저분에게 요구했을 때에도 결코 저분을 버린다는 생각은 안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어느새 마이크를 놓고 육성으로 슬픈 해설을 하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말은 정녕 죽은 친구에 대한 변호이자 레귀엠 같은 것이었다.

 

관광 버스는 금방 금산 통합 주차장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이어 작은 승합차를 타고 보리암 입구까지

올라갔다.

"저기 상주 해수욕장 쪽으로 산을 오르면 화강암 산세와 이성복 시인의 시상을 그대로 느낄수 있지만

시간이 없고 또 힘이 좀 들지요."

서해심은 금산 보리암의 유래를 승합차 안에서 설명하며 다음 기회에는 일박 여정으로 보리암을

걸어올라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들은 이내 승합차에서도 내려서 머지않은 보리암을 향하여 걸어 올라갔다.

단단하고 당당하면서도 백설기 떡처럼 부드럽게 보이는 화강암은 그들을 오래 기다렸다 맞이하는듯

원근감도 없이 그들의 앞에 문득 서있었다.

햇볕을 받아서 빛나는 화강암을 그들의 머리에 이고 올라가는 순례자의 형상을 그들이 만들었다면

그들은 참 축복받은 순례여정에 있었다.

거기 금산에 솟아있는 화강암이 이루고 있는 자연 조형의 경이적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찾기 힘든

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그 길에 오른 모든 순례자들은 놀라운 화강암의 위용에

모두 경건한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서해심 시인이 김범수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서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 항아리는 차에다 두고 오셨나요?"

"네."

"여기 어디에 뿌리실려는 생각이 아니었나요?"

"원래는 그랬지요. 그런데 서 시인의 고고한 모습에다, 또 저기 멀리서 부터 본 남해 물미해안과 금산의

범접 못할 아름다움, 또 저 대리석 보다 더 빛나고 웅혼한 화강암 형상을 보니 속세의 정희를 여기에

뿌린다는게 너무 과한 욕심같네요. 도루 갖고 올라가렵니다."

김법수의 대답이었다.

"세상에! 그러지 마세요. 죄송하지만 속세니 뭐니라고 말씀하는 분들치고 자신이 진정 속세에 있는

속인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최소한 세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억울함이라도

가득한 마음입디다. 선생님도 그렇게 속좁게 옥은 생각은 마세요.

정희는 저 항아리 속에서 이제 아무 자유의지도 없잖아요. 오로지 선생님의 마음에 달려있는 가련한 

뼈가루이잖아요.

처음 생각대로 여기에 뿌려주세요.

제가 한가지만 더 간곡하게 말씀 드릴께요.

저와 남편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요.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젊을때 연애를 하면서 아이를 몇번 지웠는데 그게 까탈을 부렸나 봐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잖아요. 아마도 그게 빌미가 되었는지 저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우리 부부는 오래동안 서로 원망이 사무쳤답니다. 서로 상대의 탓을 하였지요.

남편은 아이를 얻는다며 바람을 피고 돌아다녔고---.

제가 견딜 수 있었던건 어쩌면 유배지에 관한 시로 일관한 고두현 시인의 시를 외우면서, 또 제 자신

남해에 관한 습작 수준의 시를 지으면서 세월을 엮은 덕분인지도 모르겠군요.

하여간 그렇게 원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남편이 그 방면의 무슨 몹쓸 병에 걸리더라구요.

치료는 되었으나 그 사람 역시 아이를 생산하지는 못한다는 의사의 판정이 나오면서 우리는 다시

사이가 회복되었지요. 

우습죠, 세상사.

저도 전쟁치듯 살아 온 인생이랍니다. 

이 아름다운 남해에서 가장 끔찍하게, 정말 세속적으로 살아왔다니까요.

제가 그렇지만 않았어도 정희와 좀 더 일찍 만나서 다른건 몰라도 우애와 우정은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정희는 사고든 자살이든 그런 상태에 빠져들지 않았을지 모르며 투병 생활에서도 승리하였을지

모르지요. 죄송하지만 정희를 지금 그런 식으로 대접하진 마세요. 이제껏도 참 잘 해 오셨잖아요."

서해심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김범수에게 좁은 소견은 버리라고 간청하였다. 

 

"아니, 그래도 갖고 올라가렵니다.

오해는 마시구요. 제 마음 이제는 다 풀렸다니까요. 제가 다시 안고 올라가겠다고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솔직히 처음 이 여행을 내려올 때는 별 생각없이 그저 아내를 고향 땅에 뿌려주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출발을 했지요. 제 생각을 듣고 그 과장은 그렇다면 저 유명한 관음사찰인 보리암에 위패를

봉안하는게 좋겠다고,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더군요.

저는 그럴 것 없이 그저 남해 바다나 절간 근처에 유골이나 뿌리겠다고 말하고는 왔지요.

하지만 버스를 타고 내려와서 아내의 아름다운 고향을 보는 순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라와서 아까 드린 말씀데로 이 산천과 해안에 아내의 뼈가루를 뿌려줄 수 없다는 속 좁은

생각과 억울함 같은게 불끈했습니다.

하지만 서해심 시인께서 낭송하시는 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차분히 들으며 또 무언가 밝은 얼굴에도

애조가 있는 조용한 말씀 속에서 제가 크게 깨닫고 느끼는 바가 생겼어요."

김범수도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여기에 제가 아내의 뼈가루를 뿌리고 올라 가면 저는 아내를 영원히 내다 버리고 가는게 아닌가요.

정말 저는 다시는 아내를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소스라치게 들었어요.

우리가 사는 경인 철로변에 작은 쌈지 공원이 있지요. 거기 어디에 아내의 안식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 그럼 이 쪽에 직접 위패를 봉안할 생각은 없었나요?"

"절에 다니지도 않던 사람을 그러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또 돈도 몇백만원 든다는데 제 형편에 그럴 능력도 못되고요.

다만 그 부분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돈이 좀 있는 과장이 언젠가 내려와서 할 뜻을 비치데요.

천도의식 같은 데에 유골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겠지요.

과장이 남해에 대해서 갖는 관심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정희는 과장에게도 유년과 청춘 시절,

그러니까 남해 시절을 다 이야기 하지 않았겠어요.

서로 사랑하던  그 소중한 시간에---."

"네, 그런 생각으로 안고 올라가신다면야---. 그래도 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는군요. 죄받을

소리인지 몰라도 정희가 그 오너는 그냥 두고 갔어요---?"

"오너도 좋은 일 많이 했지요. 투병 생활을 할 때에 병원비 다 대어주었고, 사고가 난 뒤에도 더 큰

계약을 소급하여 서명 했다네요. 혜택은 모두 제 딸에게로 돌아간답니다."

 

금산은 과연 명산이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화강암의 기암괴석을 대수롭지도 않은듯 품에 안고 멀리 남해 바다를 고즈넉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

 

 



Sehnsucht nach dem Fruhling, K.596

 

저 산에 진달래꽃 빨갛게 피어나고
산 그늘 흰눈 마저 녹아 사라지면
나 살던 옛마을에 봄철이 찾아오네
아 즐겁고 기쁘다 봄 노래 부르세



피아노 협주곡 제27번 B플랫장조 K.595

3악장-Allegro candenza


피아노 협주곡..
제27번 B플랫장조 K.595 3악장 알레그로
Bb장조 6/8박자..

사랑스런 론도의 종곡으로
피아노 솔로로 시작되는 그 기본 주제는

같은해에 작곡된 가곡
봄"을 기다리며" K.596과 같은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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