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자, 공룡을 잡으러 가자

원평재 2011. 2. 11. 02:16

 

 "자, 공룡을 찾아가자" 라는 애초의 구호는

이룰수 없는 희망을 나타낸 말이었다.

 

내 연작소설의 주인공이 가상의 도시 "빈포"에서,

혹은 서울에 올라와서 벌이는 이런 저런 인간 드라머는

끝내 포착할 수 없는 희미한 궤적으로 소멸되려고 한다.

 

1억 5천만 성상, 해풍과 해류에 씼겼어도 아직 발자국은 남아있는

아니 그렇게 씻기고 절리로 잘라졌기에 발자국 흔적이라도 드러나게 된

그런 어떤 존재, 공룡의 발자취를 그려보며

이번 단편들에 일단 마침표를 찍어본다---.

 

 

 

 

 

세월이 속절없다.

빈포 초등학교 동기들도 이제 모두 늙었다.

특히 환갑 나이에 접어들자 해마다 광복절 날에 열리는 빈포 초등학교 대 운동회에도

참가 자격을 잃었다.

그 얼마전해의 대 운동회에서 노인 한분이 운동장에서 쓰러진 사건 이후에

총동문회 이사회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늙기도 설어라커든 운동장에도 외면을 당하는 꼴이었다.

이때 이후부터 졸업생들의 과반수가 회갑을 맞는 회년,

그러니까 졸업 48주년쯤 되는 해의 동기회에서는

고성의 공룡 박품관을 출발점으로 공룡 바위, 즉 상족암과 근처의 바다를 일주하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자, 고래를 잡으러 가자"라는 노래가 있었거니와

이제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자, 공룡을 잡으러 가자"였다.

빈포 초등학교에서 외면된 노인들이 인근의 공룡 흔적을 훔치러 여름 나들이를

하는 꼴이었다.

빈포도 이제는 고성시에 흡수되고 말았다.

재경 동문회를 중심으로 총 동문회의 이름으로 한동안 경남 도청에 항의를 하고

정부 당국에도 탄원을 하였지만

그대로 두면 "빈포 초등학교" 자체도 취학 아동의 감소로 문을 닫아야하는 것은 물론

지역 경제 자체가 소멸된다는 지역 주민들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고성시 빈포동으로 자족하고 말아버린 짧은 최근세사도 탄생하였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고향 땅이 위축되면서 자신들의 몸과 처지도 쇠퇴해 가는

현실에서 1억 5000만년 전에 사라진 공룡의 발자국을 찾아나선

동기들의 심회가 그리 편안하지는 않았다.

마침 아직도 빈포에 남아서 작은 양조장을 하는 동건이라는 동기가

플라스틱에 담은 생막걸리를 잔뜩싣고 와서 풀어놓자

남녀 가릴것 없이 아침부터 한두잔씩 퍼마시더니 초장에 벌써 분위기는

누룩에 뜬건가, 하늘 높이 떠버렸다.

 

"동건아, 너 이 막걸리 도수가 쎄다. 이실직고 해봐!"

박 교수가 양조장 주인을 문초하였다.

"헤헤헤, 돈벌이하는 막걸리는 술지게미 걷어내고 주정에 물을 많이 타는데

내가 동기생들에게 물 먹일 수는 없잖아, 헤헤헤."

그가 얄팍하게 웃었다.

"에이, 순! 저 여자 동기들 다 뻗겠다."

마침 그때 서울 회장을 맡은 교회 장노 직분의 친구가 때릴듯한 시늉을 하였다.

"헤헤헤, 때는 이때다. 저 서울가서 콧대 높아진 예편네들 허리에

손 한번 넣어보는거지 뭐. 니들이 안하면 내가 할끼다.

요새 회갑먹은 여자들도 아직 다 여자다. 헤헤헤."

그가 정말 손인지 팔인지를 넣어보겠다는 요량으로 팔뚝을 둥둥 걷다가

놀란 표정으로 말소리를 낮추었다.

"어이, 너들아, 저기 정자하고 복자가 보이지? 손자 하나씩 데리고

나타났는데 그게 꼭 쌍둥이같잖아.

둘다 이 동네에서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난 아이들인데 내가 보니 서울에서

사법고시 파스하고는 일찍 세상을 하직한 우리 동기 곽 변호사를 꼭 뺐어.

생전에 무슨 일이 저 정자하고 복자에게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곽 변호사가 정자하고 결혼 말이 있다가 또 복자하고도 친하다는 말이 돌더니

갑자기 죽었는데 어떻게 된게 손자 대에 저렇게 남의 두 집에서 부활해 버렸네."

"쉿, 남의 말이라고 그렇게 쉽게 하지 말아라. 우리 때 여자들이 그렇게 쉽게 몸을

굴리지 않는다. 쌍둥이라니 어디가 그렇게 닮았노?"

어느틈에 서울에서 내려간 종말이가 끼어들었다.

그녀도 주름진 얼굴이 생막걸리에 곱게 익었다.

"야, 시침떼지 말아, 니가 여기 법무사 동기하고 바람 피우다가

부산까지 가서 얼라를 두번 씩이나 지운거 소문 다 났다.

지나간 이야기라서 말이지만 서울은 몰라도 여기는 다 안다."

"이 우라질 생막걸리 사장아. 생사람 잡지마라."

그녀가 종주먹을 쥐는데 빈포 종가 회장이 마침 끼어들었다.

"저 노랑머리 여자가 창식이 마누라 쏘련 여자가?"

그도 서울 소식에 들은 풍월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쏘련 여자가 어디있노. 러시아 여자지. 우리가 소래포구가서 도루 잡아다 줬지.

알고보니 바람이 난게 옥사나, 저 러시아 여자가 아니라 창식이 그놈이고

시베리아에 있는 저 여자 부모가 모두 아파서 돈을 벌러 나갔나봐.

그러니 노랑머리 춤추는 유흥업소 같은데 나간게 아니라 글쎄 횟집에

취직을 했더라고."

영옥이의 말이었다.

"헤헤헤, 저 노랑머리가 시베리아 대학을 나왔다면서?

창식이 그놈이 부실한데 백마도 타고 출세했네."

동건이가 나섰다.

"이 우라질 놈은 아직도 맨날 그 타령이네. 그리고 시베리아 대학이 아니고

하바로프스크 대학이다. 내가 나중에 알아보니 참 효녀이고 착한 여자더라.

창식이 아이도 둘이나 낳아서 교육도 잘 시키고."

영옥이의 설명이었다.

"그럼 창식이 아이가 노랑머리 반종이네?"

"동건이 이 촌놈아. 요새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더 뜨는거 모르는구나?"

영옥이 그의 허리를 쥐어박았다. 

"아이구 허리야. 그런데 저기 젊은 여자가 청년을 데리고 나타났는데

풍 맞았다가 죽은 김완기의 내연의 여자와 그 아들인 모양이네.

복도 많지, 완기 꼭 빼 닮았다. 헤헤헤."

"완기 여자란 말은 맞지만 아들이 꼭 빼닮았다는건 엉터리 소리구나.

저 청년은 저 젊은 여자의 죽은 남편 아들인데 하긴 완기가 다 키워주었으니

네 말도 맞네. 참 효자인가 보더라."

종말이의 말이었다.  

"요즘은 아이를 낳아주는 것 만으로도 집안에 효부이고 나라에 애국자라고 나는

생각해. 미국간 정옥이도 미국 국회에서 탈북자 남편하고 청문회에도 나갔고

프리덤 파이터라는 칭호도 받았다는거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도 그 탈북자

남편하고 사이에 다시 아들 딸을 낳아서 잘 키우고 있다네.

내 생각에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를 갖는 일, 그게 아니면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매달 조금씩이라도 기금을 보내주는 일, 이런 일들이

모두 사람답게 사는 행동이 아닌가 싶네."

박 교수가 격앙된 분위기도 누그릴 겸, 가슴 속의 말을 해냈다.

"그런데 정옥이하고 사이에 아이까지 가졌던 그 건강 이발관 관장은 안왔네?"

종가집 동기가 물었다.

"그 친구가 엄살이 심하잖아. 하여간 몸이 안좋다네. 만년 청춘같던 녀석도

나이에는 못당하는지. 그래도 여기 올만은 한데 워낙 몸 보신이 쎄고 이기적이잖아."

서울 동기회장의 말이었다.

"그래도  매달 프리덤 파이터 기금도 부쳐주고 말없이 좋은 일을 많이 한다네.

우리 1억 5천만년 전의 공룡의 발자국에서 전체 기념 사진이나 한장 박지.

너들아, 모두 모여라."

박 교수가 외쳤다.

 

<끝> 

 

 

 

공룡박물관의 조형미와 상징성

 

  

 

상족암, 공룡 발자국

 

 

 

배가 뭍으로 올라오면 화석화된 공룡의 운명에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접한 곳에 충무공이 문득 나타나셨다.

안타깝게도 장검으로 파리를 쫓고 계셨다.

공룡지에서 만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여기 보이는 전경을 상족암이라고 한다.

크기 80센티미터의 공룡 발자국이 찍혀있는 곳이다.

  

 

고성 건어물은 한 이름값을 한다.

청정해역에서 건진 해산물이라는 브랜드 네임을 어제 오늘 얻은게 아니다.

 

 

상족암에서 바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상족암은 1억 5천만년 전에 공룡들이 번성했던 곳이다.

 

 사랑동굴이 보인다.

하트 모양이다.

  폭풍우가 몰아쳤던 옛날 옛적에 저 굴 속으로부터 부서진 흰 배의 조각들이

바다 속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사실은 부서진 배조각이 아니라 공룡의 뼈조각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왼쪽 해골바위와 오른쪽 백두바위 사이에 등대가 있다.

 

  

 

 

 

 

 고래는 사라지고 고래 바위만 남았다.

 

 

  

선착장 입구에서 문득 폐선이 눈에 띈다.

낡은 선박의 선주는 용도 폐기를 가능한한 늦추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해체하여 일부 재생과 나머지 적멸의 단계로 폐선을 처분할 것이다.

 

늙은 사람과 낡은 선박의 잔영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고물로서의 속성은 비슷할지라도 

파고다 공원과 종묘 공원의 노인이나 이곳 사량도의 노인 모두에게는

존엄한 만년이 기약되어야 한다.

실존주의자의 부르짖음이 아닐지라도

인간은 나무나 풀처럼 그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실존"하기 때문이며

실존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룡은 왜, 언제,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니, 그들의 전성기에도

늙은 공룡들은 어떻게 존엄한 만년을 맞았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미로를 어슬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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