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학 산책

헤밍웨이 평전

원평재 2011. 2. 18. 02:51

헤밍웨이를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가족관계, 특히 부부간의 이해성과 여기에서 발생하는 가정의
정서적 분위기가 성장기의 소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헤밍웨이의 경우, 외과 의사인 아버지와 교회합창단의 지휘자이자
음악학원을 운영하였던 어머니는 외견상으로는 어떤 부모보다도 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전문직인 의사생활 이외에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영위한 여가생활은
주로 사냥과 낚시였다.
사냥을 위한 도구는 물론 엽총이었고 낚시도 동양적인 강태공 방식이
아니라 힘차게 흐르는 여울에서의 견지낙시, 넓은 호수에서의 릴
낙시, 그리고 바다낙시 같은 역동적이고도 야성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여기에는 야외 생활도 필수였다.

교회 성가 지도자인 어머니의 일상이나 인생관은 이와는 정 반대
였으며 속으로는 은근히 남편을 경멸하였다.
부부 사이가 원만치 못한 것은 필연이었다. 남편에 대한 폄하와
몰이해는 가끔 헤밍웨이의 단편에서도 투영되는데,
예를 들자면 새로 집을 지어서 이사를 간 어떤 가정에서 그 부인이
남편의 오랜 사냥 전리품, 사냥 도구들, 오래 수집해온 야외 생활의
기념품들, 인디언의 유품들을 이사 당일날 모조리 태워버리는 장면
같은 것이다.

실제로 헤밍웨이의 어머니는 음악학원 경영으로 돈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새 집을 지어서 이사를 했고 낚시와 사냥의 도구들과
샤냥물, 그리고 인디언의 화살촉이나 기념물들을 태워버리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서 가정 불화가 심화되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수입도 괜찮았으나 플로리다에 개발
붐이 불던 당시에 부동산 투기를 하다가 자기 재산을 다 날려버렸다.
두사람 사이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마침내 아버지는 자살을
하였다.

이 자살의 직접적 원인을 헤밍웨이는 항상 어머니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엄격히 따지고 보면 헤밍웨이의 집안에는 자살의 내력이
있다.
가계를 따벼보면 헤밍웨이의 할아버지도 자살을 했다고 하며 마침내
헤밍웨이도 자살을 하고 그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도 후일 자살을
했다.

마고는 전도가 꽤 유망하였고 소위 한참 "뜨는" 여배우였는데,
매스컴에 등장할 때마다 너무 심하게 벗는다고 느껴지더니 어느날
목숨을 끊고 말았다.

아버지 쪽의 생활방식을 더 흠모해온 헤밍웨이였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동서고금의 고전 문학 작품을 섭렵하였는데
크게 영향받은 작가로는 뚜르게네프, 마크 트웨인, 그리고 셔우드
앤더슨 등이있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냥과 낚시에 심취했고 이러한
야외생활의 체험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묻어난다.

십대 초반에 그는 동정을 자기보다 연상의 "트루디"라고 하는 인디언
처녀에게 바친다.
트루디는 소위 "밝히는" 계집아이였는데 이러한 투의 작가의 표현과
생각은 오늘날 페미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그가 형편없는 가부장적인
작가라고 비난 받는 요소가 된다.

물론 그보다 더한 이유는 "무기여 잘있거라"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영웅적인 남성으로부터의 보호와 피난처를 至高의
가치로 여기는 여자 주인공들을 만들어낸데에 연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저 날카로운 페미니스트들의 각을 세운 발톱을 어떤
남자가 견뎌낼 수 있으랴.

헤밍웨이는 대학엘 가지않았다.
바로 지방 신문사의 기자로 입사한 헤밍웨이는 그곳에서 기자 수업의
첫걸음인 문장 수업을 받는데 "짧게 쓰라", "쓸데없는 수식어는 생략
하라"라는등 저널리즘 수업에 열중한다.
결국 이 작문 스타일은 20세기, 그리고 나아가서 오늘날의 인터넷
문화에 딱들어맞는 문체와의 운명적 조우라고 할 수있다.

사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문체가 뭔가?
온갖 변설과 미사여구, 그리고 군더더기, 혹은 그 군더더기를
떼어야한다고 협박을 하면서 그 당위성을 주장하는 더 많은
군더더기---.

헤밍웨이의 첫번째 아내는 친구의 여동생이자
작은 고향 마을의 知己 같은 사이였다.
"오빠야, 동생아"하는---.

그들은 진지하고 열심히 살았다.
맑은 모습의 첫부인은 우리 식으로 보면 또순이 시골처녀였다.

헤밍웨이가 빠리로 특파원이 되어서 파견되었을 때,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삶의 첫발을 내디뎠었던 이들 부부가 받은 감회나
감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우리나라의 지방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가 뉴욕 특파원이 되었을
때의 기쁨이 이에 비견될까---.

빠리 생활은 도전과 시련이자 기회와 성취의 바탕이었다.
그의 특파원 기사는 인정을 받았고 몽빠르나스나 몽마르트르의
문인, 예술가들의 세계는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한껏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예술적 충동을 뒤흔들어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예컨데 그가 살던 싸구려 다락방만해도 뽈 세잔느가 살았던 곳이
아닌가---!

그는 기사와 장단편 습작 소설을 쓰고 또 썼다.

어느날 그는 조강지처에게 그가 쓴 단편과 시 몇점 그리고 장편
한편을 갖고 빠리의 리용 역으로 갖고 오라고 햇다.
아무래도 시골 아낙인 헤밍웨이 부인은 번잡한 리용 역에서 조금
혼미스러워졌나보다.
원고가 든 가방을 빈 벤치에 두고 자리를 뜬 사이에 이 귀중한
자료를 도둑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문화계의 멋진 여류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던
헤밍웨이는 이런저런 사고와 사정들이 겹치면서 그녀로 부터
마음이 떠나버렸다.

조강지처와 이혼을 한 헤밍웨이는 이후 세사람의 아내를 더 맞게
되는데,
그러나 몸이 불편하였을 때에 기자 출신의 발랄한 아내로부터
받은 냉대를 포함하여 조강지처 보다 더 나은 여자를 찾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얻은 "메리 웰쉬"와는 만년의 의지처가 되어서 병고와
싸울 때에도 극진한 간호를 받는등 잘 지냈다.

헤밍웨이가 만년에 자살을 자주 생각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난무하지만 집안의 내력과 함께 현대인이면
모두가 앓고있는 가치의 무가치화 상태에서 오는 허무감,
그리고 과도한 음주와 사냥여행 등에서 얻은 심한 부상등이 복합적인
원인이 아닌가 한다.

그가 용감하게 보인 것은 희대의 쇼이며 위험한 사파리 여행,
과도한 여성 편력 등도 모두 자신의 비겁함을 호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말도 그는 죽은지 여러해가 되어서 듣게 되었다.
사람의 뒤에서 무슨 말인들 못하랴.
더구나 이 세상 사람도 아닌데---.

우리 모두는 따지고 보면 모두 용맹과 비겁을 섞어서 가진 존재가
아닐까---.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적어도 위선의 탈만은
벗는 길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 속성 때문에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주저할
때에 두려움을 지긋이 누르며 용감한척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두려워 떠는 타인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지않을까.

헤밍웨이가 자살을 한 것은 역설적일는지 모르지만 용맹무쌍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추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이 위대한 작가가 가장 두려워한(!) 모습이었다.

영혼과 육체의 떨림 현상,
젊은날의 떨림은 생명이 담긴 전율이었으나 늙어서 떨리는 것은
경련과 발작과 통제불능의 신호에 다름아니다.
남에게 이런 상태를 보여주는 것 보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삶
이라는 난파선을 내항으로 끌고들어와서 폐선처분을 받는 대신에
원해에서 침몰시켜버린 것이 아닐까---.

물론 자살을 예찬하는 담론을 여기에 펴자는 것은 아니지만---.

글을 써 내려오며 自省이 따른다.
내가 무슨 헤밍웨이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논문을 쓴답시고 헤밍웨이의 족적을 찾아헤맨적은 있다.
헤밍웨이가 머물엇던 북 미시간의 월룬 레이크도 답사하였고 인디언
마을도 찾았다.
미시간 호반의 페토우스키라는 마을에서는 유명한 페토우스키
화석도 수집하였고 멀리 투우의 마을 스페인도 찾아가 보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이곳 저곳은 기본적이었다.
다만 쿠바만은 아직 기회가 닿지 않아서 그가 기거하였던 하바나의
저택, "핑카 비기아"(전망 좋은 집이라는 뜻)는 가보지 못하였다.

국내에서는 헤밍웨이 학회를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회장직도 맡은 바
있었으며 지금은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헤밍웨이 관련 저서와 역서를 정리하여 보니, "Ernest Hemingway
작품연구"(형설 출판사), "무기여 잘있거라"(시사 영어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시사 영어사), "헤밍웨이 미공개 단편선"(시사
영어사), "어네스트 헤밍웨이/생애와 작품세계"(건국대출판부),
"허무를 극복한 비극적 인간상/헤밍웨이"(건국대 출판부) 등이 그간
쌓인 책자이고 관련 논문도 열손가락을 훨씬 넘었다.

가장 최근에 쓴 책의 머릿말을 조금 옮겨본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서 한해가 모자라는 1999년의 7월 21일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이를
기념하여 그의 모국인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학술 발표
대회와 축제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헤밍웨이 학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 대 문호의
탄생일에 "기념학술대회"를 개최하고 헤밍웨이의 전기도 영상으로
감상하였으며, 문학에 관한 지론을 담고 있는 그의 육성도 청취하였다.
소위 헤밍웨이 열기(Hemingwayian Fever)는 그의 탄생 한 세기 후,
그리고 1961년 7월 2일 아이다호 주의 케첨에서 자살로 그가 일생을
마감한 지 한 세대 후에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물론 이제 세월이 지나면서 비평가들 중에는 한때 세계문학사적인
규모로 달아올랐던 헤밍웨이 열기를 미국의 국력팽창과 연계하여 생각
하면서 평가절하를 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 그의 허무주의와 염전
사상도 낭만적 전송가에 불과하다는 시각까지 있다.

더욱이 페미니즘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여성관은 가부장적인 보수
주의에 불과하여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혹평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의 미공개 유고작에 대한 발굴작업은 계속
되고 있고 비록 횟수는 줄어들었으나 "헤밍웨이 저널"의 지속적
발간과 함께 국제학회도 꾸준히 개최되는 것을 보면 그의 목소리는
어느 한 세대의 고통만을 반영한 절규에 불과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영원한 문학의 주제에 통달하고 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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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학문 밖의 외도로 경황이 없는 중에도
고향 영감들의 후의와 닥달로 헤밍웨이를 언급하고 보니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요즈음 저는 헤밍웨이를 떠나서 맬라무드와 솔 벨로우 등을 섭렵
하다가 미국 소수인종 문학도 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한국계 작가도 물론 포함이 되지요.
우리나라의 미국 이민사가 마침내 하와이로 보면 금년, 본토로 보면
내년이 100년사를 획하게 됩니다.
뉴욕과 LA에서는 벌써 많은 행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문학 부분도 빠질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도 헤밍웨이가 생을 마감한 60세라는 나이의 시점에
진입하였습니다.
물론 이 대 문호와 우리는 나라와 형편과 가치관도 다르고 또 시대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을 맞이하며 인생을 깊이 통찰해 보는 의미에서는 인생의
대부분을 적어도 겉으로는 불덩어리같은 에너지 그 자체로 지내다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거인의 족적을 음미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