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세인트 루시아와 바나나 이야기

원평재 2013. 1. 12. 21:05

 

 

 

 

세인트 루시아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 선을 내려서 맨 처음 찾은 곳은 수도 캐트리스 시내의

"성모 무염시태 성당"이었다.

규모는 적지않았으나 내실은 벅찬듯, 중건을 위한 기도 중에 있었다.

세인트 루시아는 아래 역사에도 조금 언급하였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교차 지배, 노예 무역의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길거리에서는 "크레올 어"가 상용되고 있었다.

나라의 이름도 "산타 루시아"가 아니라 "세인트 루시아", 영어 공용어로는 "세인 루셔"가 보다

공식적인 발음이었다.

 

 

 

기독교 교회에서 관광이 시작된 김에 이곳의 종교 현황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95.08%, 종족 종교 1.80%, 무종교 1.10%, 힌두교 0.97%, 이슬람교 0.50%, 기타 0.35%, 바하이교 0.20%.
다시 기독교는 개신교 20.85%, 독립교회 2.07%, 성공회 1.87%, 가톨릭 55.77%, 유사기독교 18.90%, 미등록 18.90%,

이중으로 등록된 집계 -5.97% 등이다.

합심하여 세인트루이스를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영적 생활을 침식시키는 물질주의가 늘고, 이 섬의 어린이 86%가 사생아이며,

여성이 가장인 가정이 45%에 달하고 있는데, 교회가 진정 부흥하고 사회가 영적 및 도덕적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크리올 프랑스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이 문맹 퇴치 프로젝트에 이용되고 있는데,

크리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세인트루시아인과 도미니카인들이 날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고 삶에 적용해서 아버지의 말씀에 익숙해지게 이끄소서.

 

 

교회 바로 옆의 데릭 월컷 광장

데릭 앨턴 월컷(Derek Alton Walcott, 1930년 1월 23일 ~)은 세인트루시아 수도,

캐스트리스 출신의 시인, 극작가,

199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의 작업은 식민지 시절의 노예 제도부터 독립까지 카리브 해의 경험,

색다른 문화와 전통의 혼합이 담긴 카리브 해의 식민적 지위의 자연을 탐구하였다.

 

 

세인트 루시아 Saint Lucia

 

카리브해 제일의 휴양지인 세인트 루시아 (Saint Lucia)

1502년 콜럼버스가 발견하였으며

그후 1605년과 1638년 영국인에 의한 이민이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어 프랑스인에 의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1814년 파리조약의 체결에 의해 영국령으로 결정되어 영국이 직접 통치하였다.

영국 통치가 시작되고 150년 후인 1967년 3월 세인트루시아는

영국으로부터 외교와 방위의 일부를 제외한 내정자치권을 획득,

영국령 서인도 연합주의 한 주(州)가 되었다.

그후 1978년 12월 영국의회가 그 독립을 승인하여

이듬해 2월 (22일) 영국연방의 일원으로 정식 독립하였다.

 

면적 617㎢ 인구 165,000명 (2003 추계)

수도 캐스트리스 (Castries) : 15,000 1인당소득 : $4,000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공식 언어 : 영어(프랑스, 크리올 어)
독립년월일 : 1979. 2. 22
화폐단위 : 동 카리브달러(Eastern Caribbean Dollar/EC$)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 기간이 중복된 관계로 이곳은 크리올 어를

광범위하게 쓰되 영어의 영향이 큰 크리올 어이다.

크리올 어는 보통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방언이 많은데 여기는 좀 다른 것 같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루시아

 

 

사람이 무척 좋은 운전기사와 한 컷 하였다.

우리가 타고 온 크루즈 선이 멀리 보인다.

 

TV에 따르면 우리가 다녀간 며칠 후

이 배보다 두배가 큰 퀸 엘리자베스 2호가 여기에 들어왔는데

설사 병에 20여명이나 전염이 되어서 난리가 난 모양이다.

 

 

 

Croix는 십자(Cross)를 뜻하여서 남북미 대륙에 고유명사로 많이 쓰인다.

영어로 굳은 경우 "크로이"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프랑스 식으로 "크르와"라고 하였다.

크레올 어도 잘쓰는 운전기사의 발음이었다.

 

 

 

 

 

바나나는 높이가 3m에서 크게는 10m까지 되는 나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년생 풀", 바나나 풀에서 열린다.

바나나 농장에서는 바나나를 수확하자마자 베어버린다.

바나나가 한번 열린 줄기에는 다시 바나나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번식은 뿌리로 부터 싹이 올라오기 때무에 일종의 무성생식이라고 한다.

결국 식용 바나나는 모두 한 종류 '캐번디시(Cavendish)'이고

나머지는 야생 바나나인 셈이다.

 

 

운전기사는 자랑스럽게 조국의 바나나 산업을 설명하였지만

나는 바나나 농장에 얽힌 백인들의 가혹한 수탈 경제를 생각하게 된다.

하와이 슈거케인 농장과 우리 이민사도 곁들여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도 바나나이다.

이야기는 농장 파업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배경이 된 사건이란 1929년에 일어난 콜롬비아 바나나 대학살이었다.

해리 벨라폰테의 칼립소, "바나나 보트 송"의 애조에서도 이런 기저가 묻어난다.

 

패션 브랜드, <바나나 리퍼블릭>도 이런 정서와 사건(바나나 기업 치키타의 사장,

엘리 블랙의 자살 사건)에서 생긴 패러디 정서가 세월과 함께 이제는 긍정적 진화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곳도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몇가지 종류의 깃발들은 얼마전에 있었던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정당 표시라고 한다.

우리도 예전에 막대기 기호로 기표하던 생각이 난다.

 

 

수공예 기념품 점이 길거리에 열악하게 늘어서 있었다.

 

수도인 캐나리스는 크레올 어로 카나와라는 등의 설명이 카페에 붙어있다.

 

드디어 이곳의 자랑 "쌍둥이 피톤"(등산용 하켄, 대못) 쌍봉 앞에 섰다.

유명한 호텔, 블루 제이드가 거기 있다는데 인증샷 박기에는 시간이 되지 않았다.

 

 

 

 

대나무 숲이 있어서 함께 넣어보았다.

도로 공사가 있어서 꼼짝없이 기다렸다.

유황 온천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도저히 몸을 담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적당히 뜨거운 물의 온도만 측정하고 인증샷 했다.

 

세인 루시아가 주는 선물, 자연 경관

돌아오다 보니 공사가 다 끝났다.

 

 

개스 스테이션에는 두 종류만 있었다.

이곳의 자랑인 폭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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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함께 벗고 들어가서 주먹을 흔들었다

코코넛 재배 협회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어쩌면 이곳 바나나 농장 수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조직은 아닌지~~~

 

 

 

 

 

 

 

 

여기에서도 역시 피항지로 들어오니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좀이 쑤셔서 일단 크로즈 선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다시 나와서 근처를 조금 헤매었다.

 

 

 

 

 

배의 갑판에서부터 내내 궁금했던 건물을 가까이 가서 보았다.

과연!

루브르의 피라미드 처럼 세워진 건물은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이었다.

프랑스는 자국의 문화와 언어를 선양하기 위하여 알리앙스 프랑세즈를 여러나라에

설치하고 있지않던가 (서울에도 물론 있듯이!).

 

 

배로 다시 들어와 보니 황혼 속에서도 그랜드 마의 열기는 충천!

좌삼삼~, 아니 좌사사 우사사!(비트 박자에 맞추어)

 

 

 

 

출항을 앞두고 공연히 센치멘탈해지는 모습들을

잡아본다.

모두들 뱃전으로 몰렸다. 마치 헤어지는 사람이라도

있다는듯이...


 

아듀! 알리앙스 프랑세즈!

농농, 오 르봐르!!

다시 만날 때까지!!!

 

 

황혼, 남은 잔영에 몸을 계속 굽는 사람도 있지만~~~

 

노년을 즐기는 모습에 거침이 없다~

세인트 루시아에 작별을 고하는 사람과 벤치들~


입국 때와 마찬가지로 뱃전으로 다가온 해양 담당국의 보트에 출항 통지서를 제출하고 항구를 떠난다.

 

Day-O (Banana Boat Song)

Harry Belafonte

 

추억의 헤리 벨라폰데

노래만 잘 불러서가 아니라 소수 민족의 권익 신장에 대한

평생을 통한 노력으로 인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지금도 노익장!

미국 주류사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Harry Belafo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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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바나나는 기원전 5,000년 전부터 말레이 반도 부근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을 만큼 그 역사가 길다.

이후 원주민의 교류에 의해 각지로 전파되면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백 종의 바나나가 자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용하는 바나나는 단 1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야생 바나나들이다.

야생 바나나는 열매 속에 크고 딱딱한 씨를 가득 품고 있어 먹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처음 재배할 당시에는 바나나는 열매가 아닌 뿌리를 캐 먹기 위해 경작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씨 없는 돌연변이가 나타나면서 오늘날의 바나나가 정착된 것이다.

그렇다면 씨가 없는 바나나는 어떻게 번식을 할까?

열매를 수확한 후 밑동을 잘라내면 6개월후 땅속줄기에서 새로운 어린줄기가 자라게 된다.

뿌리를 잘라 옮겨심기만 해도 바나나가 열리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동일한 바나나만 얻게 된다.

씨 없는 바나나의 경작으로 인간들은 바나나를 먹기 쉬워졌는지 몰라도,

바나나 입장에서는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져 그만큼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병충해가 휩쓸 경우 전멸당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캐번디시(Cavendish)'라는 한 품종인데,

처음부터 이 품종이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는 '그로 미셸(Gros Michel)'이라는 품종이 주를 이뤘다.

이 품종은 맛과 향이 진하고 껍질이 두꺼워 장거리 운송이 가능한 점 덕분에 상품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파나마병이 유행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하지만 인류는 바나나를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1960년대 중반, 파나마병에 잘 견디는

'캐번디시' 품종을 간신히 찾아냈다. 그로 미셸보다 크기가 작고 맛과 향도 떨어졌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후 그로 미셸 품종은 사라지고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캐번디시 품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