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기행 콩트 샤코탄 블루의 언약

원평재 2018. 9. 27. 23:01







기행 콩트 샤코탄 블루의 언약

                                                             

“홋카이도 관광일정의 70프로가 비에 젖네, 젠장.

상고를 나와서 평생을 은행에서 지내고 은퇴한 그의 탄식은 역시 은행원다웠다. 은퇴여행이라기

보다 이혼여행, 잘해보아야 졸혼여행 쯤으로 그는 여기고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호텔 방에서

태블릿 PC를 두드리며 주식시황을 분석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아내도 역시 여상 출신으로 둘은 은행에서 만나서 사내 커플로 평생을 살아왔고 이제는

고명딸도 막 시집을 갔으니 마침내 헤어질 채비를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해서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으나 야간 대학과 방송통신대학으로 그 과정을 마치며 은행원으로는

최선을 다해온 인생이었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는 애초에 문과 방면에 취향이

있어서 야간 대학도 국문과를 마치고 어줍잖은 문예지를 통하여 등단한 아마추어 시인이 되었다.

반면에 아내는 방송통신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본부 유가증권분석부에서 주로 근무했으며

은퇴 후에도 데일리 트레이딩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북해도 관광 사흘째 날 낮에 그들은 샤코탄 반도를 보고 저녁에는 삿포로 시내의 호텔로 돌아와서

다음날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오는 날부터 비가 내리더니 다만 이날 오전에는 참으로 다행하게도

햇볕이 나와서 저 샤코탄 앞 바다의 코발트색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 샤코탄 블루~!

그가 외쳤으나 아내는 주식시황의 마이너스 표시인 파란색이 연상된다며 재수 없는 색깔이라고

일축해버렸다. 아무래도 오늘의 주식시장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샤코탄 반도에서도 코발트

블루 색깔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카무이 미사키(カムイ), 즉 카무이 곶 지역이며 카무이는

북해도 선주민인 아이누 족의 말로는 신이라는 가이드의 설명도 아내는 관심이 없는듯하였다.

“저기 빨간 파라솔들도 많이 보이네. 상승세인 빨간 숫자 주식 색깔 말이야. 하하하.

그가 싱거운 아재 개그를 날리다 말고 움찔하였다. 한국 단체 관광단이 쏟아져 들어와 있는

그곳에서 아마도 어떤 단체는 빨간 파라솔을 선물로 준 모양 같았는데 그중의 하나에 시인

김여사가 언뜻 보이는듯 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샤코탄 블루라는 매혹적인 말도 그 김여사가

시 낭송회에서 입에 달고있다시피 하여서 그도 알게 된 셈이었다.

“언제 북해도 한번 같이 갑시다.

혼자 산다는 활달한 시인 김여사에게 그가 주눅 들린 듯 농담 비슷하게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좋아요. 언약 지키세요. 저도 선생님 좋아해요. 그런데 여행비는 책임지셔요. 호호호.

그는 노출되어있는 자신의 용돈을 정말로 계산해 보았었다. 어림없었다. 그때부터 그가 짜증 섞어

홋카이도 여행을 입에 담고 지내자 평생의 부부싸움이 다시 벌어졌고 이어서 어쩌다보니 부부가

함께 그곳으로 여행을 가는 우스운 상황으로 진도가 나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졸혼, 혹은 이혼

여행이라고 명명했으나 사실 그 추이는 매우 불확실하였다. 그 전날 본 노보리베츠, 즉 지옥계곡의

회색 연기만 그냥 두 사람 사이에 자욱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반짝 개인  샤코탄 블루 역시

주식시황의 마이너스 색깔과 맞물려서 타락 일기가 되고 말았다. 이제 내일 치도세 공항으로

가기 위하여 삿포로 시내로 들어오는데 화창했던 그 반짝 날씨는 또 비요일이 되고 말았다.

삿포로 역이라는 빨간색 LED 표지판도 주룩주룩 내리는 밤비에 명멸하는 일 자체가 꽤

성가시다는 표정 같았다. 밤이 깊었다. 그는 역사 안에 있는 선술집, 다찌노미(たちのみ)에서

홀로 삿포로 청주 작은 병 하나를 다 비우고 입가심으로 다시 생맥주 두 조끼를 벌컥벌컥

마신 뒤끝이었다. 삿포로 생맥주 현지 한정판매라는 글귀에 매료되었지만 맛은 국내에서

만원에 네 캔을 주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만사 기분이지 뭐. 그런데 아까 힐끗 본 그 붉은색 파라솔 속의 여인은 김 여사와 너무

닮았어---.

그는 술이 취한 속에서도 아까 장면을 그려내 보며 중얼거렸다.

“샤코탄 블루가 김 여사 말대로 죽이네요.

낮에 그런 카톡을 보냈는데도 답이 없는 것이 더욱 수상하였다. 북해도로 한국관광객이 몰린다는

일간지 기사도 생각이 났다. 따지고 보면 김 여사가 따로 이곳에 여행을 왔다손 치더라도 하등

이상하거나 시비를 걸 일은 아니었다. 그녀로 인하여 그가 졸혼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북해도 여행을 하자고 그가 언약을 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그 말끝에 김 여사도 그를

좋아한다고 하였지 않았던가.  정말 언약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보니까 아까 낮에 샤코탄

반도에서 가이드가 한 전설 이야기가 떠올랐다.

“카마쿠라(鎌倉)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배다른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 義経)는 헌신적으로 형을 도왔으나 주위의 모함으로 자결을 강요받는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지 않고 이곳 북해도로 도망 와서 현지 아이누 족장의 딸 ‘차렌가’와

사랑을 하고 백년해로하겠다고 언약을 한다. 그러나 추격대에 몰려 이곳 카무이 미사키까지

쫓기다가 마침내 북방의 바닷길로 다시 도망을 치는데 이를 알지 못한 차렌가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수중고혼이 되고 만다. 이후 이곳 앞바다를 지나는 배에 여자를 태우면 대부분 침몰

하거나 좌초하게 되어 금녀의 땅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게 모두 언약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그도 어려웠던 시절에 아내와 잘 살아보자는 일념과 언약으로 결합을 하였다.

사랑한다는 언약도 수없이 하였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며 서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보니 서로가 추구하는 이상은 판연히 달랐다. 마치 일본인과 아이누 족과의 차이만큼이나---.

아이누 족은 에스키모 족과 북유럽계의 혼혈에서 파생된 종족 같다고 한다. 푸른 눈과 몸의

털이 그 반증이라든가---.

그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받으며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꽈르릉하며 번개와 천둥이 동시에 터졌다. 돌풍도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하면서 우산이 확

재껴졌다. 그때 조금 앞에서 걸어가던 어떤 두 사람의 빨간 우산도 홱 날아가며 김 여사와

안면이 약간 있는 초로의 남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들도 그를 의식하였는지 못하였는지 날아가는 우산은 내팽개치고 거기 어디 가까운 호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도 날아간 우산을 챙길 생각은 버리고 비를 맞으며 술 취한 걸음걸이를 재촉하였다.

아무래도 주식분석을 하고 있는 아내의 방으로 돌아가서 당분간 졸혼같은 것은 잊고 언약의

의미를 반추해야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