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계간문예 짧은 소설/날마다 눈에 샘물

원평재 2020. 4. 16. 17:23











날마다 눈에 샘물

                               김 유 조                       

  

"평면 예술" 전공 교수인 아내는 방학이 되자마자

프랑스로 세미나인지 뭔지를 핑계 삼아 출국하였다.

평면 예술이란 말하자면 옛날 식 그림을 말한다.

지금은 미술도 평면, 입체, 설치, 매체 예술로

나누어한다.

백남준은 글쎄 입체, 설치, 매체를 통합한 이

시대의 미켈란젤로랄까---.

하여간 집안일은 연변이 고향인 조선족 아주머니가

맡아서하고 있다. 사정을 아는 장돌뱅이 고등학교

동기가 "노 마크 찬스네"라고 싱거운 소리를 하였다.

"웃기지 마라, 공휴일만 되면 외출비 받아서 외박

하고 오는 여자야."

나도 장돌뱅이 같은 농담으로 응수하였지만 사실은

예쁘장한 중년의 조선족 부인은 공휴일마다

나가서 도축장의 허드렛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주말이면 식당에 나가서 부업을 했는데요,

요즈음은 노는 날 사무실 부근의 작은 식당이 어디

영업이 됩네까---."

그래서 도축장에 붙어있는 "내장 세탁" 비슷한

일을 하는 모양이다. 그곳도 물론 공휴일이지만

중간 도매상의 일거리가 있다던가, 하여간 그런

식의 설명이었다.

미술품 관련 수출입을 하며 이제는 국제 장돌

뱅이가 다되어 드라이하게 사는 나도 처음

조선족 아주머니설명을 들었을 때는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부부는 모두 자기 일이 한정 없이 바쁜 편

이어서 집으로 오는 전화는 이 조선족 아주머니가

받아서 메모를 해 두는데 퀴즈 풀이의 재미를

가끔 제공해준다.

또 문화차이가 무섭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예컨대 "으네네 집"도 한참 머리를 굴리게 했다.

결국 아내의 친구 "은혜네 집"이었다.

어제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이 조선족 아주머니는

공휴일 외출이었고 전화기 앞에는 "날마다 눈에

샘물"이라는 메모만 달랑 남아있었다.

이건 퀴즈 난이도가 너무하다 싶어서 휴대폰으로

조선족을 불렀다. 그녀의 답은 궁금증만 더 증폭

시켰다.

"그대로 맞아요. 남자분이 전화해서는 날마다

눈에 샘물 니맘이요, 그랬다우."

"아이구 끊읍시다."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잘 점검하지 않는 내

탓이 컸나보다.

이번 퀴즈는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오늘 26일 날

친구 아들의 결혼식장으로 내가 발길을

옮기면서 겨우 풀렸다.

결혼식장이 "라마다 르네상스"였는데 아마도

우리 고등학교 동문 친구들의 모임을 맡고 있는

총무가 이 행사를 재확인 한다고 집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다.

그래서 "날마다 눈에 샘물""오고 말고는 니맘

이오"가 된 모양이었다.

나는 청첩장으로 그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걸

문득 푼 것은 "라마다 르네상스" 문지방에 발을

들여놓으면서였고, 그제서야 나는 "날마다 눈에

샘물 니맘이오" 라는 의문으로 부터 "해탈"하는

기쁨을 누린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내 옆에서 다소곳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서는 부인을 보자 내

가슴에는 울컥하는 슬픔이 치밀어 올라왔다.

"정혜"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나와 아내와 정혜는 모두 미술반이었다.

나는 정혜가 좋았으나 그녀는 총각이었던 미술

선생님을 몹시 좋아하였다.

작은 소문이 조용히 돌았으나 두 사람은 결합

하지 못하였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정혜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하긴 미대를 지망한

3생들이 모두 실기를 대비하여 학원이나

스튜디오로 출석하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나와 미래의 아내는 서울 미대로 들어갔으나

정혜는 전문대학으로 갔고 모교의 미술 선생님은

그즈음에 돈을 많이 받고 극장의 간판을 그리는

"간판장이"가 되었다던데 그 뒤 소식은 모른다.

사제 간의 스캔들에 책임을 지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소문은 대학에 들어가서야 들었다.


"정혜야"

내가 고운 그녀의 목덜미에다 대고 이름을

불렀다.

가슴에 있던 슬픔이 이제는 목구멍까지 올라

와서 음정이 떨렸다.

아직도 예쁜 정혜의 얼굴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잔잔한 미소로 뒤덮였다. 우리는 알은체를 하는

동기들을 모두 따돌리고 맨 구석의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지방방송을 시작하였다.


"나 그때 너 사랑한 줄 알고 있었지? 그래, 가볍게

키스도 해봤잖아?"

옆에 동석한 어떤 중늙은이가 힐끗 나와 정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방방송의 볼륨이 좀 높았나

보다.

하지만 내 어이 볼륨에 신경을 쓰랴---.

"우리 마누라는 참 못났잖아. 그래서 그림 교수로는

성공했는지 모르겠다만---"

"호호호"

정혜도 볼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였고 목하

이혼녀의 타이틀로 살고 있다고 했다.

"이혼녀, 거 자유로워 좋겠네. 요즈음은 옛날하고

달라서 이혼녀가 날마다 눈에 샘물도 아니겠고---."

나는 "눈에 눈물"이라고 하려다가 얼른 "샘물"

바꾸었다.

고마운 조선족! 내 어휘를 넓혀주다니~!

싱거운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눈물이라고 바로 말해라. 샘물로 바꾸니 무시하는

소리로 들리네. 그리고 이혼녀라고 나와 연애할

생각은 말아."

그녀가 웃음 아래에서 망치로 못질하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하였다.

"사실은 나 이제 마침내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곧

영원히 뗄 것 같아."

"상대는 누군데?"

"우리 그때 미술 선생님이야. 지금 맨해튼에 계셔.

스트리트 아티스트, 거리의 인물화가 말이야.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서---. 관광객

상대지"

테이블 주위의 사람들이 주례사로 부터 서서히

지방방송으로 채널을 바꾸기 시작 하였다.

"내가 임파근종을 앓고 있어. 이혼한 남편의

위자료가 의외로 많아서 마지막으로 보스톤에

있는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까지 가봤는데

주변 정리를 하라는 눈치야. 절망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담담하게 뉴욕으로 가서

맨해튼에 있는 링컨 센터의 아트 전시장과 또

구겐하임, 그리고 모던 아트 뮤지엄 등을

둘러보며 월도프 아스토리아에서

며칠을 묵었는데 그런 기적 같은 해후가

일어난 거야. 그 양반이 글쎄 그 거리에 나

앉아 계시잖아---."

둘은 결합하였으나 이제 삶의 종착역은 멀지

않았다.

"정혜야, 내가 뭘 알겠나 만은 인터페론같은

강하게 써봐. 그런 병은 돈과의 싸움이라고

하잖아. 그리고 이제 네 사랑을 찾았으니

심리적으로도 큰 원군이 생겼네."

내 목소리는 마침내 울먹이고 있었다.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