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산 페르민의 투우와 발해 공주 마을 뜨개소의 여름 광란

원평재 2005. 7. 23. 06:41
 

<<산 페르민 투우와 발해 공주 마을 뜨개소의 여름 광란>>

---내게 재능이 있어서 이런 “표제 그림”을 해체적 기법으로 집중해 낼 수 있다면---


연변 지역이라고 여름이 없을 리 없다.

서늘한 여름을 기대했으나 우리나라의 무더위나 열대야만 없을 뿐, 여름이 되자 여름이

왔다.

수은주가 31도나 되던 7월 중순, 문득 헤밍웨이가 쓴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의 무대가 된 스페인의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San Fermines)

투우축제가 생각났다.

이 축제는 7월 6일에 시작하여 14일까지 일주일을 지속한다.

 

    나도 어느 해 여름 스페인 여행 중에 그곳을 방문코자

    하였으나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지역이어서 위험

    하다고하여 포기한 아쉬운 기억이 공연히 연길에서의

    여름나기에 다시 떠올랐다.

 

 

 

왜 이런 “살생의식”이 생겼을까,

여름 더위가 사람들의 의식을 전도시키고 동물적 본능이 껍질을 뚫고 튀어나오게

하는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이런 충동적 현상을 동물적 본능이 소멸되어가는 현대인의 재생의식으로

삼고자 생식불능의 지식인과 색정광의 여인, 그리고 젊은 투우사를 등장시켜서 여름

소나기처럼 써 내린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로 형상화했다.

 


              (정효공주 묘기가 있는 투도진의 나른한 여름 일상)

 

갑자기 전화가 왔다.

중국 전화기 소리는 가다듬지 않아서 언제나 생경하게 울린다.

역사학자의 전화였다.

오늘 화룡시 투도진(頭道鎭) 인민 대표 대회 교육 자문 위원회에 책과 장학금 전달할

일이 있으니 함께 가서, 간 김에 발해의 정효 공주 묘와 서고성을 보자고 한다.

 

  

 

 

 

 

 

 

 

 

(투도는 頭道의 한자음으로 main road, 혹은 제1도로이다. 이 평원의 제1도로가 있는

마을이라서 투도진이다. 이 평원에 제2, 제3도로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분이야 자주 가본 곳인데도 이 더위에 거동을 하자는 데에는 유적지에 대한 역사학자

로서의 끊임없는 관심도 있겠으나, 이제 출국 날자가 바튼 나에 대한 배려가 많았으리라.

더위야 게 물렀거라, 소리 지르고 내가 출발 장소로 나갔다.

하루 중 가장 더운 2시경이었다.

 

지금 연변 일대는 재개발 공사와 함께 특히 도로공사가 난장판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단하다.

한꺼번에 모두 뜯어 제켜서 금년 중에 도시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계획이다.

뽀얀 먼지와 덜컹거리는 차체의 아우성을 온몸으로 받으며, 국문학자 한분이 더하여

세 사람이 용정을 거쳐 일단 화룡으로 달려갔다.

 


(투도진에서 잘 살아보세라는 캐취 프레이즈---. 머리 頭자의 간자체가 보인다.)

 

도합 한 시간 반쯤 걸려서 도착한 화룡시의 투도진 중심에는 “진 인민 위원회”를 맡고

있는 조선족 여성 위원장과 진 행정사무소의 자문 위원을 하는 퇴임 교장 두 분이 더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반갑게 서적 꾸러미를 받아 옮기고 장학금도 수령하였다.

전달 절차 중에 짬이 나서, 나와 국문학 교수님은 참석지 않고 시골 마을의 중심가에서

“아이스케키”를 사먹었다.

 


(이불 덮은 아이스케키 통이 아스라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비닐 봉지에 10개씩

넣어서 팔았다.)

 

10개에 1원 50전이니 10여 년 전 백두산 갈 때와 값이 진배없었다.

그때는 관광버스 바퀴에 펑크가 나, 시골 마을에서 대책도 없이 기다리며 이 정도 값에

아이스케키를 사먹었던 기억이 났다.

 

처음 서울에서 연길 오면서 타임머신을 탔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 곳에 오고 보니

그 머신의 단추를 하나 더 눌러버린 것 같았다.

정말로 오래전 낙동강변의 내 고향에서 여름이 오면 그 더운 날들을 시간의 흐름도

없이 꼼짝없이 참으며 보내었던 그 빛바랜 시간의 그림이 오늘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선약이 없었던 공주님을 오늘 알현치 못하고 이 시골 마을의 정경만을 디지털

카메라에 넣는 일로 여름 하루해가 진다 해도 이 더운 날의 행보는 성공적인

셈이었다.

 


 

진 사무소 인근에는 이발점도 여럿이 함께 있어서 미녀 미용사들이 더위 속에서 밖을

힐끔거렸고 또 술집도 있었는데 역시 미희가 생맥주 통을 길가에 내놓고 따루어 팔고

있었다.

값을 물으니 500cc 한잔에 3원이라는데 낮술이라 아쉽지만 낭만적 행위를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미녀, 미희라는 표현을 내가 여기에 쓰는 것은 모두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였기 때문에,

미에 대한 그 아가씨들의 하나같은 정성에 대하여 내가 바치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이 곳 투도진의 인구는 3만 9천명인데 70퍼센트가 조선족이라고 한다.

 


 

이윽고 전달식은 끝이 나서, 우리 셋과 투도진의 세분, 모두 여섯 명이 우리가 타고 간

차를 함께 타고 정효 공주 묘기를 찾아 나섰으나, 반년 사이에 길이 시멘트로 포장

되어서 오히려 찾는 데에는 애를 먹었다.

함께 간 분들이 여기에 사는 조선족 지식인들이지만 도심을 벗어난 야외 산골에

천년도 더 전에 누워버리신 공주님의 유택을 찾아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근에 내린 비로 도랑의 물살이 깊어서 일단 차를 버리고 더위 속에 행렬을

이루어 발해 공주를 찾아 나선 우리의 모습은 좀 과장되고 불경스런 표현일는지 몰라도

영화에서 본 “인디애나 존스” 일행을 압도하는 바가 있었다.

 

마침내 공주 묘가 있는 마을과 거기 살고 있는 조선족 어른을 만나서 길은 쉽게 트였다.

이 곳 향리의 이름은 예전에는 “하태양촌” (지금의 행정 단위는 룡수향 룡수촌)이라고

하여서 조선족만 한 40여가구가 살았는데 이제 이들은 모두 도회로 나가고 두 가구만

남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한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양떼가 농가 길을 누비고 다닌다.)

 

“의사소통은 어떻게 합니까?”

국문학자가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어로 하지요---.”

예상한 답이 나왔으나 아쉬운 답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서 일로 공주님의 유택으로 가고 있는데 중간 지점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땅을 고르게 파고 그물 망창에 흙을 얹어서 채를 치고 있는 등, 또 영화에서

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고분과 절터를 주정부에서 발굴하는 작업인데, 당분간은 이 일대에서 촬영이나 채취나,

아니 접근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안내원이 시골 인심 수준으로 얼굴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으나 이 한족

사람들은 공무원들이었다.

단호한 발굴 책임자의 태도에 이번에는 우리를 “진사무소”에서부터 안내했던 사람이

불편해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최근에 세워놓은 공식적인 표석을 내가 카메라에 담는 모습까지에도 조바심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발굴 책임자의 시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게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문득 예전에 세워놓았던 낡은 표석을 새로 찾아내어서 퇴락한 모습과

그 위쪽 낮은 언덕 위에서 숲 사이에 어른거리는 공주묘기를 염두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미 완전히 도굴을 당했다는 그 묘기의 빈터를 내가 직접 올라가보고 그 빈터와

허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들 무슨 한이 따로 있으랴.

“한과 원”은 이미 오래전에 이 발해의 고토에서 무상히도 유현하게 떠돌다 지레 마멸하고

소멸된지 한참이나 지났을텐데---.

 


          (저 위쪽이 정효 공주 묘기인데 정밀 발굴 중  접근 금지였다.)

 

이 공주 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 동네에 사는 어떤 영리한 중학생이 몇 년간

부장품을 파내어서 재미를 본 이후에 여럿이 또 달려들었고, 그런 다음에 텅 빈 석실과

그 위의 축조물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88년경, 우리가 올림픽을 치룰 때였고 다시 이제 와서야 발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작년에만 왔어도 만고강산으로 누빌 수 있었는데 이제 오셔서 안타깝다고 누가

위로사를 건넸다.

지난 이야기는 다 그렇다.

 


(가운데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 공주의 천년 유택이 있다. 아래쪽에는 이 곳의

주산물인 엽연초가 잘 자라고 있다. 금년 농사는 대풍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중국에서 일찍이 볼 것은 본 셈이었다.

지금은 서역학회나 돈황학회의 활동이 너무나 활성화 되어있고 관광객들의 수는

또 얼마인가.

남보다 조금 일찍 발을 디딘 서역쪽, 우루무치, 투루판 쪽도 지금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심상치 않다고 하고,  너무 많아서 다 돌아보지도 못했던 돈황의 막고굴도

이제는 굴들을 많이 막았다고 듣고 있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당연한 조치일 것이다.

 

우리가 돌아 나오려는데 이 동네에 산다는 또 한사람 조선족이 미루나무 아래에서 소를

돌보며 멍한 눈빛으로 앉아있다.

“어제는 놀랬제?”

우리를 안내해준 조선족 노인이 물었다.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일이었구마. 못 볼 험한 꼴을 봤다 말이어. 뜨개소가 미쳐

버렸다 말이다.”

 


   (이 소는 여름 더위에 난동을 부린 그 뜨개소가 아니라 순한 농우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 어느 한족집의 뜨개소가 갑자기 날뛰더니 주인 노인을

날카로운 뿔로 떠받더라는 것이다.

일흔 네 살이나 된 소 주인이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또 치받아버려서

다시 올라갔다가 떨어졌는데 땅바닥에서도 몇 번 더 날카로운 뿔로 찔렀다고 한다.

공안까지 나와서 소를 잡으려고 해도 안 되다가 평소 합방을 시켰던 암소 우리로

모니까 겨우 들어가서 잡았다고 한다.

 

숨진 노인은 나중에 보니 차마 말로 옮길 수 없는 형체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송아지 때부터 키운 주인에게 “뜨개 소”, 그러니까 뿔이 날카로운 황소는 이 한 여름에

왜 그런 발광을 했을까?

 

아니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 투우 축제, 그 살생의식은 왜 여름에 있을까?

나아가서 우리는 왜 이 뙤약볕에 무슨 핏줄 본능이 발동하여 먼먼 발해의 정효 공주

묘기를 찾아 왔는가---.

 

정효공주는 발해의 제3대왕인 대흠무 대왕의 영특한 딸로서 시집을 잘 갔으나 일찍

청상이 되었다고 한다.

평소 애틋하게 느낀 부왕보다 먼저 세상을 뜨니 왕이 몹시 애석해하며 장사를 잘

지내고 묘기를 큰 구조물과 함께 축조하여서 나중 사람들이 묘지인줄을 몰랐다고 한다.

 

대흠무 대왕은 이 곳 화룡을 수도로 하여 약 10년간 지나다가 지금의 발해진, 그러니까

상경용천부로 옮겨서 발해 200여년의 터전을 잡는다.

발해진의 엄청난 적석 성곽 규모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글을 올린바가 있다.

 

우리는 발굴단에게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대흠무 대왕이 쌓았다는 화룡시 외곽의

서고성을  찾아 나섰다.

서고성은 화룡 벌판의 한 가운데에 정사각형으로 축성한 토성인데 지금은 백두산으로

가는 옛길이자 앞으로 포장이 되면 주도로가 될 이도구(얼터구) 바로 옆쪽으로 그

흔적이 일부나마 남아있었다.

 


 

서고성도 지금 천막을 치고 많은 사람들이 발굴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길옆으로는 새로 세운 표석이 “서고성”임을 알리고 있어서 내가 웃으면서 겁 많은

안내인에게 이 표석은 찍어도 좋겠냐고 물으니 그 사람은 심각하게 좋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발굴단에게로 가서 무얼 듣고 왔는데 내용인즉 아직까지는 자갈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란다.

10년 도읍지에 무슨 대단한 유물이 있으랴 만은 속단도 금물이리라.

 

돌아오는 길에 투도진에서는 똑똑하고 강건한 여성 위원장을, 그리고 용정에서는 착한

안내원을 각각 내려주고 우리는 연길의 코스모 호텔 1층에서 만주 콩으로 만든 유명한

콩국수와 말썽 많은 중국 맥주로 저녁을 먹었다.

 

황소도 미쳐 날뛰던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발해 공주의 숨결을 찾아 나선 하루는 바로

손색없는  피서일지를 또 한 장 작성한 날에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