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장춘의 위만주국 황궁 박물관

원평재 2005. 8. 7. 10:46

장춘의 “위 만주국 황궁(僞 滿州國 皇宮)”

 

 

떠나야할 날짜가 며칠 남지 않은 객지의 사정에서 또 여행계획을 꾸미는 일은 생각보다

큰 마음의 부담이었는데,

“블로그”에서 처음 알게 되어서 마침내 죽마고우처럼 친숙하게 된 “노 젓는 소리”님의

든든한 동기 유발이 큰 힘이 되어 장춘과 길림의 여로가 열리고야 말았다.

 

그간 내가 객원교수로 몸을 담은 중국의 같은 대학에 기자협회의 후원으로 파견 연수를

나온 박 기자도 지난번처럼 여행의 동지가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지만 사실 박 기자는 여름 방학을 맞아서 찾아온 다람쥐 같은 두 아들

때문에 동행을 망설이고 있다가,

그 사연을 내 블로그의 댓글에서 읽은 장춘에서 활동하는 문필가,  닉 네임으로는

“노젓는 소리"님이 “다람쥐 구경 좀 합시다”라는 역시 강한 동기유발을 하여서 일행은

우리 집사람을 포함하여 어른 셋에 미운 일곱 살과 다섯 살의 다람쥐 둘이 더하여 도합

다섯이 되었다.

 

누가 보아도 걱정이 앞서는 여행단이 마침내 구성된 셈인데, 박 기자는 과연 훌륭한

기관차 역할을 하여서, 이 성수기에 아무도 장담 못하는 장춘 행 침대열차 표를 구하고

“노젓는 님”과도 통화를 하여 “바쁘게(힘들게) 보이는” 이 여행 사업을 원만히 조직

하였다.

 

중국 내 장거리 여행의 정석인 “잉워(硬臥)”라고 불리는 야간 침대 열차는 한 칸에 넷

혹은 여섯이 자는 벙커 침대가 들어 있는데, 운이 좋았던지 한 칸에 네 개의 침대가

있는 아주 깨끗한 객실이 배당 되었다.

다만 박 기자만 다른 칸으로 가서 잠시 이산가족이 되었으나 다람쥐들은 우리 부부와

같은 칸에서 초저녁에 아빠의 자장가성 이야기를 듣더니 밤새 숙면을 취하였다.

 

여덟 시간 반 만인 새벽 6시에 장춘에 도착하여 출찰구를 나왔더니 어떤 인자하게 생긴

신사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우리 여행단의 특징이 유난했겠지만, 사실은 마음이 통하여서 금방 알아보았을 것이고

우리도 닥아온 그 분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노 젓는 님”은 길림 신문사의 박문희 부총편이시고 현재 사단법인 동북아경제문화

교류 진흥회의 중국측 고문을 맡으셔서 전날 까지도 한국의 인삼 관련 기업가들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오늘 또 우리를 맞으러 새벽같이 나오신 것이었다.

 

장춘은 지금은 길림성의 주도이지만 동북쪽에서는 아주 늦게 개발이 된 도시이다.

원래 작은 농촌 마을에 불과하던 이 곳은 일제가 위만주국을 세우고 황궁과 행정기관을

앉히면서 새로운 도시로 급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신경(新京)이었던 점도 바로 이런 역사를 나타내 보여준다.

지금 이 곳의 인구는 도시지역만 따져서 260만이고 전체 행정구역의 인구는 약 700만

명에 이르는 큰 도시로서 높은 빌딩들이 역전 거리에서부터 눈에 들어왔고 무질서

하기는 해도 번듯한 택시들이 즐비하여 이제껏 우리가 타고 다녔던 여행지에서의 저

기이한 삼륜차들은 눈을 닦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여장을 푼 곳은 “노 젓는 님”이 미리 예약을 해 둔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대화 호텔”이었는데 그 규모와 시설에 같은 동포로서 내가 괜히 어깨가 으쓱하였다.

“대화 집단(그룹)”을 운영하는 이규광 회장은 길림성 조선족 기업가 협회장도 겸하고

있는 자수성가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우리는 호텔 뷔페로 조식을 하고 이규광 회장과 차를 나눈 다음 이 회장이 내 준 다인승

밴 형 승용차로 위만주국의 옛 황궁으로 갔다.

중국 근대사에는 만주국이라는 표현이 없고 모두 위만주국이라는 표현을 쓴다.

겨우 14년간에 걸친 괴뢰 지역 정권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내포된 호칭인데 지금

그 황궁 건물은 박물관이 되어서 오욕의 역사를 고스란히 정리, 전시하여서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오래 동안 이 황궁은 방치되어 있었으나 개혁 개방 이후에 주변도 정리하고

내부도 손질을 하여 일종의 역사적인 반면교사 역할을 하면서 관광자원으로도 십분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황궁 박물관의 외양은 일제의 잔영이 서린 일본식 고건축 양식을 띄고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이 역사적 유물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부끄러운 과거사와 청조

황통의 후예 “부의”에 대한 애조 어린 한마당을 극화시켜 놓고 있었다.

 


                                      
  (발물관의  정문인데 열어놓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어린 부의의 황제등극 모습을 실물대로 만들어 놓았는데 안면이 많다

생각하고 다시 보니 “마지막 황제”였던가 하는 영화 장면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이었고 이 후 관람의 전반적인 흐름도 그 영화에 준거하고 있었다.

 

전시된 여러 가지 파노라마들은 모두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부의의 두 번째 처이면서

황후가 되는 완용(婉容 Wanrong)의 부차적 생애가 황제가 펼치는 메인 스토리 보다도

더 극적인 애수를 자아내어서 깊은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아름다운 용모의 그녀는 요부(팜므 파탈)의 영역에는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고

있었는데,

또 한편으로 풍기는 강한 지적인 면모와의 경계선 사이에서 그녀는 긴장과 억압을

뿌리치려고 아편 물 뿌리를 요염하게 빨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잘 다음어진  빛나는 화장대, 무광택의 짙은 밤색 독서 대를 얹은 묵직한

집무 책상과 즙기 등이 모두 잘 정돈되어 진열되어있었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침실도 화사함 속에 음침함을 간직하고서 열린 문으로 비좁게 들여다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 앞에 무방비 상태였고 요염한 침대도 쓸쓸히 덜렁 독거하고 있었다.

 

황후는 꼬부리고 잤나, 키가 작았나, 지금은 여염집에서도 다들 쓰는 킹 사이즈나 퀸

사이즈의 침대보다도 좁고 작고 낮은, 오로지 못다 채운 정욕의 황금빛 때만 묻은 아담

사이즈를 후세인들에게 들키고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정신 분열증으로 죽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관람객들이 많아졌는데 살펴보니 일본 관광객들이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서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중국 관광객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왜놈들이 얼마나 배가 아플까요?”

예리한 박 기자의 쏘는 듯한 말이었다.

나는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병탄한 것도 못된 짓이었지만

망하는 방법도 우리나라에는 가장 못되게 망하였지요---.”라고 술회하였다.

“그래요,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박 고문도 말을 절제하며 빙그레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었다.

 

“위만주국”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주역도 맡지 못한

상태에서 그 역사의 궤적에서 가장 뼈아픈 희생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가 한 참 흐른 후에는 또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갈라져서 말달리던

선구자들을 서로 끌어내리기에 바빴다.

또한 더러는 잘 버티다가 마직막 판에 “락토만주”같은 코메디성  가사와 곡조를 일제에

지어 바쳤고 이제 와서는 그 치욕스런 과거를 또 피곤하게 따지느라고 정신이 없다.

 

"부의"는 잘 알려진데로 청조가 망한 후에 무명의 존재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황제가

되어 꼭두각시의 인생에서도 그 절정을 누리다가 마침내 평민이 되어 바느질도 손수

하며 저 처참했던 문화혁명 시절도 겪고 마침내 중국 공민의 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파노라마와 같다.

세세한 부분은 내 기억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으나 그걸 보충하려고 황궁 앞에서

파는 DVD 상점은 기웃거리지 않았다.

 

점심은 장춘에서 냉면이 제일 유명하다는 “정자(眞子) 반점” 본점에서 냉면과 비빔밥과

돼지고기 편육을 식성대로 만끽하였다.

아직 쓰촨성에서 돼지고기 관련 돌림병이 나타나기 전의 일이었다.

정자 반점은 장춘 시내에 체인점이 여럿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점심을 마치면 저 유서 깊고 유명한 장춘 영화 촬영소를 빨리 가 보아야할 일정과

그 다음 길림 신문사와 장백산 잡지사 방문으로 스케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장춘 촬영소에는 최근에 중조 합작으로 “역도산의 비밀”을 만든 박준희 감독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바로 박 고문의 아우 되는 분이었고 길림신문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토템 주제의 시인, 남영전 사장과 이 곳 문인들이 오후 세시에

우리와 만나도록 계획이 잡혀있었다.

모두 노를 열심히 잘 저으시는 박 고문님의 배려임은 여기에서 더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