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장춘 영화 촬영소 (장영 촬영소)

원평재 2005. 8. 10. 08:14
 

장춘 영화 촬영소


정자 반점(眞子 飯店)에서 맛있는 냉면과 비빔밥과 보쌈을 먹고 우리는 박 고문이 마련해

놓은 승용차를 타고 “장영 촬영소”로 갔다.

 



장춘 영화 촬영소는 원래 위만주국 시대의 산물로서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에 영화

예술의 의지가 결집된 동북아의 “영화 요람”이었다고 한다.

현대 중국이 탄생한 다음에도 이 곳은 중국 전체에서 가장 현대화한 영화 예술의 본산

으로서 많은 역작들을 제작해내었는데 최근에는 여기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중국의 곳곳

으로 분산하여 과거와 같은 독보적 위상에는 다소 변화가 왔으나 최근에 다시 장춘

근교에 대규모의 영화 단지를 마련하여서 약 80퍼센트의 시설이 이전을 하여 21세기의

신기원을 기약하고 있다고한다.

 


(뜻밖에도 모 주석이 맞아 주었다. 중국 전체에서도 이 형상은

세 곳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제 과거의 촬영소 터에는 제작 본부 성격의 주요 기관이 아직 남아있고 예전의

스튜디오도 박물관 같은 역할을 하여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박문희 고문의 아우님이신 박준희 감독은 바쁜 중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으면서 촬영소의 역사와 개황, 그리고 주요 시설들을 안내하여 주었다.

 


 

박 감독은 최근 대서특필되고 있는 북한과 중국의 합작 영화, 중국의 표현대로라면

“중조합작”의 “력도산의 비밀”을 완성하여 마지막 개봉을 앞두고 있는 화제의 인물이자

중국 영화계의 거장이다.

한 핏줄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가만히 뜯어보니 이 분은 감독이지만 배우로 나갔어도 큰 성공을 거두었을 마스크를

겸비하고 있었다.

박 감독은 촬영소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는 가운데 역사성이 있는 여러 촬영 스튜디오와 기념으로 남긴 유명한 세트도 설명해 주었으나 중국 영화에 식견이 없는 우리로서는

그 의미가 다소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남겨진 유명 영화의 세트장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은 신명이 나서 박 감독의 든든한 후광을 배경삼아 여러모로 조명을 바꿔가며 얕은 재미를 만끽하였다.

 


 

 

우리는 다시 “장영 집단 제2영화 제작 공사” 부총재로 있는 류지성(柳志誠) 부총재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장영"에 대한 인상을 말하고 한류에 대한 그의 고견을 청하였다.

박 감독께서 통역을 맡았으나 섬세한 부분은 형님인 박문희 회장께서 보충하거나

내용을 외연하기도 했다.

“우선 중국의 영화 산업이 예컨대 북경이나 상해같은 데로 몰리지 않고 미국의 할리우드

처럼 동북 지방의 주요 문화도시에 있다는 것이 놀랍고도 다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류의 현황을 설명해 주시고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나의 질문이었다.

 


                           (왼 쪽에 앉은 분이 류지성 부총재)

 

“한류는 아직도 중국 연예계에서 큰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첫째 한국의 문화가 본격적으로는 이제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되기 때문에 단순한

호기심에서 촉발된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의 영상 서사 방식이 우선 큰 사건 같은 것을 먼저 던져

놓고 그걸 풀어나가는 식이라면, 한류는 잔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다가 중반 이후

혹은 마지막에 큰 굴절과 격변을 갖고 오니까 끝까지 재미를 잃지 않고 팬들을 사로잡는

다고 봅니다.”

그의 답변이나 박 감독의 통역은 진지하였다.

 


                                 (장영 촬영소 정문의 모습)

 

“팬들이란 젊은층의 관객을 말하나요?” 나의 물음.

“중장년도 포함한 시청자를 의미합니다. 영화보다는 TV의 영향이 더 크니까 시청자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지금 중국에서 방영하는 한국작품들은 매우 다양하여서 연령층에는 관계가 없지요.

다만 한때 일본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리다가 지금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현상은 타산

지석으로 삼고 부단히 계발하는 정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일본 흥행물이 사라진

것은 역사 왜곡 사건과도 관계는 있습니다만---.”

 

“미국의 영화계는 미디어의 통합단계가 아닌가 합니다. 예컨대 워너 브러더스와 타임이

M & A를 거쳐 워너타임사로 바뀌면서 보도와 엔터테인먼트를 모두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가는데 여기 장영에서는 그런 계획이나 도전이 없습니까?”

“왜요, 우리도 모든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나아가서 교육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손을

대고 있답니다.”

“아이구, 너무 거대 공룡 식으로 나가지는 마십시오. 하하하.”

우리는 모두 깊은 공감대 속에서 크게 웃었다.

 

계속 결재 서류들이 올라와서 우리는 감사를 표하며 방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승용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조금 더 방담을 즐겼다.

 


(비행기 세트에 걸려있는 세탁물이 헐려나가는 이 곳의 현주소였다. 대부분의

대지는 아파트 건설장이 된다고 한다.)

 

“입북을 자주 하시니까 그 쪽 이야기 좀 하시죠.”

내가 채근하였다.

“열심히들 하는데 아직 시장경제에 익숙지 않아서 자율적인 면이랄까 효율성 같은 면에서 문제가 발견되지만 급속도로 개선, 발전되고 있더군요---. 아주 오래 전에 김지미 씨에게 합작을 하자고 했더니 이 분이 무척 애를 써보다가 아직 중국하고는 안 되겠다고 하던

생각이 나더군요, 하하하.”

 

중조 첫 합작영화 “력도산의 비밀”은 중국의 국가영화국과 국가합작영화 관리공사

쌍편의 심사에서 높은 평가로 통과 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 산하의 기구와 합작이 되었는데 박 감독은 조선족

영화감독이라는 특수한 입장이어서 어려운 사업 실현에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북한은 원래 영화 제작에서 상당히 높은 독자적 수준을 유지해 오던 터였다.

이런 정황에 맞물려 신상옥 감독에 얽힌 이야기들을 우리는 상식과 추론의 범주를 왔다

갔다하며 한동안 즐겼다.

 


                         (장영의 건너편에 있는 셀프 식당 모습)

 

우리가 그동안 서방세계의 영화 예술을 우리 특유의 친화력과 창조력을 접목시켜서

오늘날 누가 무어라 해도 한류의 돌풍을 일으켰듯이 박 감독은 중국 사회 속에서

일찍이 영화계에 입문하여 동방세계적인, 아시아적인 영화 예술 혼을 계발하고

일깨우면서,

아울러 세계사적인 흐름에도 정통하고 있어서 국적은 달라도 이런 한 핏줄이 있음에

내가 공연히 우쭐해졌다.

 

박 회장께서 마련한 승용차가 들어와서 우리는 즐거운 환담을 마감하여야 했으며

길림 신문사에 박 회장께서 마련한 또 다른 스케줄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