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미국에서 쓰는 중국 후기(길림 신문사)

원평재 2005. 8. 19. 03:21

인터넷 사정으로 중국에서 못다쓴 기록들을 미국에서 마무리합니다.

 


 

 

"길림 신문사"는 장춘에 있다.

길림성의 성도가 장춘에 있고 또 도시 규모가 크기 때문인듯하다.

이 곳에서는 순수 문예지 "장백산"도 함께 발행하는데 두 곳에서 함께 근무

하는 조선족 기자들과 편집인들은 젊은 분들 못지않게 중년의 남녀 분들도

적지 않았는데,

눈빛들이 모두 형형하고 지사의 기개가 몸에 배어 있었다.

 

 

 

 

 

 

 

 


  

      (맨 오른 쪽이 남 총편이고 왼쪽은 박문화 기자, 맨 왼쪽이 윤 교수)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과찬이거나 나의 선입견이 아니라 이제껏 내가

이곳에서 발행 되는 출판물들을 읽어 오면서 느꼈던 소감이 실재와 부합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감격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두 기관의 총편은 남영전 시인이었는데 연치(年齒)는 오십대 후반으로 젊을

때부터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한 재사여서, 하필이면 문단이나 출판 쪽 뿐만

아니라 북경의 여러 사업체에서 스카웃 제의가 많았으나 꿋꿋이 이 곳을 지킨

분이었다.

재사에게 에피소드가 많듯이 이분에 관한 재미있는 사연들도 많아서 나도

여기 저기에서 그 훌륭한 면모를 많이 듣고 읽은 바가 있었다.

 

 

 

 

남 총편은 특히 토템 설화에 근거한 원형의 주제를 한어(漢語), 한시로 창작

하여서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시인대회 같은 데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연구의

대상이 되는 분이었는데,

영어와 일어로 번역된 시집도 적지 않았으며, 우리말로도 번역 혹은 창작의

상태로 많이 발표를 하는 분이었다.

 

 

 

 

이날, 남 총편실에는 길림성의 문인, 석학들이 많이 참석하여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이 진지하게 진행되었는데,

길림 대학의 "윤윤진" 박사도 참석하여서 대화의 지평은 매우 넓었다.

길림 대학도 물론 장춘에 있다.

 

 

 

 

 

 


 

 

윤 교수가 쓴 『서방 모더니즘 문학』과 "비교 문헉" 관련의 책은 최근에

내가 매우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마침 이날 만나고 보니 조용하고 점잖은 인상 속에 활화산 같은 학문적

열정을 간직한 분이었다.

 

내가 그분의 저서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며 몇 부분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당장 의기 투합하였다.

 

 

 

전반적으로 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새롭게 조명된 “주변부 문학”

으로 서의 조선족 문학 가치를 역설하였고,

남영전 총편도 그 주장의 타당성에 공명하여 조선족 문인들이 좋은 시대적

조류를 타게 되었지만,

아울러 조선족 문인들이 보다 성숙한 철학적 기반을 터득하고 닦아야

한다고 뼈아픈 강조를 하였다.

 

 

 

 

나는 겨우 내 창작집 두 종류를 남 총편에게 증정하였는데, 내가 받은 그 분의

시집과 번역시집, 평론집, 그리고 최근호의 장백산 등등은 나그네의 짐을

천근만근이 되게 하여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하였다.

 

 

 

 

 

 

 


 

 

 

 

 

 

 

우리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토론과 담소를 나누다가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날 저녁은 박 고문의 배려에 따라, 남 총편께서 우리 일행과 길림 신문사의

편집진 및 장춘의 조선족 리더들에게 만찬을 베푸는 스케줄이 미리 잡혀

있었다.

 

 

 

 

 

 

 


 

 

 

 

 

 

 

 

빗줄기 속에서 우리는 대화 호텔로 돌아와서 큰 홀을 잡고 저녁 식사를

화기애애하게 나누었다.

참석한 분들 중에는 동북사범대의 경영대학원장(호칭은 좀 달랐지만)도

있었고 장춘 상공회의소의 소장 쯤 되는 분도 있었으며,

편집진의 여성분들도 미모와 지성미로 만찬장을 압도하였다.

 

 

 

 

건배와 건배사를 나누며 흰술(백주)을 마셨고, 푸짐한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중국식대로 춤을 추는 순서가 왔다.

넓은 홀은 일순 무도장으로 바뀌고 춤을 잘 추지 못하는 나도 몇 차례

청무(請舞)를 받아서 홀을 누볐다.

 

 

처음 청무를 한 분은 조선족이지만 조선말을 잘 못하여서 죄송하다는

테이블 스피치를 한 키가 큰 분이었다.

집사람도 청무를 몇차례 받았는데, 나중에는 남 총편과도 우아하게

블루스를 밟고 있었다.

 

 

 

 

가라오케는 이 곳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춤을 추는 중간 중간에는

노래를 또 불렀다.

모두 수준급 이상이었는데, 나는 짧은 레파토리 속에서 “제비”와 “사랑”을

가까스로 불렀다.

“사랑”은 나훈아의 것이었다.

 

 

 

 

모두들 밤이 이슥하도록 “밤들이 노닐다”가 우리는 한 핏줄 임을 확인

하면서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것이 다 좋았던 이 날의 모임 중에서 들은 한가지 아픈 기억이

남는다.

 

 

다름 아니라 이 분들이 대면한 일부 몰지각한 한국 사람들에 관한 나쁜

인상들이었다.

뻐기는 한국인들에 대한 이 분들의 느낌은 분노를 넘어서 이제는 야유의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지도층 인사들의 자제들 중에는 한국에 돈을

벌러 갔거나 유학을 나가 있는 경우가 또 많아서 묘한 애증이 공존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남 총편의 경우에도 아픈 기억을 갖고 있었다.

이 분의 고향은 우연하게도 나와 같은 “경북 선산군”이었다.

이 분은 “도개면”이었고 나는 지금은 시가 된지도 오랜 “구미면”이었다.

여름에 낙동강에 큰물이 지면 배로 왕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바로 이웃

마을이었다.

어쩐지 내 소학교 동기에 남씨 성 가진 녀석들이 많았지---.

 

 

 

 

이 분이 말로만 듣던 고향을 여러해 전에 갔는데 역시나 무슨 수모를 당한

모양 이었다.

구체적인 예는 들지 않았으나 어쨌든 우쭐댄 고향 마을 사람의 말과

행동이 화근 이었다.

 

 

 

 

“우리도 따지고 보면 한국과 길이 열린 초창기에 만병통치약이나 갖고

가서 동정심을 유발한 업보도 많지만---.”

그렇게 말문을 닫는 이런 분들의 마음의 상처는 언제쯤이나 치유가

될까---.

 

 

 

 

 

 

 

 

 

 

 

 

 

 

 

 

 

 

 

 


(제가 지내고 있는 동네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한인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에지워러, 포트 리 등이 있습니다.)

 


(어제 낮에는 "패쓰 마커" 등의 몰이 있는 곳에 생활용품을 사러갔는데

먹물 근성으로 "반스 앤 노블" 서점만 눈에 들어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