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서부, 중서부, 플로리다의 여정

오렌지 카운티에는 오렌지 밭이 없다.

원평재 2006. 8. 17. 06:33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세고비아 지방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없고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고 세빌리아에는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없고 카사블랑카에는 영화에 나오는 그 아메리카 카페는 없다는

글을 올린적이 있다.

 

이제 오렌지 카운티에는 오렌지 밭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니 내 친구네처럼 여유있는 정원에는 오렌지가 무럭무럭 자라지만

원래 이 사막 지역에 무성하던 오렌지 밭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그 땅에는 잘 알다시피 디즈니랜드와 여러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수많은 호텔과 유희장이 들어섰다.

그런가하면 같은 지역의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저 유명한 크리스탈 교회가

들어서 있어서 인간 속성의 양면을 잘 조화시켜주고 있었다.

이 곳의 지명은 오렌지 카운티의 애너하임인데 내 친구의 집은 이 두

명물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위의 사진은 오렌지 카운티, 애너하임에 있는 "디즈니랜드" 입구에 몇년전

설치된, "다운타운 디즈니랜드"라는 풍물 거리입니다.

 

아래는 이 놀이 동산의 분위기와 대차되는 유명한 크리스털 교회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안의 길 바닥에는 수많은 헌금자들의 이름이 줄을 이었는데

한국에서 온 분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내 친구의 집은 오렌지 카운티의 애너하임 중심에 자리하여서 좌우로

디즈니 랜드와 크리스털 교회가 각각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말하자면 인간 내면의 양면성, "성과 속"의 양 극단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는 

명당이 아닌가 싶다.

 

그의 집은 애너하임에서는 이제 찾기 힘든 넓은 대지 위에 유유히 서

있었는데,

꾸준히 40여년 째 살아오며 시시때때로 손을 보아 업그레이드 시켜 온

주인의 의지가 곳곳에 스며 있었다.

 

이곳의 재산세 규정은 주택을 구입하던 때의 가격에 따라 매겨지는

법이라서 내 친구의 끈기있는 양반 기질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절세라는

보상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하긴 그가 이 명당에서 오래 살고 있는 이유는 절세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곳 보다 더 편리하고 아늑한 주거지를 찾기 힘든 

탓이기도 하다.

 

내 친구는 이 곳을 장래 자기 가계의 족적을 담은 가족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후손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나아가서 교민 사회에도 내

놓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가 일생 봉사한 기록들도 이 공간에 모두 내놓으면 개인적 자랑이라기

보다 후손에게 주는 귀감의 역할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소박한

바램이기도 하였다.

 

 

 

"자네 미국판 동명성왕, 해모수에 다름아니네."

내가 농담 아닌 진담을 하였다.

"아이구, 자기 성씨의 가계를 일군 성공한 한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가 겸손한 답을 보냈지만 벌써 가족 묘지까지 크게 장만해 놓은 그의

사생관의 저변에는 오랜 종교적 바탕이 깔려 있는듯 싶었고 아울러 

이 가계에 흘러내리는 선견의 안목처럼 돋보였다.

아마도 그가 집념으로 추진하는 선조들의 일대기를 담은 대하 소설도

그런 맥락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가을의 출판과 그 반향이 기대된다.

 

 

 

 

(그가 경영하는 두 군데 약국에는 원가로만 500불이 넘는 고가의 전문

의약품들이 가득하였으며 직원들도 여러 명 일을 하고 있었다.)

 

 

체류중의 어느 하루 저녁에는 LA 다운타운으로 나가서 내 친구의 가계를

바탕으로 소설을 집필하여 이 가을에 출간을 하게 된 중견 여류 작가와

아울러 교포 사회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시인 몇분과도 교유하였다.

며칠 후면 해마다 열리는 미주 서부 문인 콜로키엄도 있다고 하였으나

내 일정이 허락지 않았다.

 

 

 

 

(내 친구의 가계를 극화한 소설 원고는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다.

여기에 더하여 영문 번역판도 몇 차례 퇴고를 거치면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서부 교포 문학계의 리더들과의 문학 담론 시간도 유익하였다.

김영교  시인은 시집과 수필집을 우리에게 선물하였고 나도 졸저인

창작집 두권을 내 놓았다.

그중의 한 권은 이미 서부 문인 협회에 비치된 것이었다.)

 

 

우리가 돌아다닌 오렌지 카운티의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한 답사기를

여기에 다 올려 놓을 재간이나 여유는 없다.

요즈음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투자의 대상으로 많이 찾는다는 주택도

여러 규모와 수준에서 둘러 보았고 맛있는 음식점 순례도 하였으며

교민들의 여러 업종과 업소들도 "생활 관광" 차원으로 둘러보았다.

 

 

 

 

 

 

 

                          

체류중에 맞은 나의 생일 파티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밖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디즈니 랜드에서 터뜨리는 불꽃 폭죽 놀이가

이 밤에도 계속되어서 우리는 나를 위한 "생일 파티 축하 불꽃놀이"로

여기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오늘도 그 불꽃은 애너하임 하늘을 수놓고 있을 것이었다.

어쨌든 바쁜 일상 중에도 케익까지 장만해준 이 댁 내외의 정성이 지금도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떠나기 전 날은 골프 코스로 나갔다.

시원치 않은 실력(?)을 보살펴준 내 친구 내외의 배려가 다시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진다.

방울뱀이 무서워 오비가 난 여러개의 공을 버리고 온 일도 에피소드깜이

아닌가한다.

 

 

 

 

 

그의 성품을 친절함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릇된 판단이리라.

그가 기우린 친절에는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가계 세우기, 의로움과

자기 희생으로 개화기를 살아간 선조들의 공덕을 잊지않고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후손의 간절한 소망의 구도와도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있다.  

그 열정어린 소망을 누가 탓하랴.

 

그는 내가 떠나기 하루 전날, 그 바쁜 중에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담은

캠코더를 정리하여 주요 장면들을 기본으로 깔고나서,

또 그 전에 그가 한국에 나왔을 때의 기록과 대전 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선대가 모셔지는 모습,그리고 많은 동기들과의 교유의 장면들을

추가한 비디오를 손수 편집하여 떠나는 나에게 전별로 선물하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 날은 영국 히드루 공항을 중심으로하여 비행기 폭탄 테러

뉴스가 하루 종일 방송 매체를 탔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귀국하여 해야 할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있어서 나는

그냥 일정대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이 날, 내 친구는 출근을 했고 내 친구의 부인이 바쁜 사정을 물리고

LA 국제 공항, 그러니까 톰 브래들리 공항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공항은 검비가 삼엄하였고 화물 검색도 오래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액체성 화물은 일절 휴대 반입할 수 없었다.

난리를 피우며 통관을 마치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친구의 부인이

다시 와서 우리는 아쉬운 작별의 세리머니를 나눌 수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좌석은 성수기에 자리가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텅텅

비어서 편했다.

모두 예약을 취소한 결과 같았다.

 

말복이 지나도 한참 계속될 고국의 이 더위는 내 경우 그동안 겪은

한동안의 즐거운 추억을 반추하며 그럭저럭 견디어 낼 요량인데,

그러다 보면 서늘한 가을이 어느 틈에 슬며시 끼어들 것이고

세월은 또 속절없이 훌쩍 지나가 버리리라---.

 

 

아래에 추억에 남는 사진들을 무작위로 조금 갖다 놓으며 서부 이야기를

일단 접습니다---.

 

  

 

 

 

 

 

 

              (내 친구 집의 정원에 자리를 튼 호박이 인상적입니다.)

 

 

 

 

 

 

 

                   (LA에서 문인들과 만나 담소를 나눈 식당)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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