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제에서 그의 e-메일에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자 처음 그는 흠칫하였다.
얼마전 부터 그의 아내는 집안에서 제일 큰 PDP 모니터에 인터넷을 매달고
모든 조작은 TV 볼때 쓰는 리모콘 하나로 통합을 해 놓았다.
그가 늦게 들어 온 어느날의 낮 동안에 모두 일어난 인터넷 환경의 혁명, 아니 쿠데타
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사는 아파트 동네의 인터넷 가전 업체가 강력한 판촉을 한 결과였고
그게 또 새로운 유행이라고도 하였다.
"이게 뭐야, 숨통 막히게---. 당신은 프라이버시도 없소?"
그가 모처럼 소리를 질렀다.
전후 사정을 몰랐기도 하였지만 알았더라도 소리를 친 감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프라이버시 추구가 고작 그런 졸업여행 사건이었다면 난 그런 프라이버시
인정 못해요.
그리고 또 내 집구석이나 내 컴퓨터 속에는 프라이버시고 깨묵이고 그런건 없어요.
아직도 뭐 걸리고 집히는게 있어요?"
"맙소사. 나와 그 여학생, 정애 이야기는 완전히 날조라는게 판명나지 않았소. 그래서
내 신분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내가 지금 숨이 막힌다는건---."
"숨 막힐거 없어요. 프라이버시 찾아서 서제에 가 보세요."
그가 서제에 들어가보니 까만색 테를 두른 작은 모니터가 어린이 주먹처럼 앙징스런
모뎀인지 CPU 박스 같은걸 하나 따로 꿰차고서 책상 위에 앉아있었다.
"광 케이블 인터넷에 두개씩이나 가입했소? 돈도 많네---."
그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 자락을 깔아서 툭쳐보았다.
"안심하세요. 돈 더 안들어요. 그게 분배기랍니다. 하나로 가입하고 둘로
나누어 쓴대요.
그리고 벌벌 떨지도 말아요. 여기 메인하고 관계없이 각각 따로 나온대요.
하지만 조심도 하라구요. 예전 그런 애 한테서 연락이 오면 내가 당장 여기
응접실에서 모니터하고 체크 할 수 있게 검색어를 깔아두었어요.
내 마지막 관심의 표현이니 감사하게 여기세요."
마지막 말들은 물론 터무니 없는 공갈이었겠지만 그는 서제의 컴퓨터를 켤
때마다 무언가 기분이 캥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캥기고 뭐고 할 이유는 애당초 없었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그 때 그 일도 모두 일방적인 허언망상 같은 일이었고 나중에
다 확인이 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터넷 주소는 잘 나가는 영어 학원의 대표 주소가 되어서 PR을 겸한
Q&A 때문에라도 정말 만인이 공유하며 들락거리고 있었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거기 담아 놓을지, 혹은 경쟁이 되는 학원이나 개인이 무슨
트릭을 쓰고 음해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유명한 의학 영어 학원의 원장인 그가 가정불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 업계 공지의 사실이었다.
이 바닥이 그렇게 치사하였다.
불편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는 정애가 보낸 e-메일의 내용을 클릭하였다.
SOS 같은 내용이 거기에 덜렁 나뒹굴고 있었다.
카트리나 때문에 그녀가 먹고 살며 장사도 하는 프렌치 쿼터 카페가 침수되어
길거리에 나앉아야할 형편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천벌을 받는가 봐요. 선생님을 너무 못살게 굴어서."
그녀가 천재지변, 재난의 개요를 하소연하더니 그런 한탄의 말을 끝에 달았다.
"자책하지말어, 좋은 점도 있었어. 정애 때문에 내 삶은 더 풍요로워졌어.
내가 양동이 갖고 물푸러 한번 찾아갈께."
그의 답변이었다.
답변을 툭 쳐 올리고나자 그는 순간 부끄러움과 후회의 감정이 생겼다.
그래, 너 배 교수, 아니 이제는 배 원장!
그녀가 다 망했다는데, 자신은 풍요로워졌다고 여유를 부리고 으스대다니,
돈이야 마음이야?
그래 '둘 다'라고 치자.
이게 애원하는 힘없는 여인에 대한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란 말인가.
노림수가 있었잖아.
그가 답글을 싣고 떠나버린 텅빈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문하였다.
그가 자문에 대한 답을 머리속에서 채 이끌어내기도 전에 그녀의 답글이
왔다.
미국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뉴올리언즈의 '프렌치 마켓'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프렌치 쿼터가 아니고?"
그의 질문이었다.
"프렌치 마켓! 오시면 언제라도 꼭 만나게 되요."
프렌치 쿼터 내에 프렌치 마켓이라는 오래된 시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카트리나로 재산을 날린 사람들의 일부에게 오랜 전통의 벼룩 시장 같은 것을
떼주어서 밥이나마 먹게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답글은 짧았지만 흐름이 모두 담겨있었다.
물을 푸러 가겠다고 한 기약없는 약속이 두해가 지나갔다.
잠깐 사이였다.
간혹 먹고 살 만큼 이제 자리를 잡았다는 메일이 그녀로부터 왔지만 그의 답신은
어정쩡했다.
중년을 넘긴 사람이 시쳇말로 연애 편지를 쓰고 앉았기에는 정념이나 필력이
딸렸고, 그 보다는 얼른 한번 가서 그녀를 직접 만나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는한
무어라 주절주절 글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이 순 사기꾼 수법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른 비행기 표를 사서 남부로 훌쩍 떠난다는 것이 무역업도 아니고
판박이 지식 장사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기회이자 용단이었다.
그러다가 그 기회가 마침내 온듯 싶었다.
대학 후배이자 배 교수가 하는 영어 학원의 유명 강사 하나가 학원을 인수,
운영하여서 이익금은 매달 똑 같이 나누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물론 상당한 금액의 인수 자금을 권리금 조로 내놓는다는 식이었다.
아내와 변변하게 의논도 하지않고 금방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데에는 이제
은퇴를 생각할만한 그의 나이 라던가,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정애와의
물푸기 약속도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우선 가서 보리라. 그래 물을 푸는 심정으로 우선 가서 보리라."
학원의 인수 인계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이를 생각했는지 그의 아내도 학원을 넘기는 데에 별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아내는 성정애의 근래 소식에 깜깜이었다.
마침 신문에는 IMF 이래로 끊어졌던 델타 항공의 미국 남부 직항의 운항 재개
뉴스도 나왔다.
"카트리나가 휩쓴 지역을 한번 구경이나 가볼까?"
그가 은근히 제안을 하자 물구경, 불구경 만한게 있느냐고 속물 부인이 더
나섰다.
악연인지 가연(佳緣)인지 잊을 수 없는 여인을 만나러 떠나는 길에도 그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리로 따지더라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불행중 다행도 아니고 금상 첨화는 더더욱 아니지만 어쨌든 아내를 동반하여
정애를 찾아오는 길에 우연히 함께한 일곱명의 일행은 결과적으로 누가 뽑아다
놓으려 하여도 불가능한 수준의 좋은 동반자들이었다.
(계속)
저널리즘의 선정성 때문에 등장 인물들을 조금 개명하였습니다.
여러차례 댓글에서 밝혔지만 이번 초고는 미리 써 놓았던 것인데 기이하게도
등장 인물들의 이름들이 시류를 타게되었군요---.
동의하기 어려운 현실계 이야기들의 향방과 거리를 두고자 개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