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활화산 풍경 (문학 마을 겨울호에서)

원평재 2009. 2. 17. 22:35

  

 

활화산 풍경

 

그가 그 불편한 남녀를 의식하게 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저 두 남녀 좀 보세요. 저렇게 다정할 수가 없는데 당신은 항상 이게 뭐죠?. 부끄러워요.

부부라는 관계가---."

평소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은 그의 강퍅한 아내가 이번에는 어떤 부부 관광객이 너무나도

다정하게 다니는 것을 닷새 여행의 사흘이 지나고서야 발견해내고 그에게 새로운 불만꺼리를

찾았다는 듯이 강도 놓은 투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이타'-'벳부'-'하우스텐보스'-'아소 활화산'-'구마모토 성'-'후쿠오카' 등으로 연결된 단체 투어

여정이 올적 갈 적을 빼면 사흘 동안에 너무나 촘촘하게 짜여져서 온천지대를 다니면서도 정작

온천물은 손바닥에 담아 손등에 끼얹기도 바쁜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광복절 휴일을 낀 탓인지 인천 공항을 떠나며 일행이 된 여행 단체 인원은 마흔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결국 일행 간에 인사도 못 나누는 대규모 ‘묻지 마’ 여행단이 순식간에 형성된 셈이었다.

양력으로 8월 15일, 한국의 광복절은 일본에서는 추석 명절이었다. 이래저래 관광지들은 난리가

났다.

팔월이라면 더위는 여기나 거기나 피치 못할 팔자로 치더라도 비는 정상적인 상태라면 소나기 일진만

피하면 되련만 한국은 이제 시도 때도 없는 장마철이 새로 시작된 꼴이었고,

일본도 매화 꽃 지기 전후의 6월 말 우계(雨季), 마이우(梅雨)가 8월 한중간으로 옮겨 왔는지

닷새 여행은 내내 빗줄기만 바라보는 난장의 연속이 되었다.

 

"기후 변화가 장난이 아니네---."

그가 짜증을 그런 식으로 비워내었더니 아내가 또 성질을 부렸다.

"꼴난 해외여행을 인생 꼴찌로 하니 하늘이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날씨가 그렇지 않아도 편협한 아내의 성질을 돋운 것은 그러니까 그에게는 불행 중 불행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나타나서 정상 수준을 넘어선 어떤 두 남녀의 사랑 무드와 포즈라니---,

여행은 최악의 경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급 공무원으로 정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해외여행이란 길지 않은 한 두 번의 연수와

짧은 출장 몇 번이 평생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광복절 휴일과 주말을 빌미로 만든 닷새간의

일본 여행은 처음부터 너무 촉박한 일정을 탓하는 아내의 투정으로 얼룩졌었다.

그래도 요즈음 부쩍 심한 아내와의 불화를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그의 노력이 다소는 효험을 발휘

하리라는 기대와 어쨌든 이 여행도 이제 서서히 후반부로 접어들어서 그나마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그의 가슴에 새겨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정한 한 쌍의 바퀴벌레가 등장하여서 바야흐로 위기냐

기회냐로 그에게 마지막 시련을 안겨주고 있었다.

"에이 바퀴벌레들!"

그가 거의 들릴 지경으로 혀를 찼다.

 

마침 공항에서 면세로 디지털 카메라를 하나 사서 재빨리 맨 앞자리를 지정좌석처럼 확보하여

하루 이틀은 어른 장난감처럼 만지고 놀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여행 일자로는

사흘째 되던 날 가이드가 느닷없이 첫 번 째 자리에 자기 백을 두개나 늘어놓고는 그에게는

그 다음 자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가 무슨 항의를 하려는데 "거긴 원래 가이드 자리라니까요.", 라고 아내가 그에게 내쏘는

것이었다.

내우외환이라기보다 외환내우였다.

분을 삭이고 있는 그의 앞자리에 그 커플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조차도 불분명한 한 쌍의 그 다정한 커플이 나타나서

가이드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맨 앞자리에 좌정을 하지 않는가. 가이드는 운전석 옆의 낮고 작은

의자를 펴서 천연덕스럽게 꼬리를 내리는 것처럼 하고 착석을 하였다.

 

그가 무슨 항의를 할려는 찰라 앞의 남녀들은 뒷자리의 그들에게 깎듯이 목례를 보내고는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 맛있게 보이는 명과 한 케이스를 주는 것이 아닌가.

꽤 비싸게 보이는 명과도 명과려니와 그들의 싹싹한 태도가 이미 그의 전의를 상실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빛에 무언가 신 끼 같은 것이 서려있어서도 그는 섬찟하여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선한 눈빛 속의 검은 눈동자는 사람을 찌르듯 기이한 총기를 발하다가 이내 먹물이 맹물에

풀리듯이 스물 스물 풀어져 내리면서 사람을 그 큰 동공 속으로 빨아드리는듯, 신묘한 변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화난 얼굴에서 맥없이 웃는 낯으로 표정 변화를 다 하기도 전에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거의

입을 맞추는 정도로까지 얼굴을 맞대었다.

그의 아내가 노골적으로 더욱 심통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는데 대상은 물론 다정한

그들이 아니라 그녀의 멋대가리 없는 남편이었다.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때부터였다.

그날 그들이 방문한 곳은 하우스텐보스였다. 화란의 17세기 거리를 재현했다는 그 마을은 일본 글자만

아니라면 서양 땅이 따로 없다는 식이었다.

하급 공무원인 그가 유럽 구경을 직접 할 기회는 없었지만 미적 취향이 강해서 인터넷에 떠다니는

유럽의 풍광을 평소 익히 섭렵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근무지가 광화문의 정부 종합청사이다 보니 인근 인사동, 삼청동, 소격동의 갤러리는

물론이고 세종 문화 회관 등지에서 자주 열리는 '밀레'나 '세잔느' 특별전에도 어지간하면 빠지지 않고

둘러보며 낮은 직급의 처지가 갖는 비애를 아름다움 속에서 적절히 박멸하고 있었다.

 

한편 어지간한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와서 용케 상호 신용금고, 그러니까 지금의 저축은행에 들어가

노처녀가 되기까지 근속하다가 중매로 그와 결혼한 아내는 처음 얼마간은 그와 미술관을 동행하기도

했으나, 그런 미적 순례가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귀중한 시간을 별로 경제성이 없는 데에 탕진하는 남편을 적당히 능멸하면서 자신의 시간은

대체로 집에서 주식의 '데이 트레이딩'과 신종 펀드에 발 빠르게 투자를 하여 적당히 이익을 챙기느라

두문불출하는 편이었다.

아니 두문불출하는 생활태도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 하나로 만족한 연후에 그 아이 키우기에도 여자가 집 밖을 나돌기에는 또한 벅찬 일이었겠지만,

그 보다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남편의 지위와 직위를 질문 받는 일에 치가 떨린다고 그녀는 가끔

남편에게 하소연처럼 또한 투정처럼 말해왔었다.

 

어쨌든 주식 시장, 개미 군단의 일원인 그녀는 그래도 대략 그런 방면에서는 흐름을 타는 편이어서

그녀가 회사를 퇴직할 때에 마련해 나온 돈을 종자돈으로 자산을 꽤 불린 듯하였으나 그는 관심도

간섭도 하지 않았다.

IMF 때에도 공격적인 투자 전략으로 나간 것이 큰 이득을 보았고 초기 펀드 마켓에 진출해서도 몇 배의

대박을 터뜨렸지만 살고 있는 신사동의 집 문제 때문에 그녀는 항상 빈곤 의식에 사로잡혔다.

남편이 광화문의 정부 종합청사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강북의 신사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더니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강남의 신사동 아파트는 그들이 살고 있는 강북의 신사동 집값보다 열배도

더 뛰어버린 것이었다.

 

객장 출입보다는 주로 인터넷에 매달리는 개미군단의 속성이 아니랄까봐서 이제 그녀는 실생활의

대부분을 개미처럼 은둔하는 삶에 더욱 집착하였다.

물론 때때로 불같이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황혼 이혼이라는

사회 현상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하나 밖에 없는 그 아들이 금년 봄, 서울 대학교의 사회계열에 합격해 준 것은 이 위태로운

관계의 부부에게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행운이자 구원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일본 여행이 이루어진 것도 근본을 따져보면 그 합격의 여파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서울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갑자기 동창회나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피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마침 남편이 연휴 여행을 제안하여서 못이기는 체 마침내 사람들과의 접촉을 꿈 꾸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 대학교에 아들을 집어넣은 장한 엄마 자랑을 할 기회는 여행길에서 요원한데 짧은 여정은

이제 반을 넘어서 대단원을 향하여 치달리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인가 하필이면 그 금슬 좋은 바퀴벌레 커플을 만날게 또 무어람---.

그녀는 분통이 터졌다.

"여기 하우스텐보스는 10 여 년 전에 서유럽, 특히 화란의 중세 모습을 정확히 재현해서 만들어 놓은 현

대 일본의 역작이었습니다"

리무진으로 움직이는 이동 간에는 안면방해를 피하겠다는 듯이 침묵을 지키던 가이드가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신명이 나서 설명을 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우선 맨 앞의 금슬 좋은 커플들은 꼭 껴안고 자신들의 사랑에 탐닉해 있었고 두 번 째 좌석의 그와 아내는

불만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으며 야간에만 부지런한 다른 관광객들도 주간에는 대부분 졸고 있는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하우스텐보스의 하루 일정은 사실 개개인의 자유 시간이었고 들어올 때 받은 티킷은 이 큰

경내에 산재한 시설들의 어느 곳에나 입장이 되는 프리패스 권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흥미를 유발하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아내는 얼른 쇼핑 몰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면서 그에게 함께 가든지 따로 거닐던지 마음대로 하라며 사라져갔다.

물론 아들에게 줄 선물을 사겠다는 큰 명제가 강박관념처럼 있었기 때문이었지 명품을 기웃거릴 처지나

마음은 아니었다.

점심 행사는 두 시간쯤 후에 하우스텐보스 타워가 있는 건물의 1층 식당가에서 모이면 된다는 가이드의

안내가 전제되었다.

 

그는 안내책자에 나온 미술관을 찾기로 하였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근처에 그 금슬 좋은 커플의

행보가 동행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먼저 알아보고 미소 지으며 미술관으로 간다면 함께 가자고 하였다.

"반갑습니다만 이거 원앙 같은 커플을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꼴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동의하였다.

"아닙니다. 저희들처럼 미술관 쪽이시군요. 그림을 사랑하시는 딜레탄트와 동행이라 다행스럽습니다."

남자가 선한 눈빛으로 응대하였다. 그 옆의 여인도 밝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들의 눈동자는 이 순간

너무나 확 풀어져있어서 그는 조금 당황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은 팔짱을 깊이 끼고 있었다.

"참 부럽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 다정한 부부가 있나요? 우리 부부는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원수지간 같은데---. 허허허."

"원래 부부는 전생에 원수였다잖아요, 선생님."

선한 남자가 부드럽게 그의 말에 관심과 동감을 표하여주었다.

그런 말을 할 때 보니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찾아서 조여드는 모양새를 차렸다.

동공이 풀어지는 것은 주로 자기들끼리 시선을 나눌 때만 그런 듯싶었다.

 

"어머나, 밀레 특별전인대요---."

여인이 소리쳤다.

하우스텐보스의 큰 미술관에서는 마침 밀레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미술관의 한쪽 벽면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전부 생화로 크게 모자이크 처리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멀리서 보기에는 꼭 실제의 그림 같기도 하였다.

미술관으로 가는 작은 길옆에는 역시 밀레 전에 관한 포스터가 붙은 작은 입간판이 서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까 걱정이라는 듯이 입간판 다리 쪽에는 감자나 고구마를 넣는 부대자루

같은 것이 놓여있어서 받침대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아, 적절하게도 감자부대를 내놓았군요. 일본 사람들의 센스라니---."

그가 무의식중에 탄성을 발했다. 무언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는 반응이었다.

"어머나, 어떻게 저게 감자부대인 줄 아세요?"

착한 모습의 그 여인이 동감이라는 듯이 이제는 타는 듯한 눈빛이 되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이 정황에서는 저게 감자부대가 틀림없이 맞지요, 허허허. 거 왜 저 화가의 ‘만종’ 그림에 있는

소쿠리 같은 데에 감자가 담겨 있잖아요. 원래 그림에는 거기에 영아의 시신이 담겨있었다고도

하지요.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아주 높을 때니까 그런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죽은 아이를 버리려고 기도를 하고 있다는 배경 설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아무래도 말썽을 우려한 지인들의 충고로 밀레는 원래 그림 위에다가 감자 무더기를

덧칠하여 그렸다던가요. 그게 그림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최근 확인이 되었다지요,

그러니 ‘밀레’하면 감자 부대로 상상력을 확대하여 끌고 나가야 되는 게 아닐까요, 허허허. 이거

쓸데없이 아는 체하여 죄송합니다만---."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도 그림을 좋아해서요---. 그 ‘만종’에 들어있는 에피소드랄까, 그 기이한

이야기를 읽고 들은 기억이 이제 나는군요---. 선생님, 정말 저희들과 말씀이 통하는 분이세요,

호호호."

여인이 이제는 웃기까지 하였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가 기묘하게 다시 풀어졌다.

그때 마침 알프스 요들송이 미술관 옆의 지붕이 천막으로 된 큰 건물에서 흘러나왔다.

생맥주인 ‘옥토버’와 ‘알펜 호프’를 판다는 깃발이 때맞춘 바람에 일렁거렸다.

아침 가랑비 다음에 하늘은 회색빛이었는데, 바람이 다시 비를 불러오는 전조인지는 예측 불허의

날씨였다.

 

"선생님, 여기까지 와서 아까운 시간을 밀레에게 헌정하지 마시고 저기서 생맥주로 목이나 축이면

어떨까요?"

눈동자가 여인과 함께 다시 회색으로 풀어진 남자의 말은 간청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아, 저도 그런 생각이 간절합니다. 이 후텁한 날씨에 목이나 추겨야지요. 다만 다정스러운 두 분께

방해나 되지 않을는지요?"

"아뇨. 진심입니다. 밀레의 감자 부대를 적시해 내시는 예술애호가, 딜레탄트라고 하나요.

그런 분이시라면 함께 하는 저희가 정말 영광이지요---."

남자의 가녀린 목소리가 다소 떨리면서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저희가 또 버스의 앞좌석도 뺐었는걸요---."

부창부수였다.

여인의 목소리가 예뻤으나 지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디 알지 못하는 데에서 흘러나오는 듯 한

유현함이 있어서 이런 데만 아니라면 소름이 끼칠 수도 있으려니 싶었다.

 

피처에 담아온 진한 노랑 색, 옥토버 생맥주가 차가워서 그런 생각이 그에게 문득 들었는지도

몰랐다.

"관광지에서 부부와 연인 사이를 구분하는 법이 있다더구만요. 둘이 너무 다정하면 그건 부부가

아니라 연인 관계이고, 덮어놓고 싸우면 부부라던가요, 허허허."

그가 분위기를 잡는다고 농담을 던졌는데 끝이 실없어져서 혼자 조금 크게 웃었다.

"네, 저희는 부부가 아니라 연인이랍니다. 바로 보셨네요. 호호호."

여자가 또 동공을 풀어서 애매한 눈동자를 하고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여자의 갑작스러운

실토에 그가 난감해져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가 얼른 그를 구해주었다.

"저희 둘이 가깝다는 표현을 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저희를 부부로 보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보입니다. 저도 두 분과 좀 더 가깝게 지내자고 한 농담이 그만---."

"네, 그렇지만 정식 부부는 사실 아니구요."

남자가 또 병 주고 약주는 식의, 아니 그 반대 어법이랄까, 하여간 애매한 말로 그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이라도 하였다는듯이 말을 복잡하게 하였다.

뜻이 서로 이제 막 통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골탕을 먹이려고 할리는 만무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가

그만큼 복잡 미묘한 모양이었다.

 

“자, 우리의 친교를 위하여 건배!"

나이가 한참 위인 그가 건배사를 외쳤고 그들은 차가운 맥주잔을 힘껏 부딛쳤다.

"저희는 압구정동에 있는 어떤 유치원을 다니면서부터 동기 동창이었답니다. 중고등학교도

공학으로 같이 다녔구요."

남자가 엉거주춤한 말씨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래요? 나는 신사동 신사라오. 강북의 신사동 말이오."

그가 조금 얼굴을 굳히면서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무슨 부자놀음을 하는가

싶어서 공연히 억하심정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 생면부지의 짧은 여행 판에 압구정동이 뭐야, 나는 아들이 서울대학 들어간 것도 시방 자랑하지

않는데---,

무슨 그런 심정도 그에게 불쑥 생겼다.

"아이구, 아닙니다. 선생님! 뭐 그런 게 아니구요. 저는 지금 경기도 어느 지방에서 셋방살이랍니다.

그러니 오해는 마시구요. 이 사람만 지금 그냥 압구정동에 살지요.

저희 두사람의 인연이 그렇다는 겁니다. 생년월일도 똑 같아요. 뭐 그런 인연으로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를 똑 같이 나왔는데 저희 아버님이 사업을 실패하셔서 저는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압구정동하고는 인연을 끊었지요."

 

그러고 보니 나이치고는 퍽 여리고 순진하게 보이는 그 남자는 대화의 추이가 꼬이면서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여자도 별로 남자의 말을 제지하는 자세는 아니고 그저 안타까운 듯이 꼿꼿해진 눈동자의 산만한

시선을 두 남자에게 번갈아 보낼 따름이었다.

"여봇! 대낮부터 무슨 술 타령이세욧!"

어느 틈에 찾아왔는지 그의 아내가 맥주 테이블 옆에 불쑥 나타나서 그를 힐난하였다.

"아니, 당신은 쇼핑 몰로 갔잖아?"

"카드를 당신이 갖고 있잖아요. 사람이 너무 쪼짠---,"

그러다가 그녀는 차마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금슬 좋은 두 사람을 의식한 듯싶었다.

"여보, 내가 빼앗은 것도 아니고 당신이 나에게 보관시킨 거요."

그가 항변하였다.

"그런 거 쪼짠하게 잘 맡으니까 내가 맡겼지요. 가슴이 넓으면 내가 갖고 다니지 맡겼겠어요?

호호호."

말을 하다 보니 너무했다 싶은지 그녀도 오랜만에 웃음소리를 내었다.

 

"카드 여기 있으니 이 술값은 내가 긁겠소이다. 우리 숙소가 이 하우스텐보스 안에 있는 ‘덴하그’인지

뭔지 하는 호텔로 되어있던데 저녁 먹고 나서 지금 못다 한 대화는 그때 합시다."

"네, 저희도 가이드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같은 숙소에 머물겁니다---."

남자가 약간 당황하며 말을 받았고 두 가족은 일단 헤어졌다.

"여보, 저 사람들 우리 일행이 아닌 모양이지요?"

아내가 그에게 금방 물었다. 소리가 아무래도 들릴만한 거리였다.

"그래, 뭐. 중간에 들어온 모양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데 자리를 빼앗고---. 가이드한테 따져야지."

"모른 체 합시다. 그게 다 살아가며 쌓는 공덕이라오."

"아이구, 생불이라던가 하여간 부처님 나셨네요. 술값만 뒤집어쓰고---."

"쉿!"

그와 아내가 좀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서 있는데, 앉아있던 여자가 어느 틈에 카운터로 달려가서 카드

결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두 사람에게 미소만 지었는데 눈동자가 모아졌고 힘이 들어있었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니 그녀의 얼굴은 또 다른 표정이었고 원래 아름다운 얼굴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아이, 기분나뻐."

그의 아내가 끝내 한마디를 던지는 것으로 그 곳에서의 해프닝은 일단 막을 내렸다.

 

저녁이 왔다.

그의 아내는 낮의 쇼핑에 발품을 파느라 피곤하여 일찍 자리에 누웠고 그와 미지의 두 남녀는 캔 맥주를

한 박스 사서 바닷가 선창에 앉았다.

외해에서는 중형의 배들이 조향등과 항적등을 앞뒤로 켜고서 해무 속을 느릿느릿 왕래하였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구, 무슨---. 마누라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내가 너무 미안했어요."

"아뇨, 제 말은 갑작스레 제 일신상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냈던 것 말입니다."

"아,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가 썰렁한 유머를 꺼내다가 발전이 된 것이지요."

"아닙니다. 세상의 누군가에게 우리 이야기를 꼭 좀 하고 싶었거든요. 마침 기회가 온 것 같았는데

중간에 좀 해프닝, 아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이 있어서 중단이 되었군요."

"아, 뭐 내키지 않으시면 다시하실 필요는 없구요. 말 빚을 진 것도 아니고 대체로 또 자기 이야기

하고는 나중에 후회하게 되잖아요---."

"네, 감사합니다. 다만 선생님을 뵈면서 무언가 마음이 당겨서 이런 인연이 되었고 또 선창가에

나와서 자기 고백이랄까, 독백을 나누고도 싶네요. 이 사람, 그러니까 제 연인도 같은 마음이랍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였다.

어릴 때부터 생년월일이 같다는 우연 말고도 그들은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필연

때문에 소꿉장난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서는 당연히 부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두 사람은 신기하게도 눈동자가 풀어졌다 모아졌다 하는 현상도 비슷하였는데 사실 그런 현상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수많은 일들의 한 단면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동네 친구들이나 학교 친구들도 이런 예상과 기대를 당연시하였다.

사고가 난 것은 남자의 부모 쪽이었다. 그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쯤 남자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사업에 실패를 하고 그 충격과 홧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세상사에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에 다름 아닐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더 처참한 이야기가 가까운 미래로 기다리고 있었다.

 

압구정동을 떠난 그와 홀로된 어머니는 안양 근처의 서민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어머니가 8층 발코니에서 뛰어내려버린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고 처리하는 과정 모두는 사춘기에 접어든 그 남자의 몫이었으며 이 일이 끝날 때 쯤

그는 트로마 현상 속에 빠져들었다.

계속되는 불운 속에서 정신적 이상증세까지 겪으며 그는 차마 그녀를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었다.

여자의 부모가 그런 일을 용납할리도 없었다.

결국 결혼 적령기가 된 그녀로 부터 그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여자는 얼마 후 시집을 갔다.

 

세월은 물결처럼 흘러갔다고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애는 고여서 썩은 물 같았다.

남자는 두어 차례 결혼과 이혼을 무명의 행사처럼 치르고 지금도 또 어떤 불행한 여인과 별거상태

였으며 생업도 제대로 일구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파탄된 삶 가운데에 있었다.

여자는 시집을 가서도 내내 압구정동에서 살게 되었으나, 남편은 거의 홍콩에서 다른 살림을 살고

있었다.

압구정동의 초등학교 선배가 내내 눈독을 들이다가 남자가 사라지자 적극적으로 나와서 납치 혼처럼

혼례를 치렀으나 결혼 생활은 곧장 파탄이었다.

여자가 결혼은 하였으나 남녀 간의 성생활을 도무지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납치 비슷한 극적인 사건까지 저지르면서 그녀를 데려온 남편은 이런 상태가 떠나간 남자와

자기 아내가 혼전 관계를 맺었고 이를 잊지 못하여서 그녀가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지레 짐작하였다.

따라서 미필적 고의로 부부 관계를 해태한다는 분노어린 주장을 펴고, 당장 쫓아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의 주장도 반은 맞는 말이었다.

자기의 남자가 사라진 이후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는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할 의욕도 노력도 모두

방기한 상태가 되었다.

다만 그 남자와 혼전 성관계가 있었다는 추측성 주장은 억지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아들을

하나 얻었다.

 

"쌀뜨물이 튀어서 생겼나?!"

처음 친자관계를 부정하듯이 나가던 남편이 커가면서 워낙 자신의 용모와 닮은 자식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인정하던 되먹지않은 말 솜씨였다.

그 쌀뜨물이 튀어서 생긴 아들은 지금 홍콩에 있는 어떤 기숙학교에 조기 유학을 떠나서 모자 상봉은

잘해야 일 년에 한번쯤이었다.

우리말과 영어와 중국어를 다 잘 배울 수 있다는 희망은 마침내 세 나라 말을 다 잘 못하는 쪽으로 판별이

나고 있는 가운데 아이는 다행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 남자와 여자가 다시 만난 건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훨씬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였다.

두 사람 모두 초 중등학교의 그 흔한 동기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학교 주소록에도 남자 주소는 항상

불명으로 남아있어서 그들이 공식 루트로 연결될 기회는 없었는데, 어느 날 압구정동의 백화점에 납품 일이

있어서 나온 남자와 쇼핑 몰에 나온 여자가 문득 조우하였다.

헤어진 지 이십년을 곧 바라보는 해에 발생한 우연이자, 어쩌면 간절한 마음이 빚은 필연의 결과였다.

남자가 압구정동의 백화점에 납품 일을 맡았다는 사연이 그녀처럼 압구정 동네에 붙박이로 살고 있는

동기들 사이에 조용히 떠돌더니 마침내 그녀의 귀에도 들어온 것이다.

헤어숍에서의 귀동냥이었으나 그녀를 아는 친구들이 의도적으로 떠벌려준 소리인지도 몰랐다.

소문이 귀에 들어간 이래로 그녀는 새벽이나 늦은 저녁에 백화점으로 화물이 드나드는 뒷문 쪽을

부지런히도 어슬렁 거렸다.

그러다가 만났다면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녀는 사치스러워서 그런 생각은 더 이상 가늠하지도 않았다.

 

십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런 세월을 훨씬 지나치고도 두 사람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밖에서 차 한 잔을 나눌 겨를도 없이 두 사람은 당장 여자의 집으로 왔다. 얼마나 사연이 많았으면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불가능했고 불필요했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한없이, 한없이 울기만 했다.

그리고 때늦은 밥을 같이 지어먹고 같이 이를 닦고 목욕만은 크고 작은 욕실에서 따로 하였다.

타월로 몸을 닦을 때는 서로 도와주었다. 아직도 헹궈낸 세제의 라벤더 향기가 상큼하게 남아있는

보송보송한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서 꿈에도 그리던 신방을 마침내 차린 듯 두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였다.

 

처음 그들은 조심스럽게 탐색을 하는 이름 모를 맹수의 조련사처럼 서로를 가만히 벗은 몸으로

쓰다듬어만 주다가 마침내 자신들이 포효하는 맹수가 되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사람의 몸은 신기하고 신비하였다. 그동안 남녀 간의 관계라는 것이 두렵고 더럽고 그리하여

미필적 고의로 해태하여 마지않았던 일체의 몸동작이 마치 어느 순간 꿈속에서라도 이미 조련되었다는 듯,

사지와 오장육부까지 총동원하여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땀을 철철 흘리며, 아니 온 몸의 겉과 속에 끝내 알아 낼 수도 없이 무한히 발달된 샘과 선(腺)을 온통 다

열어서 활화산의 수증기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그들은 사랑의 행위를 나누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서적과 그림과 온갖 미디어를 통하여서 남녀가 사랑을 하는 그 격렬한 순간의

모든 동작과 호흡을 보고 들어왔으나 한 번도 공감하거나 승인치 못했던 그 감질나고 무지이고 의혹의

대상이었던 정서가 폭풍을 맞고 부서져 날아가는 허술한 지붕처럼 그들로 부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그날부터 정말 석달 열흘간을, 아니 그 보다도 더 많은 날들을 나날이 먹고 자고 또 사랑하며

지냈다.

아니 때때로 토끼 굴을 통하여 나가서 한강 둔치를 거닐며, 혹은 명품만 모아 파는 백화점을 일없이

들락거리며, 길 건너의 갤러리와 옥션과 카페와 와인 바와 국시집과 또 노래방에도 진출하여 마시고

놀아보았으며 거대 규모의 교회와 성당과 도심의 사찰도 들어가 보았다.

어느 곳 하나 구원이 아닌 곳은 없었다. 모두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잡고 들어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어느 날은 '점집'에도 들어가 보았다.

여자는 항상 최고급 정장이었고 남자도 여자의 집에 있는 명품 남성용 캐주얼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심심하여 문득 들어가 본 '점집'이었다.

"에이, 둘이 잘 차려입었지만 거지꼴이야. 내 눈에는 다 보여!"

무녀가 욕설보다 겨우 한 단계 덜한 말을 퉁명하게 던지자, 마음씨 여린 그녀가 페라가모 핸드백을 열고

복채를 다시 더 두둑이 들이밀었다.

"그래, 이 여자가 마음이 고와서 내가 액운을 꼭 떼어 내버려주고 말거야. 내가 그렇게 확실히 조치해

줄게. 지금 당장 나가서 현찰과 달러를 마련해. 그리고 멀리 떠날 준비들 하라고!"

신 내림을 지독히 심하게 받아서 아주 영험하다는 무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앉았다.

두 사람은 머쓱한 기분으로 그 곳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한국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혼 소송을 제기해 놓은 여자의 남편 쪽 사람들이 어느 날 집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에게 법적 문제가 제기될 소지는 없었다. 마음이 뜬 부부의 일탈에 대하여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실정법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면서도 이제는 어느새 국가가 법으로 관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통감하고 손을 떼고 있는 것이 그 동안의 이 나라 사법 변천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그것은 조국을 버린다는 개념과는 또 다른 상태였고 어쩌면

이 세상을 외면하겠다는 마음의 첫 번 째 행위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우선 비자 면제가 되어있는 일본으로 얼마 전에 떠나왔다고 하였다.

며칠 후면 비자가 상호 면제된 남미 쪽, 특히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 보았으면 싶다는 말도 그들은 긴

고백의 마무리처럼 하였다.

"선생님에게 귀찮게 스리 왜 이런 말씀을 다 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털어 놓고나니 정말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렇군요.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나도 참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부부 관계가 하도

심상치 않고해서---."

"그래도 용케 평생을 잘 지내오셨잖아요. 뭐 그렇다고 이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으로

오해하시진 마시구요."

이번에는 여자가 곱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단아하였다.

밤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동자도 아마 편하게 풀어져있을 것이었다.

"평생을 참고 살아왔다고 죽는 날 까지 어디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즈음 황혼 이혼,

연금 이혼, 뭐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이 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광범위한 사회현상이 되었다지요. 생각해보면 평생을 함께 살아왔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지내란 법은 아닌 것도 같군요. 아, 이건 우리 마누라의 이야기입니다만, 허허허."

그들은 아주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부인은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그랬는지 이미 곯아떨어져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그 바로미터였다.

 

다음날 아침은 마침내 여정의 끝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이지만 닷새째는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기에 이날이 실질적인 마지막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구마모도 성을 보고 오후에 활화산 아소 분화구를 보는 것으로 이날도 만만치 않은 하루였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이었다. 그래도 비를 뿌리는 구름이 햇볕을 가려서 더위를 한결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웅본(熊本)이라고 써서 구마모도로 읽는 이 지명만 보아도 한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곰을 토템으로 하는 나라인데 이것이 일본으로 와서 곰, 고마, 구마, 가마 등으로 변했거든요.

가마 부(釜)라는 글자나 검을 흑(黑)자가 유독 많은 것도 그 탓이지요. 곰이 가마와 검다로 변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개마고원도 같은 맥락이랍니다."

가이드의 해설이 수준 높았고 유익했으나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맨 앞자리의 남녀도 무엇이 피곤한지 몹시 졸고 있었다.

그러나 구마모도 성을 지나고 나서부터는 남들과 달리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좌우의 산천을 열심히

감상하고 있었다.

여자도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졸던 자세를 바로 세우고 멀리 보이는 아소 산에 시선을 집중하는

눈치였다.

 

아소 화산은 멀리서 부터 벌써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오랜 옛날 함께 태어난 다섯 봉우리 중에서도

중간에 있는 중악(中岳)은 아직도 어마어마하게 유황과 수증기로 된 화산 연기를 뿜어내어서 오랜 기간

사람들의 관심을 압도적으로 끌어온 자신의 자태가 허튼 역사가 아니었음을 맹수의 포효처럼 웅변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칼데라를 가진 복식화산, 저 아소 산은 '불의 땅'인 구마모토의 상징으로 광활한 녹지평원,

호수, 산림, 온천으로 구성된 국립공원입니다.

화구 외곽을 이루는 외륜산의 규모는 남북길이 24km, 동서길이 19km, 둘레 128km로 면적이 무려

여의도의 45배에 이릅니다.

이 안에는 5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최고봉의 높이는 해발 1,592미터 입니다.

저기 연기를 내뿜는 산은 해발 1,216m인 나카다케(中岳)로서 지금도 활동 중이며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분연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매캐한 유황 냄새가 납니다.

아소 일대는 약 3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아소 산은

약 10만 년 전의 대폭발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가장 최근의 폭발기록은 1958년인데 12명이 사망하였고, 1979년의 폭발에도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한동안 등반이 금지되기도 했었지요."

 

가이드의 해설이 유익했으나 듣는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런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조건 아래에서 아소 산록에 사는 인구 10만 여 명이라는 사람들의 인생관, 세계관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ㅡ , 아니 언제라도 꼭 터지고야 말 거대한 불덩어리를 이마에 마주 대하고 사는 이곳,

혹은 일본열도 전체 사람들의 사생 관을 문득 생각해 보며, 그는 순식간에 일종의 해탈 감, 법열 같은

것을 느끼고 몸에 전율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일본인들을 밉게 보거나 곱게 보거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경지의 터득 같은 것이었다.

그가 전율 가운데에서 무언가 집착을 버리는 마음으로 시원해하고 있는데 앞자리의 남자도 무슨 교감이

오는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싱긋이 웃는 것이었다.

그도 뜻 모를, 아니 무언가 깊은 뜻이 통하는 미소를 그 남자에게 되 보내며 마음이 더욱 평온해짐을

느꼈다.

마침내 그들은 화산이 멀리 보이는 산록에서 리무진을 내린 다음, 주차장 근방의 대형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에 닿았다.

 

"정상까지는 한 일 킬로 가량 걷는다더니 정말 그렇군요."

남자가 여자와 꼭 끌어안은 자세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요. 어제 저녁 술이 과했는지 나는 힘이 좀 드네요. 화구가 바로 저기 보이면서도 한참 걸리겠어요."

그가 빤히 보이는 정상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아내는 끌어안은 두 사람의 모양에 벌써 실쭉해 있었다.

"정상이라는 표현 대신에 화구라고 하시니까 감회가 다른데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신 제 어머니를

최후로 모시고 간 데가 남한산성 인근의 그 화장장 화구였거든요---."

남자가 눈동자를 모으며 그에게 말했다.

"여보, 빨리 와요. 나 혼자 먼저가요."

그의 아내가 이래저래 못 참겠다는 듯이 앞장 서 나아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이 책을 좀 보관해 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과 함께 책을 꺼냈다.

"제가 여행 준비가 부실하여 가방도 없고 한데, 그만 아침에 호텔 룸에서 이 불전(佛典)을 집어서

나왔거든요.

훔친다는 마음이 생긴 건 물론 아니었지만 새벽에 몇 구절을 읽어보니 너무나 좋아서 그냥 넣고 나왔네요.

그런데 이렇게 주머니에 넣고보니 막 구겨지는군요. 그래도 불전인데---. 마음이 불편해져서 선생님

배낭에 좀 넣어주시면 하구요. 이 사람도 작은 쇼울더 백 밖에는 없고해서---."

그가 사파리 여행복의 두껑없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노란 카버의 책을 꺼내더니 그에게 전했다.

 

"아, 뭐 아무렇게나 넣어서 갖고 다니다가 적당히 어디 놓아두어도 좋은데 뭘 그러시오.

어쩌다 미국에 출장을 갔을 때 보니까 객실마다 성경이 놓여있었고 그걸 손님이 갖고 가도 오히려 좋아할 듯

싶더이다."

그가 엉거주춤 책을 받으며 만류하듯 말하였다.

"네, 그래도 경전을 마구하기에는 마음이 찝찝해서요. 고맙습니다."

그가 책을 받자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조금 바삐 화구 쪽으로 올라갔다.

"저 사람들 뭐가 저래요. 참 예의도 없이---."

그의 아내가 또 날카롭게 불평을 하였다.

그는 어제 밤에 들은 이야기를 아내에게 일절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중국 출장 끝에 백두산 천지를 갔다온 그로서는 아소 활화산의 모습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백두와 아소, 두 명산이 모두 칼데라 지형으로 화구에 신묘한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백두산이 '쿨'하다면

이곳은 '불'하여서 차이를 보이는 영산이란 말이던가---.

30만 년 전부터 화산 활동이 있었다던지, 10만 년 전에 용암이 분출했다 던지, 불과 몇 십 년 전에 화산

폭발로 몇 십 명이 죽었다 던지---, 그런 시공의 개념이 미물에 불과한 중생의 한 사람에게로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는 듯, 그러면서도 무언가 큰 의미가 전달되는 듯, 그는 정상의 화구를 내려다보며 잠시 명상

속에서 혼미하였다.

 

“여보, 이제 다 보았으니 빨리 내려가요. 유황가스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역시 그의 아내였다. 아까 가이드가 감각이 예민하거나 천식이 있는 사람은 빨리 내려가라고 한 말이 아내의

감성에 전염이 되었는지 내려가자는 성화가 불같았다.

그는 아까까지 보았던 같이 온 남녀를 찾아보았으나 거의 군중을 이룬 관람객들 사이에서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내려가기를 단념하고 그는 하산 길에 들어섰다.

내려가는 길은 운동장의 트랙처럼 붉은 아스콘으로 포장을 해 놓아서 관절에 무리가 없도록 해놓고 있었다.

탄력이 좋은 그 길로 들어서고 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줄줄이 내려가고 있었다.

화구에서 그렇게 셔터를 누르고 사방을 살피던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에서는 쫓기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말 개미 행렬처럼 말없이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용암이 흘러내리다가 식고 굳은 다음에 다시 침식이 되어서 층리를 이룬 계곡을 몇 컷 찍다가 아내의

독촉에 잰 걸음을 하였다.

 

이제는 속절없이 무엇에 쫓기듯 창황히 아내의 뒤를 좇아 내려오는데 그의 귀에 갑자기 무슨 함성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한 순간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우레와 같이 큰 소리 같기도 했는데 앞에서 잰 걸음으로 내려가던 아내나

그녀 보다 더 앞선 사람들은 전혀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그에게만 기이하게 들리는 소리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높은 곳에 위치한 활화산의 복합적 요소들이 이명처럼 그에게만 소리로 변환되어

전달되었는데 여기에 그가 민감하게 반응하였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면 어제부터 그가 갖고 있던 어떤

예감이 작용하여 환청을 자성예언처럼 만들어 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화구 둘레에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관람하도록 설치된 긴 목책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등을 보이며

멀리 서있었는데 어쩌면 손을 앞으로 휘젓는 모습도 있는 듯싶었다.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어도 단순한 환청과 환영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가 쉬웠으련만 그는 이미 그런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아내도 그가 뒤를 돌아보며 질린 표정을 하자 무심결에 함께 놀란 동작을 취했으나 금방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같은 사정을 그녀에게 묻거나 확인치 않고 계속 하산의 걸음만 재촉하였다.

이윽고 작은 능선을 넘자 주차장이 나왔고 그 사이에 얼굴이 익은 동행들이 이미 많이 내려와 있었다.

그와 아내는 지정석처럼 된 두 번째 좌석에 두고 내린 작은 짐을 치우고 털썩 주저앉았다.

가이드의 칭찬처럼 말을 잘 듣는 일행이 타곤 온 리무진을 곧장 채운 듯 싶자 가이드가 기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아니, 앞쪽의 이 분들은 어떻게 하고?"

그가 다급하게 제지하였다.

"아, 그분들은 언제라도 차에 타지 않을 때가 자기들이 떠난 때라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였어요.

돈은 다 내시고---."

그러다가 가이드가 황급히 말문을 닫았다.

"아, 그런 뜨내기들을 앞에 태우고 우리를 밀어내는 법이 어디있어욧!"

마침내 그의 아내가 분노를 폭발시켰다

"아닙니다. 서울 본사에서 미리 그렇게 예약한 손님입니다. 손님들도 지금 뒤쳐지셔서 다음에 오는

우리 회사 관광객들과 합류할 수 있거든요."

가이드가 믿거나 말거나 강변하였다. 차는 떠나고 하늘에는 굉음이 울렸다.

그가 창밖으로 올려다보자 시커먼 구름이 낀 천공에 헬리콥터가 보였는데 상식적으로는 관광 헬리콥터가

시간에 맞추어 뜬 것 같았지만, 그는 비상 연락을 받고 출동한 무슨 구난 헬리콥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앉아서 작은 배낭을 벗자 한쪽으로 불전이 비죽 튀어나왔다. 책의 제목은 "화영 불전(和英 佛典)이라고

되어있었으며 중간쯤에 접은 페이지가 있었다.

그는 일본어에는 까막눈이었고 영어도 아주 서툴렀으나 일단은 그 곳을 펴보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마치 아내가 들으라는 듯이 천천히 해석하여 읽었다.

"세상만사가 고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마치 세상만사가 모두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만큼이나."

그 다음 구절을 그는 더듬거리며 먼저 영어로 읽었다.

"If people insist that all things are empty and transitory, it is just as great a mistake as to insist that all things

are real and do not change.

이게 무슨 뜻이라고 봐야하나---. 사람들이 아니 중생이 세상만사는 모두 헛되고 덧없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도 큰 잘못이다.

이는 마치 세상만사가 모두 실재함이고 그래서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주장이 크나큰 잘못인 것처럼."

 

그 페이지의 결구라고 할까, "부처는 우리에게 중도(中道, Middle Way)를 가르친다---"로 시작하는 부분에는

누가 언제 그어놓았는지는 몰라도 객실에서 흔히 보는 연필로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다.

"Buddha teaches the Middle Way transcending these prejudiced concepts, where duality merges into oneness."

그는 그 구절도 또 더듬더듬 읽었다.

"아이 창피해요. 엉터리 영어 그만 읽으세요. 그리고 당신, 어디 절집에 갈 일 있어요? 찝찝한데 그건 여기

그냥 던져두고 가요."

"여기 보시게, 내가 영어는 잘 몰라도 부처님도 중용을 취하라고 하시네. 갈라서지 말고 합류하라고 하시는

말씀 같아."

"글쎄요. 그런다고 내 마음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네요. 하여간 그 책이나 여기 좌석 뒷주머니에 쑤셔

넣어버려요."

"아니, 나중에 가이드에게 맡길 게."

그는 얼른 카메라의 모니터를 킨 다음에 조금 전 무수히 찍었던 활화산의 풍경을 되돌리면서 앵글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쌀의 뉘를 고르듯 지우기 시작하였다.

두 남녀의 모습은 거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끝)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 Oliver Schro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