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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162호인 북한산성(北漢山城) 은 그저 진흥왕 순수비로 우리의 의식에 남아있으나 처음에는 백제의 강역이었던 듯하다.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으로 역사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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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도성의 성벽 복원 계획에 따라서 아름답게 축성을 다시하고 성벽을 따라 산책로도 길게 축조하여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새로운 정취를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에 지은 북악 팔각정은 우뚝한 산세에 비하여서는 다소 치졸한 인상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북악 스카이웨이 드라이브 코스와 함께 소중한 추억의 장소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꽃비가 뿌리던 날에 찾아가 보았다.
아, 연변에 사시는 한국계 교수의 블로그에서 "꽃"이 들어가는 말을 보고 그냥 여기에 따와본다. 허락을 받은 바는 없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내 제자이기도 하여서 따온 글이라는 것을 먼저 여기에서 밝히고 나중에 본인에게 양해를 구해도 되리라 싶다. 꽃비가 다 떨어져가니 마음이 급해서 그리되었다.
신랑과 신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은 “꽃잠”입니다. 또 영화로운 처지나 환경을 “꽃그늘”이라 하고, 여자의 한창 젊은 나이를 “꽃나이”라고 하며, 곰국·설렁탕 등의 진한 국물은 “꽃물”입니다. “꽃”으로 시작하는 말에는 그밖에 “꽃차일”도 있는데 꽃이 많이 피어 차일(볕가리개)처럼 하늘을 가린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꽃모습”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빛깔을 띤 아름다운 구름은 “꽃구름”, 꽃처럼 아름다운 불꽃은 “꽃불”,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은 “꽃비”라고 합니다.
꽃비 내리는 봄밤에 꽃모습인 님이라도 만난다면 정말 세상은 꽃멀미 나는 꽃동산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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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규모는 원래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곳이었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132년(백제(百濟)개로왕(蓋로王)5)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신라(新羅)는 이곳의 비봉(碑峰)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대서문(大西門)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 시설의 일부가 있다. 성벽은 아직도 온존한 부분이 많아서 위에서 말한 바처럼 다시 쌓기가 거의 완성 단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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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이 어느때인들 뿌연 연무 속에 앓고 있지 않으랴만
이날도 시계는 거의 제로 상태였다.
그나마 산성으로 올라와서는 공기가 조금 맑아져서 시야가 넓고 맑아졌으며
원근 산등성이마다 산벚꽃 나무등, 꽃나무들이 봄꽃을 달고 경염하여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홀로인 노인의 모습이 외롭다.
설마 새들도 떠나는 것은 아니겠지---.
팔각정 앞의 조망 지도를 훑어보고 이제 도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하산 산책로에도 꽃나무들이 끝물의 아름다움을 펼쳐주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날이 가까운 때였다.
감사원 청사의 안팎은 사실 벚꽃 경관이 예로부터 범상치 않은 곳이었다.
절정을 막 넘긴 꽃잎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명 칭 | 북한산성(北漢山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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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
수량/면적 | 543,795㎡ |
지 정 일 | 1968.12.05 |
소 재 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외 서울 은평구,성북구,강 |
시 대 | 삼국시대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서울시, 고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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