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를 흐른다.
1636년(인조 14년)에 거대한 바위 소요암을 깍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는데
그 폭포가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깊숙히 자리잡은 옥류천을 돌아 나오는 이 코스는 1976년 경 폐쇄되었다가
거의 30년만에야 다시 개방이 되었다.
무단청, 무채색의 연경당을 나와서 구중심처에 있는 옥류천을 찾아가려고 태정문을 나섰다.
창덕궁은 낙엽밟기 행사중이라 빗자루로 낙엽 쓰는 장면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그런 장면을 대하니 오히려 기이하였다.
연경당 120칸 집안을 깨끗하게 가꾸는 일환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처에 날리는 낙엽은 그저 속수무책인듯 싶다.
즐거운 속수무책 같았다.
바람이 한번만 슬쩍 불어도 낙엽이 우수수했다.
옥류천 가는 길을 따라 100m 정도 내려가면 제법 넓은 마당이 나오고 그 한 구석 그늘진 곳에 취한정이 있다.
이곳 취한정은 옥류천의 입구라고 보면 된다.
취한정은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동궐도에도 그려져 있어 1830년대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에 보이는 간살이의 구성이 흥미롭다.
중앙에 1칸의 넓이가 좌우 2칸을 합친 것과 같다.
시원한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기에는 그만인 장소에 취한정이 있다.
저기 보이는 부부는 제주도에서 왔다는데 곳곳에 공사장 가림막으로 출입이 통제되자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여서 더 안쪽으로 들어간 분들이다.
취한정에서 조금 더 들어가 소요정에 앉으면 옥류천이 한 눈에 보인다.
농산정
정조는 여기에서 화성행차 준비도 하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마침내 옥류천에 다달았다.
때때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流翔曲水宴(유상곡수연)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은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속종의 작품이다.
뒤쪽 오른쪽의 두껑을 해 덮은 곳이 어정이라고 하여서 임금님이 드는
샘물을 퍼내던 곳이다.
청의정
청의정은 궁궐내의 유일한 초가이다.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지붕이 16채정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청의정만 남아있다
조선시대 임금님들은 창덕궁 안에 있는 창의정 앞에서 매년 모내기 행사를 갖고
한해의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임금이 백성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는 활동에 관심을 갖고 백성의 어려움을 덜고자 노력했던
대표적 행사로 꼽히고 있다.
소요정의 지붕 꼭지 같다.
태극정의 꼭지인지도 모르겠다, 시방---.
카메라우먼의 자세가 심상치 않다.
전문가이거나 전문을 꿈꾸는 자세가 대견해보인다.
되돌아 나오는 길도 단풍 늪이었다.
같이간 찍사 친구 하나가 앞장서서 부지런히 화각과 구도를 잡아보고 있다.
에피소드가 생긴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전경을 찍으려던 전문 찍사 두사람이 내 친구를 두고 저희들끼리 뭐라고 속삭였다.
"눈에 가시네---."라고.
다시 돌아온 연경당 근처가 깨끗하다.
사족; 부영지 쪽이 창경궁에서의 무슨 행사로 스피커 소음이 크더니
심처에 있는 옥류천 부근은 바로 곁의 S대학 운동장과 면해있어서
또 소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