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대왕의 화성 행차는 효행의 극치를 나타내는데 그 출발지점은 창덕궁이었다.
마침 창덕궁에서 그 출발 행차의 모습을 요즈음 재현해 주고 있으므로
여기 사진으로 소개하고 당시 행궁하던 과정을 옮겨본다.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 덕수궁(德壽宮-慶運宮)을
조선의 5대궁궐이라 한다.
왕과 왕실의 공식적인 집무 및 생활공간은 정궁(正宮) 또는 법궁(法宮)이라 한다.
반면 왕이 임시로 기거하면서 집무를 보는 일종의 보조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하며
궁 밖 행차 시 머무르는 곳을 행궁(行宮)이라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재현되는 과정은 "행궁"의 출발 장면이다.
행궁 첫날 첫 출발을 다시 보는 셈이다.
행궁의 출발은 영화당에서 시작하였다.
영화당 앞마당은 과거를 치루는 과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새벽에 창덕궁을 떠난다.
아침 묘정3각(卯正三刻, 6시 45분경)에 세 번째 북이 울리자 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모자에 깃을 꽂고 뚜껑 없는 가마를 타고 돈화문에 나와 두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를
대동하여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기다렸다.
이날 어가를 따라간 인원은 총리대신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1,779명에 달하고
말은 779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동원된 인원은 대략 6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가 행렬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돈녕부 앞길-파자전 돌다리
(지금의 단성사 앞)-통운 돌다리(지금의 보신각 앞길)-대광통 돌다리
(지금의 서린동 122번지 남쪽)-소광통 돌다리(남대문로1가 23번지 남쪽)-
동현(銅峴, 지금의 명동)병문 앞길 - 송현(松峴, 지금의 한국은행 부근) -
수각(水閣) 돌다리-숭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거쳤다.
이어 가는 노량행궁(용양봉저정,지금의 동작구 본동 30번지)에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한후 오초2각(午初二刻, 11시30분)에 시흥행궁으로 향했다.
행차가 출발하는 시간을 알릴 때에는 꼭 세 차례에 걸쳐서 악기를 불었다고 한다.
임금은 행궁으로 떠났고 뒤에는 낮 모르는 사람들만 남아서 웃고 떠들었다.
차라리 단풍이 익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