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 주변은 왜그런지 황혼을 짙게 느끼게 한다.
아마도 최근세사에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리고 덕혜옹주 등이
이곳에서 어려운 삶을 사시다가 여생을 마친 일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1989년 사망했다.
승화루의 아래층은 원래 의신합(儀宸閤)이라 했으며 방이었으나
지금은 트인 공간으로 변했다.
이곳은 세자의 독서와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중희당 우측의 부속건물인 칠분서 월랑과 육모정인 삼삼와가 소나무와 감나무 뒤로 보인다.
동궐도를 보면 중희당은 성정각 동쪽에 있으며
창덕궁에 있는 단일 건물 중에서는
가장 크고 멋있게 그려져 있다.
일명 세자궁이라 불리던 중희당은 고종28년 이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중희당은 정면 아홉 칸, 측면 세칸으로 본 건물도 크지만 부속 건물이 많다.
바로 중희당 동편에 잇대어 칠분서(七分序)라는 월랑이 있고,
여기에 연결되어 육우정(六隅亭)인 삼삼와(三三窩)가 있다.
삼삼와에 잇대어 복도가 있고, 복도 끝에 남향으로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 있다.
이곳이 소주합루라 불렸던 승화루(承化樓)이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승화루의 편액.
헌종 13년(1847년)에 지어진 낙선재는 원래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책을 볼 수 있게 지어진
임금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육모정인 삼삼와(三三窩)가 낙선재 뒤로 보인다.
삼삼와의 절병통 지붕위에 까치가 까치밥 연시를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