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배기호 수필가는 40여년을 미국 캘리포니아의 오렌지 카운티에 거주하면서 오래
약업에 종사해 온 재미 교포이다.
젊은 시절에도 LA 지역의 한인 문화, 문학 단체에 기여해 온 공로가 적지 않았는데 아마도
3대에 걸친 선친들의 독립운동사의 기와 맥이 연면히 흘러내려온 영향이 아닌가 싶다.
배 수필가는 이런 선대들의 독립 운동사를 3년여 전에 홍성사를 통하여 <약방집 예배당>
이라는 실명 소설로 상재하여 한국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문단, 사회전반에도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소설은 지금 영문으로 번역 출간이 되었고 중국어 판도 번역이 거의 끝나서 곧 출판이
되리라고 한다.
이제 배 작가는 선대의 기록뿐만 아니라 당대의 기록도 가족사를 바탕으로하여 실명
소설화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한국인의 이민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되리라고 기대해 본다.
배기호 작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독도에 대한 한일 분쟁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본측의
주장임을 낱낱이 파헤치는 운동을 벌이고 있음은 물론, 최근에는 보다 공격적 자료로서
<대마도 영유권>을 내 세움으로서 통쾌하게 의표를 찌르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
하였다.
이미 문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배 작가에게 국내에서의 등단 작업도 거치는
것이 향후 여러가지 활동에 보탬이 되리라는 나의 종용으로 그 과정에 흔쾌히 참여한
그의 뜻을 기뻐하며 여기 그 흐름의 편린들을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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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 관한 우리 한민족의주장..
1.대마도는 잃어버린 우리땅이다.
2.12세기말일본천태종의승려가지은 ‘산가요약기’ 에대마도는 고려가 말을 방목하여 기른
목장으로 신라때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13세기말의일본 서적인 ‘진대’ 제 2권에서는사람의모습도 그곳에서나오는 토산물도 모두
신라와 다름이없다 라고 씌어져있다.
3.고려사에의하면고려는선종 2년 (1085) 년이래 ‘대마도 구당관’ 으로불렀으며, 이와 비슷한
사례로, 제주도의성주를 ‘탐라구사’로, 일기도(대마도와구슈섬사이에있는이끼섬) 도주를
‘일기도 구당관’으로 명명한것에서찾아볼수있다.
구당관은고려시대변방지역내지수상교통의요충지를관장하는행정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지배자에게고려가구당사라는직위를 하사했다.
4.탐라도 상대적독립을누리다 고려에 복속됐고, 또한대마도도 상대적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조선의관직을얻고생필품을 얻기위해교역을꾸준히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이 대마도를 다루는고려와 조선의원칙이었다.
5.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담고있는 책은 ‘ 삼국지’ 위지왜인전이다.
" 대마국은 구야에서 강건너 1000여리에 떨어진 곳에있다. 그곳을 다스리는우두머리인
대관은 비구라하고, 부관은비노모리라고한다. 대마도는망망대해에떠있는절해의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리에 이른다"
6.고려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고려의만호벼슬을가진사신으로파견된이래대마도는
600여년간조선과 대국휼소국 또는 조공회사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이었다.
‘증보문헌비고’ 에고려문종 36년(1083) 부터공민완 17년(1368) 사이대마도에서사신을보내
방물을바친기록이있다.
7.팔도전도( 풍신수길이 조선침략에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만든지도) 에는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있으며, ‘ 공격대상’ 이라고적혀있다.
8.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기록되어있다.
9.성종 때에 황희정승은 "대마도는 옛날부터 우리 땅으로 고려말기에 국가기강이
허물어져 도적의 침입을 막지못해 왜구가 웅거하게됐다" 고말했다.
10.1486 년에편찬된 ‘동국여지승람’, 1765 년편찬된 ‘여지도서’와 1822년에편찬된
‘경상도읍지등’ 에도대마도는부산동래부의부속도서로되어있다고적혀있다.
11.영조 때실학자안정복은 "대마도는우리의부속도서로신라, 고려이래로우리의속도로
대해왔다." 말했다.
12.태상왕이었던태종이세종때대마도정벌을하기전에군사들에게내린교류문에서는
" 세종원년 (1419년)상왕태종은대마도정벌을결심함. 대마도는섬으로본래우리의땅이다.
다만궁벽하게막혀있고또좁고누추하므로왜놈들이거류하고, 개같이도적질하고쥐같이
훔치는 버릇을가지고경인년부터뛰놀기시작했다" 라고기록하고있고,
대마도를정벌한뒤대마도주에게 보낸편지에는대마도가섬으로 경상도의 계림(경주)에
속해서 우리나라땅이라는것이 문적에 실려있어확실하게상고할수있다.
다만그땅이매우작고또바다가운데있어서왕래함이막혀백성들이살지않았을뿐이다.
이에왜놈으로서그나라에서쫓겨나갈곳없는자들이몰려와모여살며소국을이루었던
것이다." 라고 적혀있다.
또한대마도정벌이후일기도로파견된조선관리인강권선에게일기도영주대내전의관반인
노라가도로는 " 대마도는본래조선의목마지이므로대내전이조선과더불어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돌리고자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알지못합니다 " 라고 말했다.
13.세종 24년신숙주는통신사의서장관으로일본에가대마도에서계해약조를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성종 2년 ‘해동제국기’를저술했다. -
" 군은 8개이고사람은모두바닷가포구에서살고있다. 대마도의포구는 82개나된다.
남북은 3일이면다돌아볼수있고동서횡단은하루나반나절이면족하다.
바다와접한사면은모두돌산이고땅은척박하다.
백성은가난해서소금을굽거나물고기를잡거나해산물을딴다."
14.대마도에상륙한이종무군은적선 129 척을나포하고왜구가사는집 1939 호를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한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김에이종무군은왜구들이심어놓은곡식도베어버려, 요행히산속으로도망친자들도
굶게만들었다.
15.세종 2년 (1420) 윤정월 10일대마도주는다시사자를보내, " 대마도는조선을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을 지정받고자한다.
16.15세기중국에서제작된 ‘조선팔도총회’ 도대마도가울릉도독도와더불어조선 땅으로
표기되어있다.
17.고려 때도대마도는우리 땅이었다. 일본의에도 막부의 장군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말.
" 너희섬( 대마도) 는조선지방이니, 마땅히조선일에힘을써야한다." -
서기 1617 년통신사 이경직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말을 듣고적어
놓았다.
18."대마도는대대로우리조정의은혜를받아조선의동쪽울타리를이루고있으니, 임금과
신하 사이요, 국토로말하면, 조선에부속된작은섬이다. "
서기 1590 년임진왜란직전에통신사부사로서일본을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19.고지도는대마도가분명우리땅임을생생히입증하고있다.
" 물고기를잡아팔아서살고있다. 종씨가대대로도주가되는데….."
20.이승만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 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우리가 독도를 실효지배하는것보다훨씬근거가약하다.
21.1948년 8월 18일 , 1949년 1월 7일 이승만대통령이 두 차례에 걸쳐 대마도가
한국령이라고 주장을펼쳤고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것은얼마후에있게될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22.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 1870년대에 대마도를 일본이불법적으로점령한 것을
인정하고 불법으로 소유한영토를 반환하겠다" 고했다.
23. 미국국무부외교문서에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정부가미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대한 모든원지, 호칭, 청구를 분명히포기하고
그것을한국에 돌려줄것을 요청한다
(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e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고밝혔다.
이상의근거로인하여,일본은불법점거하는대마도에서하루속히철수를하고,
대마도는대한민국경상남도에귀속되어야한다.
전세계대마도반환추진위원회위원장배기호 ( 미합중국가주거주)
May. 07. 2010
Anaheim, CA
K형~!
아마 1973년 여름이었는가 보네…
한참 미국생활에 눈, 코 뜰새가 없을 즈음 호놀룰루 국제공항 문을 열고 넥타이를 고이 메고 온
자네의 얼굴이 생각나네.
함께 2개월을 우리집에 같이 있는 동안 내가 풀어준 넥타이와 와이셔츠 대신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미국생활을 시작하는 자네를 보면서 내가 2년이나 고참이 되었다고 후배인 자네에게
미국의 생활을 알려주며 뻐긴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7년이나 지났다니….
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정직한 것이 시간인것 같네…
우리는 자네 말처럼 이곳에서 젊은 시절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처럼 매맞지도 않았으며 인격적인 모욕도 당하지 않았고 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오히려 근면성실하다고 봉급을 더 받은 일까지 있지 않았던가…
이 조그만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얼마나 큰지 알지 않겠소….
한국을 떠날때 돈을 달러로 바꿔주지 않을 뿐더러 가져올 돈도 없던 그 시절…
오직 우리에게 남은것은 건강한 팔, 다리고 먹고 미래를 꾸려 나가면서 그래도 한국의 현실보다
낫지 않느냐고 위로하면서 지냈던 그 시절….
그 당시 5년 후에 내가 무엇이 될까….. 10년후에 내가 무엇을 할까하는 꿈을 꾸면서 설계를 해
나가면서 본인들의 전문직을 찾기 위해서 약학 대학원에 들어가 학위를 받고 전문 면허증을
받고 직장을 구하고 가정을 이루고 보금자리를 만들고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녀들을 키울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것만 해도 이 사회가 우리같은 소수민족들에게 베풀어주는
큰 혜택이 아닌가 생각을 하네.
자네 이야 기처럼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지역에 따라서 삶의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과 후의 우리들의 생활이 한국에서처럼 아기자기한 것은 없는 게 사실이지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적다 보니 고독과 싸워야 할 또 다른 한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네…
그래서 교회는 더욱 더 열심히 가는 면도 있고 또한 가지 자신의 능력개발을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노력을 하고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다보니 희로애락과 또한
자본주의 국가의 최첨단을 달리다 보니 모든것이 경제와 연결이 되어있어서
Money talks, 돈이 모든걸 말해주고, Credit cards 나, Loan 으로 먼저 사고 나중에 지불해라 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유혹시키고 그로 인해 소비자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드는,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실정에 형님뻘 역활을 자주 하고있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었던 것 아니겠소…
우리가 어려운 이민생활 가운데 가정을 이끌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그들에게 우리들의 얼(spirit) 을
전수해주고자 각 가정마다 노력한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에 있는 한국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달리 또 한가지 어려운 고충은 우리 자녀들의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자녀들과의 대화의 어려움을 겪을때가 많이 있지 않소이까….
미국에서 다수 인종에 속하는 아일랜드인들은 150 년 전에 자기나라의 감자 흉년이 들어서 배나
채워보려고 이민을 왔고 영국인들은 종교적인 탄압으로, 유태인들은 히틀러 때문에 피난을 왔고
폴랜드인들은 2차대전으로 피난을 왔고 최근에 월남인들은 나라를 잃은 망명객으로 각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풍랑을 헤치며 배를 타고 삶의 터전을 옮겨온 것입니다.
K형이나 나도 한국에서 밥을 못먹어서 온것이 아니고 미국에서 공부를 더 많이하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루어 자녀들에게 더 좋은 삶의 터전을 남겨주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지금 현재는 우리가 수가 적어서 아직까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 언젠가는 우리 한국인
중에서, 그것도 우리 K형 집안이나 배씨 집안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도록 그 기반을 지금
만들어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케네디 집안이나 록 펠러 집안이나 부시 집안보다 훨씬 잘낫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노력하고 더 성실하고 더 인내심을 가지면서 미래의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꿈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민을 온 가장 큰 목적이 것입니다.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내가 미국에 온 1971년 이후 100년 이내에 워싱턴 DC 의 큰 집주인은
나의 후손에서 나와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꿈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벌써 오바마라고 하는 흑인 대통령의 탄생은 나의 꿈에 더욱 불을 지르고 그 꿈에 더욱 확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K형, 한때 나의 선친께서는 지는 해가 아름답다도 말씀하셨습니다.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이 준수 하지만 지는 석양의 햇살은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만종의 그림처럼 K형 이야기 같이
저녁 노을지는 마당가 울타리 안팎의 풀 섶에서 풀벌레들의 오케스트라와 우주의 별들이 반짝
거리는 밤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마음 속 깊이 새기는 것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는지요….
훌륭한 노인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그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도록 합시다..!!
약업과 독립운동이 3대에 걸친 우리 선대들의 양대 과업이었다.
어릴때부터 이 두가지에 대해서 누누이 들으며 체험하며 성장한 내가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는
당연히 약학이었다.
대학과 군복무를 필하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미국 유학을 꿈꿀 때에도 전공은 물론 약학이었다.
약학 대학원을 일리노이에서 마치고 교민들이 많이 사는 서부로 와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에는 선대들의 독립운동사를 구전의 수준으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강박관념과 나아가서는
이곳 미주 대륙에서의 한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독립운동이라는 두가지 명제가 그치지 않고 따라다녔다.
선대들에 대한 강박관념은 4년전 쯤 "약방집 예배당"이라는 장편 실화 소설을 나의 구술에 따라서
전문 작가가 출간해내고 지금은 영문과 중국어판으로 번역 출판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으로
어느정도 해소 했다고 자부한다.
미주 한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독립이라는 명제는 그간 미천하나마 교회와 한인 커뮤니티를 통하여
섬김과 봉사를 해오면서 끊임없이 추구해 오고 있다고 외람된 표현을 해보고 싶다.
이제 그동안 선대들의 위업과 내 주변의 일들을 활자화 하면서 문학에 관한 소년때 부터의 열정은
다시 끓어올랐으나 그 분야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몫으로만 여기고 자연과학도인 나로서는
재주 없음으로만 치부해 왔는데 인문학자이자 소설가인 K형과 계간 "문학과 의식"의 안 주간께서
내 졸문 수필 몇편을 읽고서 등단의 꿈에 힘을 실어주셨다.
개인적으로도 여기 오렌지 카운티의 글사랑 모임에 참여하여 노력을 하던차여서 앞으로 더욱
글쓰는 일에 매진하라는 채찍으로 두분께서 등단의 기회를 주시는 모양이다.
여기 글 공부하는 여러분께도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니 책을 만들고 글을 쓴다며 재주도 없이 땀을 흘리는 나를 크게 탓하지 않고
은근히 격려해준 아내에게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고 의사와 약사 부부로 미주 대륙에서
최선을 다하며 가업을 잇는 두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게도 간곡한 뜻을 알리고 싶다.
신인상 심사평
아메리칸 드림
수필 문학이 문학사에서 산문 장르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은 대략 산업혁명이 서구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며, 시간과 사고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부터였다.
이때부터 정기간행물, 예컨대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등의 미디어가 급속히 생성 발전되고 이른바
독자를 확보한 수필가의 필진이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의미의 소설과
수필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가 개척된 시기이다.
수필의 초기 모습은 그러나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신변잡기 류의 내용보다는 일종의 '소논문' 형식이
지배적이었다.
말하자면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제반 모순, 위기의식에 당면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 진정한 의미와 해결책에 대한 고도의 지적 고민과 모색을 털어내 놓았던 것이다.
출판과 배포가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에 단순한 신변잡기가 미디어의 총아가 되기에는 아직 준비되어야할
과정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의식의 변화, 마음의 여유 등을 위한 시간적
준비가 필요했다고 하겠다.
마침내 이러한 제반 여건이 성숙되면서 수필은 소논문의 형식을 띈 원래의 에세이(프랑스어로 essai,
영어로 essay) 영역과 신변잡기를 다룬 미셀러니(miscellany)의 세계로 양분되면서 근대 수필문학은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그 완수 단계를 문학사적으로 접했다고 할까, 아무튼
신변잡기 쪽의 수필 문학성향이 처음부터 강한 편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전자보다 하위층위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배기호 수필가가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양분된 성격을 반반씩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였다.
우선 내러티브 형식 자체도 일반적인 서술형이 있는가하면, 편지의 형태, 또 어떤 글은 선언문이나
격문의 형식을 띄고 있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어떤 글의 내용은 자연과학도의 소논문 같은 정확성에 계조식 문단 전개 등이 이채로운가
하면(이런 부분은 원래 서구에서 추구하던 수필 문학의 원형에 가깝다), 또 어떤 부분은 우리나라
선비들의 상소문 혹은 일제강점기의 격문의 성격을 띈 글도 보인다.
과연 배기호 수필가의 이력을 살피니 미국에서 약학 대학원을 마친 자연과학도이자 그 선대분들은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순국을 한 드라마틱하고도 찬란한 가족사가 배경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사를 구태어 들추어 보는 것은 이러한 내력이 앞으로 참으로 가치있는 문필생활을 할
기본 토양이 되리라는 기대와 아울러 책무를 상기코자 함이다.
특별히 미국사회에서 청년시절 이후를 모두 보낸 배경을 감안해 볼때 아직도 펄펄살아있는 모국어의
맥박을 느끼게하는 기개와 자질이 놀라우면서도 마음 든든하다. 이번에 싣지 못한 다른 작품들은
다음 기회에 게재할 여유를 갖고자 한다.
이제 새롭게 등단한 현자의 만년이 곧장 보람있는 저술활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