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기러기 가족 3-2

원평재 2011. 2. 10. 06:15

그녀가 없는 나의 아파트는 마치 산소가 다 빠진 우주선, 아니
그런 한가로운 상징이 가당치않은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진 의미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뒨느 향수가 묻어나던 모든 문의 손잡이, 컴퓨터의 키 보드 등에서
차츰 그 아련한 향수 냄새가 사라지자 나는 전실의 화장대 위에
새로 한병을 사다 놓고 가슴이 타고 눈물이 날 때면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속에서 한참을 울었다.

중년의 사내가 향수를 뿌려놓은 작은 방에서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장면은,
보고 듣는이가 없어서 그렇지 만고의 이미지로 상표 등록을 할만
했으리라.
제목은 "만고의 고독".

그러던 어느날 아내에게서 흥분된 연락이 왔다.
오렌지 카운티의 이름난 사립 고교에 다니던 큰 딸아이가 마침내
UC 계열 대학의 생물환경 전공에 합격되었고 그 학교의 마이클 케네스
교수가 한국의 유명 대학과 자매결연을 하게 되어서 서울로 오는데
함께 올 기회를 잡았다는 것이다.

"Great!"을 연발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시저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
노라"의 전황보고 보다 더 흥분에 떨고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음식점을 찾아서 예약해 놓으세요. 아이의 장래가
걸려있는 문제예요."

아, 이사람들이 미국까지 가서 물을 흐려놓는구나. 한국에서 원예학을
전공한 아내가 그곳 커뮤니티 칼리지에 시간제로 등록하여 생물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는 소리는 전화와 인터넷으로 들었지만 어떻게
"아이의 장래가 걸려있는" 교수와 연관을 맺었는지,
나의 의식이 제대로 박혀있는 때였으면 "퀴즈 풀이" 수준의 호기심이든
어떻든 알고 싶은 사연도 많았으련만 나는 이미 뒨느 향수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물 때를 놓친 바지락만도 못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나는 아내가 귀국하는 다음날 만찬이 개최되도록 수서에 있는 저 유명한
한식집, "필경재"로 삼인분 예약을 해 놓고 아내의 반응을 전화로
물어보았다.
광평대군의 고옥이자 철기 이범석 장군이 태어나 성장한 이 곳은 비싼
음식 값에 대한 뒷말은 좀 있으나 손님 접대, 특히 외국인 접대로는
가장 안성 맞춤이었고 아내는 이런 사실을 어디선가 확인하고 흡족한
반응을 국제전화로 보내왔다.

이 때 나의 정신은 거지반 정상이 아니었었다.
사라진 미스 조를 백방으로 찾아나섰으나 조그만치의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노모도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무슨 정보회사니, 심부름 센터의 불법 뒷조사 조직을 가동해 보아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청부살인?
문득 생각이 이에 미치자 이젠 나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케네스 교수와 아내는 각각 모범 택시를 따로 타고 나타났다.
나는 지리에 서툴러서 30분전에 차를 끌고 와 있었다.
아내가 들어올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제 밤에 인천 공항에 들어온 아내는 친정에서 하루를 자고 오늘
이 전통 식당에서 나와 처음 조우하는 셈이었다.
오늘 저녁 이 행사가 끝나면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산소 빠진
아파트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몸에서 "세라 뒨느"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당신 오늘 낮에 우리 아파트에 들렀다 왔소?"
내가 캥기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내는 그런 일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예약은 참 좋은 곳에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실 나도 초행길이라 걱정이 되었으나 대궐 수준에서는 한간이 빠진
아흔아홉간의  전통 한옥과 부산하게 움직이는 궁중한복 아가씨들의
품새는 절도있고 단아한 바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안도하며 수인사를 나누고 저녁 식사를 맞이하였다.

"왜 생물환경 공학이라야 하는가---?"
이날의 중차대한 화두였다. 더우기 우리나라는 지금 서울공대까지
미달 학과가 생기는 판이 아닌가.

원래 1차 산업인 농업이 2차 산업인 제조업으로 옮겨갈 때에는
농민들의 희생이 필연적이다.
이것은 메가 트렌드이며 어쩔 수 없는 현상일 뿐이다.
이제 세계의 도처에서는 3차산업으로의 이행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코리아도 마찬가지 단계에서 변화가 진행중이다.
제조산업의 비교우위는 모두 중국과 인도로 넘어갔다. 서울 공대에
사람이 모이지 않고 연구소 인력들이 40세면 모가지 당할 위기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미국의 산업계를 보라, 모두 제3세계 출신들이 메꾸고 대학의
사이언스나 엔지니어링 과정을 보면 모두 까만 머리 아니냐.
그러므로 미국이나 코리아에서나 제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생물과학 혹은 생명공학"이나 "우주 공학"처럼 엄청난 투자와
연구비가 투입되어야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분야이다.

이러한 거대분야에 대해서만은 재정을 움직이는 하바드나 MIT나
와튼의 MBA 출신들도 결코 인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돈 맥이 살아있고 돈의 물줄기가 콸콸 흘러 들어갈 것이다.

케네스 교수의 설명이 일목요연하게 신바람이 나자 아내는 연신
"오, 예"와 "와이 낫"을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강연이 "배아 복제"부분으로 점입가경이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나는 "필경재"가 가볍게 흔들리는 진동을 느꼈다.
임금이 내린 수많은 敎指가 걸려있는 벽채도 따라서 출렁이더니
이제는 그 교지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지진이 LA에만 있는건 아니죠"
내가 흐릿한 의식 속에서 웅얼겨렸다. 아내와 케네스 교수는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런데 조그만 명주 잠자리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엄동설한에 얇은 날개가 달린 곤충이라니---.
지진이 아니고 현깃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정말로 다시
앗찔한 느낌을 맛보며 상자락을 부여잡고 몸을 가누는 바로
그 순간에 명주 잠자리가 나타난 것이다.

"오, 노! 한 겨울에 날파리가 왠일이예요?"
아내가 날카롭게 궁중 나인들을 나무라더니 싸늘한 눈초리가
나에게로 쏠렸다.
캐네스 교수에게는 연방 "싸리, 싸리"하면서---.
쏘리가 아니고 싸리라니 발음 늘었네. 한심한 생각이 현깃증
나는 나의 머릿속을 멤돌았다.

아내는 손으로 이 날파리같은 곤충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휘져었으나
날파리는 겨울이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느린 동작 중이면서도
결코 붙들리지 않고 나에게로만 달려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나도 날파리를 잡으면 당장에 죽여버릴 기세였다.
외국의 석학 앞에서 이 얼마나 무안한 상황인가.
그럼에도 이 엉성한 날개가 달린 곤충은 아내의 추적은 피하면서도
나에게로, 나의 면전으로 결사적으로 닥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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