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에 가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이제 막 등단하는 신인들의 작품을 평가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둑판의 훈수꾼 쯤으로 자신을 생각하는데, 훈수를 두다보면 자신의 작품을 돌이켜
보게도 되는 소득이 따른달까요
최근 어떤 문예지에 쓴 심사평 겸 추천사를 올려봅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소설은 모름지기 이야기가 중심이라는 주장을 아래 심사평에서
강조하였지요.
그리고 다음에 기회를 보아서 제 졸작들 중에서도 아주 짧은 것으로 몇 편을 골라 여기에
올려볼까 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작가의 개인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미리 천명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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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신인상 추천사
문학 장르 중에서도 소설 부분이 가장 역사가 짧다는 것은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운문이 산문 보다 훨씬 앞서서 문학의 도구어로 사용되었음을 상기하면
얼른 이해가 되리라.
소설문학은 근대 산업사회와 시민 계급의 출현으로 그 존재감을 확보한다.
물론 인쇄술의 발전과 독서의 여가를 확보한 시민 계층의 확립이 병행한 것도 필요충분조건
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산업화와 도시화 등에 따른 인간관계의 복잡성이 운문 문학
으로는 그 실상을 다 전달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산문 문학, 즉 소설과 에세이 장르가
필연적으로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주제와 내용에는 신산한 사람 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투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소설 문학의 본질이다.
물론 예술의 각 장르가 그렇듯이 소설 문학도 미학적으로 성숙을 하다 보니 발생학적
당위성이 쉽사리 포착되기 어려울 지경으로 기법의 세련과 복잡성, 실험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여서 점점 더 어렵고 난해성을 강조하는 분야도 생겨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이다.
가슴을 적셔주고 공감,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그 본질이다. 20세기 중반의
유태인 문학 르네상스나 할렘 문학이 관심을 끈 것도 바로 이러한 데에 연유한다.
***의 단편소설 “***** **”을 신인상으로 추천한다.
지문의 전개나 서사 구조, 그리고 문장 전개에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추천을 하는 이유는 대략 위에서 말한 소설론 속에 모두 녹아있다.
신인상으로 문단 데뷔를 하고나면 아무래도 이 작가가 갖고 있는 수많은 인간사의 이야기
줄거리들이 소설문학이라는 장르 속에서 끊임없이 형상화되어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적셔주고 공감, 동감의 세계를 구축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신인 등단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여기고 마르지 않는 문학열과 재능으로 글밭을 일구어
나가리라 기대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