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호 출렁다리
기사의 배려로 먼저 들러본 청양의 명물 출렁다리는 2007년 11월 11일 착공, 2009년 7월 28일 개통되었다고 한다.
길이가 207m,폭 1.5m,높이 24m로 국내 최장이며 동양에서 두번째로 긴 다리이다 최대 30~40cm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 있어서 비명지르는 소리도 간혹 들렸다.
부여는 그저 읍 소재지이다.
오른 쪽은 사리감(사리함과 같은 용도)
치미 대체로 용마루에 얹을 수 있도록 밑부분에 반원형의 홈이 패어 있고, 옆면에는 몸통과 깃부분을 구분하는 굵은 융기선이 있는데 그 바깥쪽에는 날짐승의 깃털이 층단을 이룬 형태를 띠고 있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봉황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중기까지 성행했으나, 당나라 후기에 유행된 치문(鴟吻)의 영향을 받아 화마(火魔)를 잡아먹고 살아서 억화(抑火)와 금화(禁火)의 효능이 있다는 물고기 형상으로 의장이 바뀌면서 쇠퇴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지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으며 대신 용두(龍頭)·취두(鷲頭) 등이 등장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부여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치미(국립부여박물관 소장),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출토된 고신라시대의 치미(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천군리 사지(千軍里寺址)에서 발견된 치미(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기림사(祇林寺)에서 출토된 화강암제로 된 치미(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옹관 (甕棺)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상염부락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부여지방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주검을 매장하기 위하여 독널을 특별히 제작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항아리를 그대로 쓴다하여 일종의 호관묘(壺棺墓)라고도 불리운다. 이 옹관은 뚜껑부, 항아리로 구분된다. 파손·복원된 상태이고, 항아리는 밑이 둥글며 짧은 목과 구연은 외반된 상태이다. 어깨부에서 최대로 벌어져 서서히 좁아지는 상태이며, 기면에는 소성이 열에 의해 발생되는 기포(氣泡)가 있다. 기면(器面)의 전면(全面)에는 방향없이 조잡하게 타날된 선문이 나타나있다. 항아리 바닥부분의 중앙부에는 관통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독널로 사용할때 배수를 목적으로 뚫은 것으로 보인다. 색조는 회청색 경질토기이며, 뚜껑부는 자배기와 흡사하고 둥근 바닥에 몸통은 약간 넓어지며 올라가다 한단 좁혀 매우 짧은 목을 만들었다. 구연은 두툼하게 접어 돌리고, 몸통 전면에 선문이 교차된 상태이다. 색조는 회갈색 연질(와질)토기이며, 항아리, 뚜껑등은 모두 고운 점토로 제작된 대형급 옹관이다. 점심 먹은 곳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고란사
고란사(皐蘭寺)는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낙화암이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 (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견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약수를 먹어보아야 부여 여행의 진수를 맛보는 셈인데~~~.
부여는 낮고 부여다웠다. 부여읍~~~
사적 제301호, 정림사지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 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陶俑)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의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고려시대 불상. 보물 제108호.
높이 562㎝. 거불(巨佛)로 오른팔과 왼쪽 무릎이 떨어져나갔고 몸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다. 또한 머리부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전체적인 양식고찰이 어려우며, 왼손의 윤곽으로 보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대좌는 불상에 비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3단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이다. 상대에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의 간석(竿石)에는 큼직한 안상(眼象)이 표현되어 있다. 하대의 윗부분에는 복련(覆蓮)이 있고, 아래의 기단석에는 각 면에 안상이 3개씩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에 전하는 고려 전기의 석불대좌 등과 비교되므로 정림사 중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남지와 연꽃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 (사적135호) 국내 최대 연꽃단지이며 연꽃축제가 2년 연속 대한민국 문화관광축제 유망축제로 선정 10만여평의 연지에는 홍련,백련,수련 등 연꽃 50여종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대표적인 연꽃 관광명소
궁남지는 약 1400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사비성)에 만든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연못이며 안압지(경주) 보다 40년 앞서 조성된 것으로 기록에 전해져 오고 있다 연못 중앙에 포룡정 이란 정자가 있으며 연못엔 잉어와 자라 등이 자라고 주변 빙 돌아가며 심어진 오래된 버드나무가 퍽 인상적인 연못이다 그리고 일본정원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 이야기와 전설로 유명한 무왕이 만들어 놓은 궁남지라는 이야기도 있다.
마침 연례 국화 전시회도 크게 열렸다.
대단한 규모였다.
빅토리아 연꽃
빅토리아 연꽃은 꽃을 피우면 2~3일 피는데 첫째날 낮에 봉오리로 올라와 해가 지기시작하면 꽃봉오리가 4쪽으로 갈라져 흰 꽃을 피운다. 왕관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다가 물속으로 가라 앉아 이틀이면 일생을 마감한다.
꽃은 이미 지고말았지만 지금 남아있는 빅토리아 연잎은 물위에 떠 있고 원 모양이며 지름이 90∼180cm로 크고 가장자리가 약 15cm 높이로 위를 향해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진 모습이다. 잎 표면은 광택이 있는 녹색이고, 뒷면은 짙은 붉은 색이며 가시같은 털이 솟아있다
빅토리아 연꽃은 원산지가 남아메리카 아마존 유역으로 9세기초 영국 식물학자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고 한다. 증식된 꽃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물로 받쳤다는 유래로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늦게피는 수련이 있어서 게으른 방문객을 맞아준다. 고맙고 기이하다.
이제 하루 관광이 끝난다. 서둘러 버스로 달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