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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환인/졸본)에서

원평재 2005. 5. 4. 23:20

환인(졸본)에서

 

연길에서 이도백하까지 버스로 달려온 일행은 야간 침대 열차를 탔다.

3층 6인 칸으로 된 열차가 통화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 30분, 부유한 인상의

이 도시는 통화 전체(그러니까 “통화 메트로폴리탄 에리아”)로 따지면 인구가 250만,

통화 시내만도 60만이 살고 있다는데 한족이 대부분인 도시였다.

 

 

아침을 호텔에 들러서 먹고 “북경 현대자동차”에서 새로 나왔다는 관광버스를 탄

우리는 “오녀 산성”으로 출발했는데 산성입구에서 조선족 남자 안내원과 만주족

여자 가이드를 태웠다.

그들을 기다리며 잠시 정차하는 사이 길거리에서 파는 잉어를 보았다.(012)

 

 

“오녀 산성”을 감싸고 흐르는 강은 유명한 역사적 일화들이 많은 “혼강(楎江)”인데

그 강심에서 막 잡아 올린 물고기라고 한다.

어른 팔뚝만 하다는 표현의 물고기를 철들어서는 여기에서 오랜만에 확인하였다.

산성 밑에서 다시 작은 버스에 분승하여 성문이 있는데 까지 타고 올라가서 다시

가파른 정상을 허위단심 걸어 올라갔다. 999개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야하는

강행군이었다.

 


산의 정상에는 길이가 1000미터, 폭 300미터의 성내 공간이 있고 주거지의 흔적들은

최근에 모아놓은 별로 크지 않은 돌무더기로 조성되어 있었다.

유네스코에 등록하기 위하여 급히 재구성한 분위기였으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적지들이 너무 단순하고 거대한 성채에 비하여 별반 남아있는 형상들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고구려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지낸 역사는 반세기 가량이 된다.

남아있는 유적지가 허무하다는 것은 후세인들의 무관심과 나태일 뿐, 이 곳에는

발굴하면 할수록 유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고구려 이전의 어떤

집단들이 웅거하던 곳에 고구려의 힘이 이를 승계하고 발전시켰다는 사관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은 우물이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예외 없이 수량이 좋은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

작가 최인호의 잃어버린 제국인가 하는 소설에서도 그 점을 단서로 하여

상상력이 종횡 무진한다고 함께 간 기자 한사람이 이야기를 풀었다.

 

 

어쨌든 이 곳에도 우물과 연못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천지”였다.

하지만 백두산의 천지에 비하면 간장종지 정도랄까, 예전에 가 본 천산산맥

정상의 “천산 천지”하고도 비교가 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 연못 수준이었다.


아마도 고구려는 환인 평야, 혹은 졸본에 수도를 정하고 이 험준하고 높은

산성은 만일을 위한 피난처 내지 최후의 방어진지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그런 소극적 해석보다 기마군단을 유지하면서 주위를 평정할 때에

후방의 지휘부는 이 높은 산성으로 들어가서 전역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다시 평지로 내려와서 "하고성"과 "고묘군"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1200기에 달하였다는 옛 무덤들은 혼강을 막고 세운 수력발전소의

댐 때문에 수몰이 되었고, 하고성은 그저 날림으로 만든 표석만 덩그렇게

있었다.

 

 

그 옆의 또 하나의 표석 같은 것은 케이블이 여기로 지나가니 주의할 것과

훼손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주족 가이드에게 거기 서 보라고 하니 부끄러운 듯이 포즈를 취해주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학생 정도의 신체와 인상을 갖인 장효림이라는 이

만주족 처녀의나이는 놀랍게도 22살이었다.

내가 짐짓 손짓으로 저기 흐르는 강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호--온 장”이라고 에쁘게 대답하였다.

만주 말이 지금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다 사라지고 없다고 하였다.

 

우리 관광객들이 부산을 떨고 있으려니 그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매일 이

좁은 골목의 시시한 표석 하나 앞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떠나는 사람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하고성 소학교"라는 초라한 학교가 있어서 역사성을

표상해 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울 근교에 "고기리"라고 하는 고기 파는 집이 많은 유원지가 있다.

산꼭대기에 웬 생선 횟집이 또 그렇게 많은지---.

사람들은 그곳이 고기집이 많아서 고기리인줄로 안다.

하지만 정작 사연은 고인돌이 많은 동네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 낮은 평야지대에서 흙으로 빚은 벽돌로 하고성이라는 평원성을 쌓은

고구려인들은 반세기 만에 자리를 옮긴다.

압록강변의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이들은 웅혼한 기상을 424년간 국내성에서

지내면서 만주 벌판과 중원지역까지 아우르면서 찬란한 다원주의 국가를 유지해

나아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