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개다리 소반만한 남해섬이라고 하였지만 크기만 따져도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이었다.
"제가 먼저 이 섬을 개다리 소반만하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진여고 다닐때
이 섬에서 그리로 같이 간 여학생이 또하나 있었는데 저와는 단짝 친구
였지요.
그 친구가 항상 그런 말을 했지요.
그 친구와 저는 집이 부자라서 진주로 유학을 간게 아니었어요.
그때 독일에 광부로 가신 아저씨들과 간호원으로 가신 언니들이 어떻게
인연이 되어 여기에 있는 가장 가난한 두 여학생을 진주여고로 유학을
보내주신 것이지요.
이 장학금은 오래 계속 되지는 못했어요. 아마도 우리가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지 못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중의 한 학생은 서울로 가버리고
저는 또 고향에 돌아와서 당시만해도 별로 이름난 사람이 되지를 못했기에
장학금을 주신 그 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그래서 후배들을
기르지 못했던가, 자책도 하지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 고두현 시인의 시를 한편 낭송해 드릴께요."
그녀가 이내 고두현의 시를 다시 한편 외었다.
* 안부
-유배시첩 3 - 고두현
동물 끝 바위 갈매기 한 쌍 닿았구나.
벼랑 아래 끊임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
눈에 뵐 만하면 멀어지고
나랏님 열두 번 벼슬
때마다 사양하고 혼자 예 앉으니
망망한 대해가 내게로만 무너지네.
어지러운 잡풀 사이
소나무처럼 우뚝 선 새
해풍에 상하지 않을까
밤이 되면서 근심이 깊어졌다.
물소리 쿵쾅이는 잠 속에서도
새는 떠나지 않고
부리만 갈고 있다.
속절없이 웅숭거리는 바람 따라
하얗게 일어서는 저
뼈, 혹한보다 더 시린
그대의 안부.
그녀의 시 낭송은 마침 관광버스가 앵강만에 삿갓처럼 떠있는 노도를
내려다보는 지점에서 절절히 흘러나왔다.
노도의 앞에는 아주 작은 무인도 붓섬이 노도에 유배 온 서포 김만중의
진짜 붓인양 붓처럼 생긴 자태를 당당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제 친구 정희는 진여고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이 개다리 소반만도 못하게 작은 남해 섬에서 평생을 지낼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무작정 상경을 하더라구요.
가서 무엇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자리를 잡았다고 하고 이어서 결혼을 하였다는 소식도 왔지요---."
이야기가 그쯤 진행될 무렵부터 서해심 시인은 김범수 쪽을 자꾸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하여튼 정희는 잘 난 청년을 만나서 결혼을 하였고 잘 산다고 가끔 전화
연락을 하고 지냈지요.
딸도 하나 낳아서 잘 기르고 있다고---.
내가 때때로 따졌지요. 결혼식이 애들 소꿉장난도 아닌데 어찌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청첩을 하지 않았냐고.
그 애네 집이 가난하고 어렵다는 면에서는 저와 사정이 비슷했어요.
아버지는 고깃배 타고 나가셨다가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미역과 전복
따는 잠수(潛嫂), 그러니까 해녀 노릇을 하시다가 뭍으로 개가를 하셨지요.
그러니 남해와는 연고가 다 끊기고 말았어요.
저희 집은---, 그냥 가난했어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김범수를 한동안 쳐다 보았다.
"제가 개다리 소반만한 남해를 지키려고 한 것은 네 귀퉁이의 개다리처럼
별건 아니지만 뚜렷한 그런 이유가 있었지요.
첫째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니 버릴 수가 없다. 두번째는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고장이다. 셋째는 모두가 버리고 떠나버리는 곳이라서
불쌍하고 가련한 대상이다, 나만이라도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네번째이자 끝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지키면 마침내 비장한
승리가 돌아오리라---, 그런 고집 때문이었어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 예언과 고집은 어느정도 적중했다고 감히
선언을 해봅니다."
"옳소!"
항아리를 안고 있던 김범수가 그녀의 시선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그의 돌출 반응에도 별로 웃지 않았다.
그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저는 사실 지리산 빨치산의 후예쯤 되는 사람입니다. 제 외할아버지께서
1950년대에 지리산에 들어가셨다가 전사하시고 제 어머니께서는 유복자로
태어나셨답니다.
어렵게 자란 이 처녀는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뱃사람 청년하고 눈이
맞아서 결혼을 하고 저를 낳았는데 그 해에 연평도까지 올라간 제 아버지의
고깃배가 북으로 들어갔답니다.
북에서는 의거 월북이라고 하고, 결국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지요.
한참 전에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김만철씨 가족이 남으로 내려왔는데
그분들이 이 곳 남해에 큰 집을 짓고 정착했지요.
감개와 감회가 무량했어요.
저는 박해 받는 사람은 무조건 동정하고 그 편이거든요.
지리산에 들어가신 외조부도 좌익, 우익이 아니라 자유의 편이셨을
겁니다.
그런데 김만철씨네는 사기를 당해서 이 곳을 뜨고 말았지요.
저 큰 집이 그 분들이 지어서 숙박업을 하려고 했던 곳이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팬션같은 집을 지어 살고 싶었던것 같아요.
저 앵강만을 내려다 보면서 말이지요."
그녀가 가리키는곳에 큰 집 하나가 주위에 어울리지 않게 덩그렇게
앉아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