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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세요? (5회; 징글벨과 함께)

원평재 2006. 12. 14. 06:14

"서울 역, 그래 서울 역 이야기를 하자.

내가 성악을 해도 무드에 약하지 않고 얼음짱 같은 데가 있다만 이젠 너도

다 컸고, 다 큰 딸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도 싶구나.

어째 눈이라도 내릴 것 같고---.

아니, 그 보다는 자신을 잘 지켜달라는 숨은 뜻도 있고.

내가 성인 합창단에 있을 때는 외국 공연이 많았지만 국내의 지방 공연도

적지 않았지.

KTX도 없던 시절이라서 주로 비행기로 다녔는데 그 날 공연 예정일에는

폭설이 내려 특급 열차를 타러 서울 역으로 모였단다.

몇번 갈아타서라도 지하철을 이용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만 택시를 탄게

화근이었지.

하긴 그때는 지하철도 여러 노선이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탄 택시가 지하철 역도 없는 어떤 곳에서 눈 속에 갇히고

휴대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던 때라 헐레벌떡 달려간 서울역에는 30분

지각이었지.

들고간 한복 트렁크를 서울역 광장의 수북하게 쌓인 눈 위에 집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몸이 막 달아오르는데

아, 거기 지휘자 선생님이 달려오고 있지 않겠니.

나와 지휘자 선생님은 그 눈밭 위에서 포옹을 하고 말았다.

단원들을 특급열차로 내려 보내고 그 분은 나를 기다리신거였다."

말을 하며 이정미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전체를 버리고 나 하나를 택하신거라는 감동과 감격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더라."

"에이, 엄마가 너무 순진해서 지휘자 선생님이 걱정이 되어 남으셨겠지.

한 마리 잃어버린 사슴---."

"사슴이 아니라 양이다, 이것아."

"눈 위에서는 사슴이 좋아요."

"초 치지말어라. 돈텔 파파라고 무드 잡더니 나 이야기 안할래."

"미안해요. 엄마. 제발---."

"내 아름다운 비밀 앨범을 펼치려니 후회할 것 같은 생각도 미리 되고---."

"키스도 했죠? 아 설원의 키스---."

"얼마나 달콤했는데---. 눈이 온 새벽의 서울 역 앞 광장을 생각해 봐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고.

사실 말이지만 나와 지휘자 선생님은 벌써부터 공연 때마다 서로 눈을 맞추고

있었단다.

단원들 중에 그걸 눈치 챈 사람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어.

우리는 그 공연의 레파토리 중에서 가장 하일라이트, 특히 그것이

피아니시모로 사라지는 부분에서는 주체못할 감격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서로 눈물을 흘렸지.

그 희열, 그 감격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다른 단원들도 모두 자기 때문이거나 그 날 공연이 성공하여서 지휘자

선생님이 전체적으로 감동 받은걸로 알았으면 어떡해? "

 

"그건 상관없었지. 아닌게 아니라 다른 단원들은 지휘자 선생님의 눈물을

대충 그렇게 그날의 공연 성공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지.

하지만 그 시선과 눈물의 교환은 지휘자 선생님과 나 사이의 비밀이었고

우리가 가슴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명같은 것이었어.

우습게도 우리는 그렇게 다중 앞에서는 사랑을 교환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갖인 것은 그 날 그 눈밭 위에서가 처음이었던가 싶네.

막연했던 우리의 사랑 게임이 그날 처음 서로 확인이 된 셈이었어.

물론 사랑하는 딸아, 오해는 말어라.

우리는 그 이후에도 무대에서만 교환하는 눈물의 사랑 의식으로 일관하고

탐닉하였지 무슨 진도가 더 나간건 아니었느니라. 맹세코!

그렇게 눈물을 한번 흘리고 나면 나는 내 몸이 다 졎었고 흠씬하게

카타르시스를 느꼈단다.

존재를 행위가 승리하였다는 말이 있더라만 우리는 행위를 존재가

이겨냈다고나 할까---.

그런 사랑을 엄마는 오래 한 셈이었다."

 

"그럼 엄마가 합창단을 그만 두신건 무슨 사건이랄까 이유가 있었나요?"

"아니야, 천만에. 슬픈 일이지만 나이가 많아져서 그렇게 되었지.

난 네 아빠께 항상 감사한다.

바쁜 공직에 가정 생활을 돌볼 수 없게되자 내게 전공을 살리도록 배려해

주셨고 항상 미안해 하셨다.

아무튼 별일 없이, 정말 존재가 행위를 이기며 합창단 생활을 해나오다보니

신입 단원들과의 나이 차이가 주체할 수 없이 벌어지더구나.

할 수없이 거기를 그만 두어야 할 때가 자연스럽게 왔고 우리는, 그래 우리는

헤어져야할 때가 왔다는 걸 느꼈다.

헤어질 때에도 극적인 일은 없었다.

다른 단원들도 나갈 때는 으례 그러했듯이 공식적인 페어웰 파티가 있었고

우리는 둘 사이의 대화가 가능했던 짧은 시간에 서울 역, 눈 오는 날이면,

그렇게 만나자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했지만 한번도 그걸 실천하지는 못했단다.

눈 오는 날이면 너희들 데리러 차 몰고 학교로 달려갔지 내가 옆으로 새서

너희들 눈 맞게 한 날 있었니?"

 

"엄마, 그러니까 이제는 눈 오는 날이면 서울 역으로 달려가시라니까요."

딸이 진정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어느새 두사람은 신촌 로타리까지 꽤 긴 길을 걸어서 나오고야 말았다.

징글벨 소리가 요란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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