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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행복했던 낚시여행 (2)

원평재 2007. 3. 20. 08:05
 

물론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어를 잘 익혀서 미국으로 가는 것이 당시

젊은이들의 일차적 목표였으나 가난하고 빽 없고 하다못해 당시의 표현

대로라면 "양공주" 누이와의 연고조차 없는 이 땅의 맨주먹 자식들이

미국이라는 천국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서독 광부나  간호원으로 유럽 땅을 밟은 청년들이 불태운 젊은 꿈이

꼭 미국행의 대안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 미국행,

혹은 외국행에 대한 젊은이들의 꿈은 가히 염원에 가까웠다.

그럴때 하늘이 도왔는지 갑자기 "남미"라는 대안이 등장한 것이었다.

 

 

                육식어 삐라냐 낚시에는 쇠고기가 미끼로 사용된다.

 

 

 

 

한익준이 어렵사리 마련한 입학금을 들고 그때까지는 잘 알지도 못했던

스페인어 과에 등록을 할까말까 망설이던 중에 파라과이와 브라질로의

이민 통로가 생겼다는 소식이 언론을 탔고 다소 센세이셔널한 그 기사를

읽으며 그는 거금을 당장 밀어넣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남미의 아마존이나 팜파스 대평원을 달리며 호연지기에

가득하였고 꿈과 현실은 경계도 없이 그의 말과 행동을 넘나들며 지배

하였다.

실제로 그는 "라틴 특공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기와 비슷한 꿈을 갖인

청년들을 모아서 남미 생활에 관한 정보도 교환하고 스페인어를 함께

익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가 쪽으로 파라과이에 이민을 떠났던 친척들이 농업 이민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여 맨해튼에서 음식 장사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한동안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 혼돈의 기간동안에 군대를 갔다가 복학을 천천히 했다.

1111 야전 공병단, 속칭 "닐리리 야공단"이라면 고생 바가지로 악명이

높은 부대였는데 그는 자원하여 남들이 싫어하는 그리로 갔다.

그는 중기 운전을 그 곳 부대에서 배운다음, 제대를 하고는 그 기술로

건설 현장을 좀 돌며 돈을 모아 천천히 복학을 한 것이다.

복학을 하고나서 그는 스페인 어는 이제 건성으로 하고 영어과에서 주로

청강을 하였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헤밍웨이의 단편에는 꿈과 좌절, 기약과 허무가 공존하였다.

단편 속의 주인공, 닉 애덤즈의 고뇌를 자신의 것으로 감정 이입하며

그는 자신이 리얼리스트이자 로맨티시스트임을 발견하였다.

 

아무튼 외가 사람들이 불법체류자의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불체자

특별 사면령"의 덕택으로 그린카드를 따낸 덕분에 그는 어머니를 따라

20대 후반에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때만 하여도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의 권속들도 쉽게 초청을 받아

미국 입국이 되던 시절이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가족들에게 평생 도움이 되지 못하던 아버지는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인근에서 처음 노점상을하다가

밥집인 델리카티슨 점을 꾸려나갔는데, 그는 한동안 그곳에서 허드렛 일을

하며 야간에는 조리사 과정을 다닌 끝에 마침내 주방장이 되었다.

송정자는 한국에서 그와 갓 결혼한 상태였는데 미국에는 남편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지만 역시 같은 델리점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경력과 크레딧이 조금 쌓이자 그와 그녀도 외삼촌들이 했던 그대로 본을

받아 모기지를 얻어서 작은 가게를 내었다.

 

뉴저지 쪽에 사는 한인들이 버스나 페리를 타고 맨해튼으로 건너오면

지나게 되는 길목에다가 그는 "한 델리"라는 간판을 붙이고 샌드위치와

빵과 특히 순대를 팔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특별히 한인들에게는 냄새가 나지않게 밀봉한 비닐 팩에 김치를 넣어서

팔며 한글로 된 미주판 H, J. 신문도 갖다 놓아서 고정 고객을 잡았다.

 

"한 델리" 점이 초창기, 뉴욕에 한인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에는 이런

정책으로 먹고 살만 하였으나 돈을 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시절은 푸에르토 리코나 멕시코에서 건너온 히스페닉인들의 천지로

급변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Han Deli라는 간판을 Khan Deli로 바꿔달고 멕시칸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Khan이라는 성씨의 유래는 잘 몰랐지만 유태인이나 히스패닉들에게

성씨가 심심찮게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래의 간판에 슬쩍 K자를

하나 더 붙이고 음식도 칠리 소스를 잔뜩쳐서 히스패닉 쪽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정책은 적중하여서 아침부터 점심까지 가게는 문전 성시를 이루었고

한익준도 이제는 주방을 벗어나서 판매에만 전념하였다.

주방에는 페드로라는 이름의 히스패닉 주방장을 하나 들이고 젊은 파트

타임 여종업원도 하나 더 두었다.

그녀는 불리비아 출신인가 하는 인디오 인상이 많이 묻어나는 역시

히스패닉 계통이었다.

 

주방장, 페드로는 미남이었고 송정자는 은연중에 그와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한익준은 오래동안 좁은 가게에서 과로를 하여서 그런지, 나이 탓인지

당뇨가 시작되었고 부부간의 성기능이 급속도로 떨어져서 거의 임포

상태가 되고 있었다.

송정자가 주방에서 새로 고용한 주방장 페드로와 공공연히 애무를 하고

키스를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아들 하나, 딸 하나인 자식들은 한국식 부모의 시각으로 보면 말썽도

많이 부렸으나 놀랍게도 보스톤 쪽의 괜찮은 대학으로 들어가더니

방학이 되어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한익준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식들이 곁에 있다한들 아버지의 이런 사정을

하소연할 형편이 아니었을 터이지만 그나마 호소할 상대도 없었다.

 

송정자는 원래 외대와 이웃한, 당시만 해도 거친 매너로 유명한 어떤

대학의 체육과 학생으로 그 대학 응원단의 일원이었다.

이른바 치어 리더였던 것이다.

엉덩이가 훤히 보이는 응원단 옷을 입고 "아카라카 차, 아카라카 차",

어쩌구 하며 춤을 추는 치어 우먼과 그는 학교가 가까워서 우연히 인연을

맺었다.

아니 학교가 가까운 탓의 우연이라기 보다는 그가 외가쪽 연줄로 미국을

가게 되었을 즈음 송정자가 그에게 접근을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정황

설명일는지도 몰랐다.

대학가 찻집에서 그가 친구들에게 곧 실현될 미국행을 자랑하고 있을

때에 치어 리더들이 우연히 가까운 데 에 자리해 있었고 그게 인연인지

필연인지 하여간 그날 삼겹살 집으로 두 팀이 자리를 옮기며 송정자의

육탄 공격이 있었다.

시대를 앞서 간 맹렬 여대생의 행동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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