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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시대 (7)

원평재 2007. 6. 9. 00:59

어중간한 시간에 브런치라는 어중간한 음식을 먹으며 정오도 안된 시각에

와인까지 곁들여 한잔 마시고나니 갑자기 일탈의 나른함이 두사람 앞에

밀려왔다.

그 사이 밖으로는 소나기가 몰려오는 것이 대형 유리창으로 보였는데

스테이지의 무명 가수는 조용한 사랑 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더니

순발력있게 "소낙비"로 레파토리를 바꾸었다.

힘찬 노래의 가사는 듣고 보니 사실 한을 품어내는 절규였다.

향기 좋은 커피를 후식으로 마시면서 두사람은 작은 사연에도 크게

감탄하며 노래 소리보다 한 음정 높여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식탁 화제는 웰빙으로 시작하였지만 결국 불임과 인공수정으로 귀착

되었는데, 그녀는 섹스에 관한 것도 고백하듯이 감추지 않았다.

그녀의 팬티가 또 조금 젖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현상도 고백하였다.

 

의사라곤 하지만 아직 총각이 무얼알랴---,

성인 남녀들은 사람에 따라 그런 현상이 치열한 경우도 있단다.

또 불감증이란 것도 세상에는 존재한단다.

영화나 TV 화면에 비치는 정사 장면의 극치감이 결코 과장만은 아니란다.

이 세상 모두에게 다 돌아가는 축복은 아닐지 몰라도---.

나도 그걸 놓치고 나서야 이제 겨우 갈망하게 되었어.

청년이여, 어른들 사이에는 그런 복합 현상들이 존재한단다.

몰랐지?

그런 생각들이 그녀의 심리 저변에는 깔려있었다.

 

"그거 모두 아름다운 현상입니다.

건강하다는 신호랍니다. 내분비 계통이 왕성해야 몸이 건강한 것이지요.

웻 버자이너(wet vagina), 여성 생식기의 젖음 현상, 그건 푸른 신호등

이랍니다.

젖다라는 말이 나쁜 표현도 아니구요.

포르노에서는 의태어, 의성어로 달리 자극적 표현을 찾아쓰잖아요.

그런건 비속어이고, 의학 교과서에서는 그런 현상을 정식으로 웻, 젖는다

라고 적는답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이래서 의사가 나쁘다는거예요. 총각 남동생, 아니면 시동생 같은

청년이 알고보니 중년의 누님 뺨치겠어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건 마음이지요. 마음이 인체의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그거야 헤드, 머리 속에 있겠지---."

"그건 근대 생물학적인 지식에 불과하지요. 저는 가슴, 하트에 마음이

있다고 믿어요.

마음 표시를 지금도 하트로 하잖아요.

아시다시피 중세의 서양 화공(畵工)들은 해부학의 달인들이었어요.

그런 그들도 마음은 가슴에 있다고 믿었지요.

저는 제 가슴이 맑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여기 머리, 대뇌의 주름진

잎새 어딘가에는 병이 들어있는것 같아요.

여자를 두번 이상 만나지 못하니깐요---.

한번 만난 여자의 약점을 이놈의 대뇌가 분석, 감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가슴을 달구어줄 여인을 갈구하는데 말이지요---."

 

"내가 오늘 먼저 말을 건 것이나, 아침부터 서두르느라고 이렇게 지쳐

빠진 얼굴 모습도 다 약점이 되었겠네---. 두번은 커녕 오늘 이걸로

우리는 빠이 빠이, 밀레의 만종을 치고 말겠어요.

밀레의 만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그림에 보이는 바구니에는

아기의 주검이 담겨있다는 소리 들어봤어요?

"네에? 뭐라구요?"

그가 외치듯 그녀를 쳐다았다.

"아이구 너무 과민 반응은 마세요. 그냥 식후 한담이래요~."

그녀가 아이들 말버릇을 흉내 내어서 분위기를 눅이려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 작가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가 제기했던 이야기인데 밀레의

만종에 있는 저 감자 담긴 바구니 속에는 원래 아기의 주검이 들어

있었다네요.

천재 화가 달리는 이 만종 그림을 보기만하면 몸이 으시시 떨렸다는데,

그건 바로 아기의 주검이 담겼던 저 감자 바구니에 천재의 감성이 감응

되었기 때문이래요.

그후 사실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만 있었는데, 어느해 루브르 박물관을

침입한 자의 칼에 손상이 된 밀레의 그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밑 그림이 X-레이로 투시되어 나왔는데 달리가 이야기한 그대로였대요.

밀레가 친구들의 충고대로 비평가들과의 말썽을 피하기 위하여 아기의

주검에 덧칠을 하고 감자 모양으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그거참, 감자같은 이야기이군요---. 그때만 해도 방역과 위생이 말이

아니어서 유아 사망율이 끔찍한 수준이긴 했어요."

"나같으면 고구마를 그렸을까---?"

"그럼 고구마같은 이야기네요."

"나 참, 우린 왜 또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말장난에 희희낙낙이지요?

저 풍요로운 수확의 들판에서 하루의 일을 마치고 만종에 맞추어 감사

기도하는 평화로운 부부의 모습에 그런 끔찍한 설화가 따라붙듯이

한순간에 소낙비처럼 다정해졌던 우리도 이제 곧 헤어져야할 끔찍한

일만 남았나 싶네요---.

무거운 머리에 가벼운 가슴으로 기회가 생겼는데 아쉽기만 해요.

시각은 아직 정오도 아닌데, 불임에 석양의 만종이라니---."

 

"정말 이건 말도 안되네요! 만종에 서린 주검 이야기와 감자 바구니,

그리고 불임에 수정 이야기, 소나기처럼 만났다가 헤어짐---,

도대체 너무 가혹하군요."

"세상에 말이 안되는 일이 어디 한두가지라야지요. 나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만 화폭에 옮기며 살아왔어요.

푸른 잎새가 내 전공이었어요. 타이틀도 맨날 잎새 원, 잎새 투, 이런 식

이었고---. 그런데 그 잎새의 뒷면에 그렇게 많은 벌레와 병원균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줄은 몰랐었네요---.

불임 이야기가 나오던 시기에 우연의 일치인지 그런게 눈에 띄더라구요.

어쩌면 그때부터는 모두 부정적인 것만 눈에 보여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내가 즐겨그린 잎새라는 말 자체가 바른말, 그러니까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도 그제서야 또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렇군요. 그런 뒷면을 외면하고 싶어서 저도 두번 이상은 여자를 만나지

않았는가 싶어요.

지금 제 머리 속에서는 자꾸만 경고음이 들려요.

오늘의 도슨트, 김미희 선생님은 제게 너무나 벅차고 겁나게 예뻐요.

아름다운 여자는 고약한 마음을 가졌다는 제 공식도 지금은 무너졌어요.

이게 무슨 철 지난 로맨티시즘도 아니구요.

제가 감당도 못할 이 감정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하나,

하여간 그렇게 계속 만나고 싶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요.

총각이 그런 대상의 처녀를 찾아내야 할텐데 말이지요.

두려운 생각이 자꾸만 드는군요.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아침부터 내내 고혹스런 얼굴과 청아한 목소리에 제가 정신 차릴 수 없이

몰입되었지만, 결혼한 부인이시라니 제 가슴이 터지기 전에 컷 오프하고

말께요."

 

"그래요. 그런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말이지. 하지만 영화나 TV나

소설 같은데에서나 나올 것 같은 작별의 말을 정작 내 귀로 듣고보니 참

슬프네.

상담 의사나 시동생처럼 우리 계속 만나면 안될까?"

"둘다 아니잖아요. 전공도 다르고 시동생도 아니고---."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서로 그렇게 여기는 마음이면 되지않나?

그리고 전공은 생명 과학이 사촌간이랬잖아---.

아니야, 우울한 내 욕심이지. 좋아요.

어쨌든 오늘 참 오랜만에 불임의 수심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몸이 하늘로

둥둥 떴어요.

아직은 내가 겁나게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그 말, 그리고 고혹과 청아라는

찬사에 무지 무지 위로를 받는 김미희래요."

그녀는 아이들 말씨를 흉내내서 슬픔을 감추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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