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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야원(사르나트) (인도 기행 4)

원평재 2007. 10. 7. 20:50

일정에 따라 바라나시로 긴 기차여행을 한 것은 다름아니라 잘 알려져있는

갠지스 강에서 일상 일어나고 있는 인도인들의 그 생활 퍼포먼스랄까,

저 시원을 가름하기 어려운 과거로부터 내려 온, '현재 시재의 신화'를 보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더러운 강물을 성수로 여기고 그 곳에서의 침례의식, 입욕,

마시기, 또 함께 벌어지는 화장과 열반 의식---.

 

일행이 바라나시 도시에 도착한 것은 거의 정오 가까운 시간---.

내일 아침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갠지스 강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무엇을 할까,

그 전율의 장면과 대면하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듯,

공연히 마음이 쓰이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바라나시는 역시 바라나시였다.

알고보니 이 곳에서 부처님 께서는 생전에 설법을 강론하셨고,

저 유명한 아쇼카 왕은 수많은 정복의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생애 전반부의 악행들을 삶의 후반부에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불교를 대대적으로 선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면서 불교 전파의 중심지로 만든 땅이

바로 바라나시였던 것이다.

그 역사적 현장을 돌아다닐 일들이 만만치 않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라나시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차 여행에서 너무 많이 써버린 시간, 피로, 그리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로

인하여 차라리 호텔에 그대로 눕고 싶었지만 단체 여행의 긍정적 묘미에 따라

부처님과 아쇼카왕의 신화가 서린 땅을 억지로나마 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아, 물론 밥은 먹고 돌아다녔다.

우리가 들어간 호텔의 바로 옆에 한달 전에 오픈한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떼우고 말이다.

스테이크 햄버거는 힌두교의 나라에서 상상도 못하겠고, 치킨 햄버거의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부처님이 설법을 시작한 이 마을에서 특별히 아쇼카 왕의 배려를 받아서

오래 불교의 도량으로 존재했던 곳은 '녹야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슴이 많았던 곳이고 또 인간을 사슴처럼 순량하게 순치한

부처님의 공덕이 상징적으로 내포된 이름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 날은 내내 비가 내려서 저녁이면 갠지스 강에서 펼쳐진다는 일종의 연등행사에는

나가지 못하고 이웃한 포목점에서 인도 대학에 다닌다는 처녀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며

아까운 시간을 보냈다.

 

 바라나시는 평소 나에게 성지와 같은 개념으로 인각되어 있었는데 막상 기차 역에 내려보니 참

허무하고 황량한 가난의 집산지였다.

 

  

   인도 소년 소녀들은 외국인만 보면 손을 벌리는 거지로 돌변한다.

 

 

 

 

   바라나시 포터들의 특이한 복장들---. 짐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싯달다가 설법, 강론하신 녹야원이 멀리 보였다.

빗 속에 나타난 그 자태는 단숨에 나의 뇌리에 아름답게 자리잡았다.

.

 

  

 

 

 새로 발굴과 복원작업이 한장이었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공간들이 허무하지 않게 옛날을 말하고 있었다.

아쇼카 왕의 공덕이었다.

 

.

 

 아쇼카 왕 때에는 이 돌 기둥이 하나로 높이 솟아있었으나 세월 속에 이제는 몇동강이

나 있어서 따로 따로 이렇게 세워놓았다.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기이한 모양의 탑신 속에는 특별히 언급할 무엇이 없단다.

세상사 모두 이렇게 내부에는 허무 뿐인데 공연히 외양으로 사람들이

날뛰고 있다는 의미를 전달코자 세웠다고 한다.

옳다---.

  

  

 

 부처님의 설법 당시나 지금이나 이 곳은 사슴들의 낙원이였다.

관광객들이 먹이를 사서 던져준다.

 

 

 

 

  

  녹야원을 나와서도 비는 줄기차게 내려서 일행은 그냥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에는 인도 춤을 감상하였다.

인도 대학에 다닌다는 아가씨가 학비를 벌려고 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반주를 맡은 두 청년이 서로의 악기를 조율한다.

왼쪽은 드럼이고 오른 쪽은 시타(cuitar)라는 이름의 아코디언 같은 악기였다.

모두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춤을 출때마다 방울 소리인지 요령 소리가 요란하였다.

거의 엑스터시를 유발할 수준이었다.

춤이 있으니 노래가 당연하였다.

스페인에서 보고 들은 플라멩고와 포르투갈의 파두가 생각났다.

하긴 플라멩고의 시원이 13세기 인도 북부에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간 집시들의

노래와 춤사위라고 하였지---.

이날 본 이 여인의 춤사위도 기승전결이 뚜렷하였다.

처음 조용히 시작하던 몸짓과 노래는 차차 숨차게 고조되면서 열락을 맛보더니

마침내는 실연과 좌절의 고뇌 속으로 비통하게 빠져들었다.

끝맺음, 결부에서는 다시 니르바나의 열렬한 소망이 애조 속에서도 뚜렷하였다.

 

내일은 새벽부터 갠지스 강으로 갈 일정이었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쇼카 왕의 그 철저하고 막강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왜 인도에서 사라졌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생각되지만 그런 것 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힌두교와 불교는 지금도 의식이나 철학에서 60 퍼센트가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한다.

어쩌면 당시 이미 방대하게 이곳 인도인들을 지배한 힌두교의 교리와 조직의 매너리즘에

대한 싯달다의 치열한 개혁 운동이 아니었겠나---,

그리하여 그 개혁의 정수만 결집하여서 동남아와 멀리 극동에까지 전파되어서

구원의 메시지로 응답받았고 발상지인 이 곳에서는 열대의 원시림이 금방 땅을 덮듯이

'무위자연'으로 되돌아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짧은 사유의 향방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