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호텔을 떠나서 시베리아 벌판을 7시간이나 달린 후에야
민족의 시원이라는 전설이 서린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선착장 "사휴르따"에
도착하였다.
7시간의 여정에는 야생화 군락과 소떼 양떼의 방목장들이 들어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이라는 기억이 대부분이다.
7시간을 달린 길 중에서 다섯시간은 포장 도로였고 나머지는 흰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 도로였으나 견딜만 하였다.
우리는 큰 버스를 타고 선착장까지 달려왔으나 현지 관광객들은 이렇게 작은 차를 타고도 많이 들어왔다.
우리도 알혼 섬에서는 이 차량을 이용하였다.
이름은 우아직, 2차 대전때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에 앰뷸란스와 긴급 차량으로 사용되다가
퇴역한 4륜구동의 힘이 좋은 차량이라고 하는데 미군의 험비 차량 비슷하였다.
데탕뜨 이후, 동서 냉전이 끝난지가 얼마던가---.
코카콜라 상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가 민족의 시원, 징기스칸 어머니의 고향 땅에 뿌리를 박았다.
알혼 섬에 징기스칸의 무덤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무성하여서 한때 무덤찾기 경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탐사가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부랴트 계통의 처녀 종업원이 선착장의 간이 식당 겸 상점을 지키고 있다.
몽골리안 계통의 주민들은 사진 찍히기를 기피하였고 노랑머리 주민들은
렌즈 앞에 노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 눈앞에 드디어 바이칼 호수가 나타났다.
가슴이 뛰었다.
이 바이칼 호수를 건너 들어가면 알혼 섬이 있고 그곳에서는 선녀와 나뭇군 비슷한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선녀와 나뭇군은 열두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의 이름은 "고리"라고 하여서 이곳을 떠나 머나먼
이동을 하면서 부여족이 되고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민속학자들은 추정, 혹은 주장하고 있다.
이 곳에서 흔히 보는 우리의 서낭당과 같은 흔적들도 혈연의 맥박을 느끼게 한다.
선착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알혼섬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무슨 기가 서린듯 유현한 느낌마져 든다.
이르쿠츠크에서 온 일단의 여대생들이 고향을 찾은 예, 맥 족의 후예에게 친근함을 보인다.
선수들인가 싶을 정도로 따뜻한 정분을 보인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이르쿠츠크에도 선수촌이 있긴하겠지만.
아, 웅혼한 알혼 섬이여~~~.
옛날 옛적부터 몽골 혈통 부랴트인과 우리의 조상은 친연으로 연결되었다.
그들도 몽골에서처럼 한국을 솔롱고스라 했다.
몽고반점도 공유하고 이곳이 외가인 칭기즈칸과 한국 공주는 결혼도 하였다.
유전자 지도를 보아도 부랴트인과 우리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관계가 있다고 한다.
중국인보다 한국인의 게놈과 비슷하다는 연구 분석도 있다고 한다.
귀국 후 성균관 대학교의 서정돈 총장과의 대화에서 이 방면에도 일가견이 있는
서 박사는 마이토콘드리아 DNA 분석으로도 우리와 부랴트 족의 친연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주었다.
비록 가벼운 저녁 식사 자리이기는 했지만---.
부랴트 족들이 갖고 있는 신화와 단군신화 혹은 그이후의 건국설화도 유사한 점이 많다.
이 부분은 연재의 후반부에서 다루어 볼까 한다.
하지만 "So what?!"
오늘날 우리민족 내부의 공동체 의식조차 희미한 이 역사의 순간에
이 활량한 벌판에서 만년전의 친연을 따지는게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서울 명수학교는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특수학교임을 귀국 후에 알게되었다.
이와 똑같은 스쿨버스가 지금도 여러대 다니고 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학교는 서울 과학고(지금은 서울 영재학교) 바로 뒤에 있다.
알혼 섬의 선착장에는 부랴트 계통의 사람들이 배를 접안시키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많이 본 얼굴같기만 하다.
우리가 타고 다닌 우아직 지프차와 기사
알혼 섬 남쪽을 집중 답사하였다.
이곳은 중간 기착지인 한호이라는 명승지이다.
바위에 붙은 자주색 식물은 이끼류인데 푸른 이끼가 자주색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몇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푸른 이끼 보다도 생성 연대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듣고도 잊었다.
알혼스키 호협(해협이 아니고)을 건너서 호변을 따라가다 보면
샤라누르 호수라고 하여서 모래톱(사구)이 만든 작은 호수를 만난다.
물이 따뜻하여서 호수욕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지금은 부영양화가 심하여서 호수 본류쪽과 통하도록 모래톱을 뚫어놓았다.
그래도 본류 쪽보다 2-3도 더 따뜻하였다.
알혼 섬에는 바다에나 있는 "괭이 비둘기"가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여 후지르라는 전망대로 달려갔다.
알혼섬에서 제일 높다는 전망대에도 서낭당 표지는 어김없었다.
전망대라고 하여서 무슨 인공 구조물을 상상했으나 알고 보니 자연산 언덕일 따름이었다.
멀리 보이는 바위 봉우리가 바로 <불한바위>이며 민족 시원의 터라고 일컬어진다.
이제 내가 두손 모아 모신 <밝한 산>으로 우아작 지프차를 타고 내려갈 순서가 되었다.
저 <밝한산>을 우리의 시원이라고 여기는 주장에는 여러가지 이론도 있을 수 있다.
나도 완전히 그 이론에서 허우적 거리지는 않는 입장이지만 내 정서는 이미
그 어떤 분위기 속으로 깊이 침잠하고 있었다.
바이칼호수 알혼섬 <붉한(BULKHAN) 바위>.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신성하다는 곳이 알혼섬이고 알혼섬에서도 가장 신성하다는 곳이 바로
이 붉한(BULKHAN) 바위.
징기스칸도 알혼섬에 묻혔다고 추정되고 있다.
육당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도 상당부분 이곳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한국인의 뿌리는 크게
▲바이칼리안(밝할인) ▲한반도-만주 원주민 ▲약간의 동남아 등 남방인
▲약간의 유럽인(백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