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팩션 출판 기념회

원평재 2010. 8. 29. 04:34

 

"팩션 출판 기념회"의 초대장을 대학에 있는 친구로 부터 받았을 때에는

무슨 의류 패션 행사인줄 알았다.

이 친구가 국문학을 했는데 무슨 패션 행사인가---,

내가 아무리 외국 공관에만 25년간 돌다가 갑자기 대기 발령을 받고 귀국해서

국내 정세나 동기들의 변화에 문외한 일지라도 국문학자가 패션 디자이너로

둔갑할 만큼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을텐데---.

궁금증을 가득안고서 20여 년 만에 내가 그의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니 마침

통화가 되었다.

우리 둘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막역지교이면서도 때로는 험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소규모 중소 도시였지만 하여간 지방 명문 중고등을 다닐 때는 학교 내에서는

성적으로, 밖에서는 여학생들의 인기 면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나는 외교학과에, 그는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대학교는

같았으나 서로 노는 물은 달라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의 사이는 밀월과 공존과 보완의 시대로 들어섰으며 한동안

술친구로 젊음을 만끽하다가 나는 고시 공부로, 그는 대학원 진학 준비로 각자

자기의 갈 길로 들어섰다.

내가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국 공관을 돌아다닐 때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에

시간강사로 돌아 다녔고 선배 교수의 "가방모찌" 신세라는 푸념을 어느 때이던가,

시골 동기들이 벌인 나의 환송 파티에서 털어놓은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경쟁의 눈길을 던질 여유조차 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으며 결혼에 즈음해서는 그렇게 경합을 벌이던 소도시의 여성 팬들을 제치고

모두 타향의 마누라를 얻었으니 안팎으로 연결될 고리는 모두 끊어진 셈이었다.

세월은 정말 유수와 같아서 이제 우리는 갑년을 눈앞에 두고 다시 만날 참이었다.

나는 백수의 신세였으나 아쉬울 것은 없었고 그는 아직도 정년이 몇 년 남은

노교수였다.

 

"요즈음 출판 기념회 하는 놈이 어디 있나? 만년에 정치판에 나가서 늙은 마누라

고생시킬 꿍꿍이라도 있는 참이야?"

전화통에 대고 내가 기선을 제했다.

"날 무뢰한이나 촌놈 취급 마러. 나도 죽겠다. 제자들의 어쩔 수 없는 강청과

강요에 못 이겨 한 30명만 엄선했는데 넌 내 영원한 맞수라서 내가 뽑아준 거야.

자세한건 만나서 이야기 하자."

역시 교수라서 그런 가 그가 지지 않고 멍군을 쳤다.

우리는 기념회 두시간전에 개최장소인 H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주최 측이니 일찍 나와 봐야 할 입장이었고 나는 그날 두 가지 약속이 겹쳐서

그에게는 인사만하고 자리를 옮겨야할 처지였다.

 

로비에서 반백의 머리털로 우리는 얼싸 안았다.

"이게 무슨 촌놈 짓이야? 그리고 팩션은 또 무슨 소리야? 패션 쇼 하는 거 아니야?"

반가움도 제쳐놓은 나의 공세였다.

"이놈아 팩션도 모르고 무슨 대사 노릇하고 다녔어. 요즈음 새로운 문학, 문화 예술의

트렌드도 모르고서 무슨 국위선양이냐 말이야."

그의 매서운 역공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대는 정보화의 시대라서 옛날같이 지식이나 정보가

몇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어서 문학의 세계에도

큰 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실을 너무 많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 걸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의 대부분은 가공된 것일 수 있는데 대중은 그런 부분을 모르거나

눈을 감고자 하고---.

또한 너무나 엽기적인 사실 혹은 현실이 눈앞에 영상으로 시시각각 전개되어서

이제는 픽션, 즉 허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외면을 한다고---.

"소설"이니 "픽션"이니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문학 장르의 팔자가 급전직하해

버렸다.

 

이제 그렇지 않아도 영상매체가 기승을 부리는 판에 마침내 사람들의 의식까지

냉엄하게 돌아섰으니 허구를 리얼리즘, 즉 진실이니 사실주의니 하고 팔아먹던

소설가가 이제는 주린 배를 움켜쥐다 마침내 씨가 마를 판이 되었다.

"소설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여기에 탈출구로 등장한 것이 사실 즉 fact와 허구 즉 fiction을 결합시킨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였다.

사실을 깔고 허구로 가공한 정도는 되어야 눈길이라도 줄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기술적으로는 주인공이나 나레이터가 1인칭 즉 "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바쁜 시간에 그가 자세히 설명해 주엇다. 교수의 면모가 여실한

측면이엇다.

 

"그럼 나 같은 자네 주변인이나 사건을 막 써 먹는거야?"

내가 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물었다.

"아니지. 사실은 모두가 가짜인데 일부 진짜인척 해놓는거지."

"그럼 옛날 글쟁이들 소설과 무엇이 달라?"

"옛날 소설이 정보를 가르치는 식으로 쓰여졌다면 팩션은 우리 시대의 공유된

정보를 확실한 사실로 바닥에 깔고 사건이나 인물을 설정하는 거야.

옛날 소설에서는 대통령을 다룰 때에도 가공의 인물이거나 가명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대통령을 경무대나 청와대 어느 방에서

실재로 만나는 것처럼 써먹는 거야.

영화에서도 팩션 장르가 많아.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실재로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고 대통령은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가 진행되지.

이건 고도의 전자 기술로 가능해졌고---. 어떻게 죽은 대통령과 살아있는

영화배우가 악수를 할 수 있겠어---,

그게 가능케 하는 게 요즈음의 테크놀로지야."

 

"사실을 잘못 써먹다가 고소 당하겠다."

내가 순간적인 생각으로 반응을 보였더니 그의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팩션이 아니라 픽션일 때에도 작가들은 그런 일을 많이 겪었지.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쓰고 나서 당시 파리에 와있던 미국의 젊은 작가

지망생들, 소위 국적 이탈자들로 부터 맹공을 받았고 특히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같은 작가는 권총을 들고 헤밍웨이를 쫓아다녔대요.

비겁한 유태인으로 자신을 그 스토리에 투영했다는 거지. 헤밍웨이로서야

억울하게 질겁을한 사건이었지만---.

토마스 울프도 고향 이야기를 바닥에 깔고 허구를 그렸으나 고향 동네 사람들은

그를 경원하였지.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라는 장편은 그런 배경이야.

예전에 연속 TV 드라머로 나온 '페이턴 플레이스'라는 외화도 여주인공이자

작가가 그런 난처한 입장에 빠지더군."

 

"자넨 그런 경우가 없어? 월간잡지에도 간혹 자네 이름이 나오던데."

"나라고 왜 그런 일이 없겠어. 더구나 팩션이라는 장르를 고집하다보니

등장인물들을 가급적 실물처럼 그리게 되고 이걸 또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를 그렸다고 오해하는 거지. 좋은 인간상으로 등장하면 그나마

문제가 덜 심각하지만 글이라는 게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고 희화화하거나

패러디하는 것 아닌가. 누구 피알하는 식이어서는 글이 안 읽히고 의미도

반감되잖아.

그래서 오해를 가끔 받아. 고약한 경우로까지 발전하여 주위에다 내 신상을

비방하는 경우도 있고---.

본인은 복수라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그 본인이라는 게 참 우스운 가설이거든---."

"화해하면 되잖아---."

"가상의 것으로 화해라니 그것도 참 희한한 일 아닌가. 또 그런 시도를 해봐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이 깊지. 일종의 나르시시즘일

수도 있고---. 아이구 입 다물어야지 이게 또 문제의 발단이 될라.

최근에도 자네는 모르는 어떤 친구와 그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내 나름의

화해 시도도 있었고 본인도 팩션이라는 의미를 조금 이해해 주기로 한 것인지,

모르긴 해도 마음이 다소 풀린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오늘 초대를 했는데 올지

안 올지는 반반일세. 오해가 풀리길 바란다 라기 보다 마음이 풀렸으면 좋겠어.

내가 그의 입장 비슷한 것을 팩션으로 썼지만 절대로 그에 관한 사실이

아니었거든---."

 

"자네가 젊은 날의 창작의욕을 만년에 다시 불태우는 건 이해가 가지만 무슨 실질적

이득이라도 있나? 이런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 벌이 되긴 힘들 것이고---.

베스트셀러야 여자의 몸 틈새 떨림, 하하하, 그런 게 자주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하하."

"예끼! 하긴 예끼 할 일도 아니네. 마르시아스 심이라는 우리나라 작가가 쓴

'떨림'이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많이 나갔지---.

하여간 순수 창작집도 출판이 되면 우리 같은 대학 교수는 업적 평가에서 100%

점수를 따지. 이 나이에는 논문도 이제 울거 먹을대로 울거 먹어서 쓰기 힘들고---,

이건 히히히 하고 웃어야겠다."

 

내 친구는 실제로 히히히 하고 웃었다.

"그런데 그 오해가 생겼다는 친구는 자네 글을 어디서 봤다는 건가?"

"아, 인터넷 세계에는 글 올리는 공간이 크게 둘인데 하나는 인터넷 카페이고 또

하나는 칼럼이라는 데가 있지. 둘 다 특징과 장단점이 있는데 나는 카페를 사용하고

있어.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오해를 한 친구도 내가 그 카페라는 데로 초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지. 자네도 좀 한가해지면 초대 할 테니 들어오게."

나는 컴퓨터는 질색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이젠 외면할 수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이 말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차츰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내 친구, P교수의

얼굴도 손님들에게 근엄했다가 공손해졌다가 변화무쌍한 표정관리를 시작 하였다.

꽃다발 든 예쁜 젊은 여성들도 눈에 들어왔다.

"서른명만 초대했다더니 저 예쁜 여자들은 무어야?"

내가 좀 힐난 쪼로 말했다.

"아, 대학원생들인데 초대장 없이 다들 모이기로 했나봐. 그 학생들 몫으로는 비싼

호텔 밥도 준비 안했어---. 자넨 바쁘다니까 이거나 받아가게."

내 친구가 책을 주는 게 아니라 예쁜 투명 케이스에 담긴 DVD 롬을 건넸다.

"이게 뭐야? 책은 안줘?"

"이게 바로 e-북이야. 전자책이지. 이걸 컴퓨터나 요즘 나오기 시작하는 e-북 리더기

라는 도구에 넣으면 글과 함께 그림이나 동영상 그리고 음악도 함께 나오는 거야.

글이 시원찮으니까 그림이나 음악이라도 즐기시라는 머릿말로 내숭도 좀 떨었다만

하여간 재미는 훨씬 더할 거야.

그리고 참, 누드 사진과 그림도 예술을 빙자하여 많이 넣어뒀다. 모차르트도 나오고

내가 좋아하는 페이지라는 여가수도 출렁출렁 춤추고 노래하지."

"페티 페이지가 언제 적 가수인데---?."

"아이구 이 밥통. 페이지는 우리나라 여가수야. 하긴 페티 페이지도 나오긴 하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얼마전만해도 700메가바이트의 CD에 동영상으로 노래한곡 밖에

못 실었는데 이제는 DVD롬에 영화 열편이 들어가니 창작집 한권에 영상과 음악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차피 요즈음은 책이 많이 나가기 어려워졌어. 그래서 전자책을 만들면 각 공공

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세 개 씩은 사 주거든. 학생들은 이걸 다운로드 받거나

그냥 도서관에서 접속하여 읽어보지.

출판사나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의 출판비는 건지는 거야. 빈 DVD롬 값도

아주 싸졌고."

"책이 아닌 이런 걸로도 업적 평가에서 100%인가 뭔가 하는 인정을 해 주나?"

"이 사람아. 이런 거라니. 이게 바로 전자책이고 당연히 인정해주지."

 

이제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영원한 맞수 어쩌구 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고 한 서너 걸음 걸었을까, 옷맵시가 아주 뛰어난 노신사가 아주 비싸게

보이는 꽃다발을 들고 나를 건너 내 친구 쪽으로 시선을 주며 닥아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직감이랄까, 노신사의 표정은 매우 애매하였고 몸에서는 찬바람이 도는 듯 하였으나

입술로 부터 마침내 잔잔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하는 듯 하였다.

어떤 화해의 마당인가---. 그러나 나는 뒤돌아 내 친구의 표정을 살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저녁 행사에서 과음 끝에 나는 그 전자책이던가 e-북인 가를

어디에선가 잊고 잃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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