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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웨스트 헤밍웨이 기념관과 땅끝 마을

원평재 2010. 10. 7. 05:49

  

헤밍웨이 기념관은 1851년에 해양건축가인 에이사 티프트에 의해

개인 주택으로 건축되었다.

헤밍웨이는 1931년에 이 집을 사서 두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와 함께

대대적으로 개축하였는데

이 집에 대한 헤밍웨이의 애착은 대단하였다.

시카고 근교 오크파크의 헤밍웨이 생가도 방문한적이 있었는데

규모나 관리가 이보다는 못하였다.

 

헤밍웨이가 사망한 이후에는 사업가 미세스 버니스 딕슨에게로 팔렸는데

그녀가 이 집을 박물관으로 개장했으며 지금은 국가 유적으로 채택되었으나

미세스 딕슨 가족의 사유재산이라고 한다.

 

  

 

   

 

헤밍웨이는 나이가 들어서 파파 헤밍웨이로 애칭되었지만

이곳에서는 "헴"이라는 호칭이 더 보편적이었다.

당연히 이곳 사람들은 "헴 기념관"이라는 표현을 즐겨하였다.

 

그는 왜 이곳 플로리다, 키웨스트 그리고 나아가서 큐바를 사랑하였을까.

나의 질문에 안내인은 헤밍웨이의 변방기질, 아웃로, 아웃사이더 기질을

이야기하였다.

이제까지 나도 헤밍웨이가 북 미시간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나라를 거친

족적, 현상적 사실에만 관심을 갖고 급급히 좇아다녔는데 이제는 왜 그랬을까하는

본질적인 데에도 관심사가 기울어졌다.

 

외과의사이던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한때 이곳 플로리다에 불었던 부동산

투기 바람을 타고 투자를 하였다가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그가 자살을 한 원인의 하나라고도 한다.

이런 일과 일상적 취향의 차이로 부인은 남편을 모질게 대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헤밍웨이도 자살을 했고 할아버지도 자살을 했으며 손녀 딸, 마고 헤밍웨이도

헐리우드에서 자살을 한 것으로 보아서 그런 내력이 이 집안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아버지의 자살이 플로리다에 대한 집착을 불러오지는 않았을까.

헤밍웨이의 지적 자산은 어머니의 덕택이었으나 기질적으로는 아버지 편이었기

때문이다.

 

자살의 원인에 대하여 안내인과 그런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곳에서 돌아가며 자원봉사를 하는 몇사람의 할아버지들에게 그런 귀찮은 대화와

결론없는 논쟁으로 내 언어의 한계를 보여줄 필요는 없으리라는 자칭 지혜로운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사실 이런 유의 정답은 각자의 마음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여기 보이는 가구들은 대체로 둘째부인 폴린 파이퍼가 유럽에서 갖고 온 것이었다.

조강지처를 버린 헤밍웨이는 이 둘째부인의 격조 높은 지출로 고생을 많이한다.

 

 

    

 새로운 정경은 항상 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원의 대나무 숲도 의외의 놀라움이었다.

 

  

     

 

  

키 웨스트에서 처음으로 개인 주택에 만들어진 이 수영장은

지금도 키 웨스트에서 가장 큰 개인 수영장이라고 한다.

헤밍웨이는 집을 짓다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아내 폴린이 맡아서

수영장 부분을 완공했는데

그 당시 돈으로 이만불 정도의 거금이 들어갔다. 

 

헤밍웨이는 스페인에서 돌아와 최종명세서를 보고 놀랐고

수중의 마지막 1센트까지 다 내어준다고 하면서 그 마지막 1 센트는

여기 보이는 초록기둥 아래에 영구히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고양이들을 위한 분수대로는 세계 유일인지도 모른다.

헤밍웨이가 고양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준것인데 장독같은 올리브통

아래에 Sloppy Joe's Bar 화장실에서 쓰던 소변기를 갖고와서

장식용 타일을 붙여 예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고양이들도 소변기인 것을 아는지

통 안의 받아놓은 물보다는 

밖으로 흘러 내리는 물을 마신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고양이 사랑은 극진하였다.

특히 여섯 발가락의 고양이를 행운의 상징으로하여 집착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약 60여 마리가 대대로 이 집안에서 서식하는데

수의사들의 정기 접종도 받고 있다고한다. 

 

고양이는 일반적으로 앞발에 다섯개, 뒷발에 4~5 개의 발톱을 가지고 있는데

돌연변이의 결과로 집고양이들은 다지증에 걸리기 쉬우며

여섯개나 일곱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피카소도 헤밍웨이 고양이 상을 만들어서 선물하였다.

 

   

 

본관에 부속되어서 헤밍웨이가 주로 집필실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지금

그의 저서와 기념품을 파는 곳이 되었다.

  

    

 

 

 기념관은 US-1번 국도 옆에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미국 최남단 마을을 방문하였다.

땅끝 마을인 셈이다.

이곳에서 큐바까지는 90마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큐바에서 온 사람들은 대략 지적,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어서 이곳에서의 발언권도 세다고한다.

 

 

 

 

 

글을 올리다보니 주마간산이 되어서 헤밍웨이의 문학 세계는 별로 언급치 못하였군요.

하기는 여러군데에서 졸필을 탕진한 탓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제까지의 글이 헤밍웨이의 족적을 따라다닌 셈이었다면

이번에는 "왜 그는 시시각각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잠시나마 접근해 보고 싶었으나 사유의 부족과 게으름 때문에 이 정도로하고

마치게 됩니다. 

 

사족 ; 지금도 계간 문예지 <서울 문학인>에 졸문으로 헤밍웨이의 작품 세계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곳 부동산 개황도 모기지 문제로 불거진 세계적 불황의 여파로 20만불

정도면 수영장이 딸린 주택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재산세는 거래가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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