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사주 팔자 2-1

원평재 2011. 2. 10. 06:09

K의원의 후배 사랑은 정치인의 입장이긴 해도 유별났다. 
갖은 명절 때마다 동기와 후배를 엮어서 차례상의 남은 음식을 
직접 재조리하여 함께 즐기며 세상 이야기로 밤을 지샌다. 
청춘 스타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는 이윽고 실패한 제작자, 사업가,
그러나 마침내는 입법 정치인으로 신생을 누리면서
영욕과 성패의 경계를 넘나든 그의 일대기는 
어느 때인가 자서전이든 타서전이든 한 묶음을 이룰 것이지만 
내가 이런 길고 큰 글 욕심으로 관련을 맺은 적은 없다. 
나의 관심은 저 살벌한 연예계의 세계에서 한 평생을 지낸 그분이 
때로 남녀간 스캔달의 한가운데에서 집중 포화를 받으면서도 
마침내 승리자로 살아남고 
이제 그 계통에서는 구도자의 대명사로 까지 자기관리를 한 
모습에 대한 한 순간의 이야기꺼리, 크로키랄까 스케치 같은 것,
한편의 수필을 탐하는 심정이랄까---.
아니 말이 빗나간 것 같다. 
한 줌 짜리라도 글의 소재를 얻겠다는 치사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일탈하지 않은 에피큐리앙, 
비틀거렸으나 쓸어지지않은 나르시소스와의 대면이 내 내심의
경외감과 함께 
그 자체로서 즐거움이었기 때문이었다. 
느슨한 약속으로 우리는 여의도에서의 점심, 남산 중턱의 갈비집,
혹은 장충동의 족발집에서의 저녁을 즐겼는데, 
오늘 점심약속도 그런날의 연장선이었으나 
의원께서 갑자기 지역구 관리로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주인공은 빠진 셈이 되었다. 
참, 청춘 스타로 함께 유명했던 부인이 지역구에서 다리를 다쳐 
체류가 연장된 탓도 겹쳤는데 이 사연은 TV에도 나왔다.
하지만 이곳이 어딘가. 점심 걸를 일이 있겠는가.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서.
이런저런 목적의 내방객들이 북적거려서 점심은 그분을 만나지 못한 
몇몇 손님과 4급 보좌관 한명, 5급 비서관 한명, 9급 여비서, 
그리고 오늘 이 이야기의 뒷부분을 장식해 줄
여성 자원봉사자 등, 한 열명이 의원회관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 추어탕으로 한끼를 너끈히 떼우게 되었다. 
"미꾸라지 냄새는 천원짜리 커피가 최고지" 
의원회관 출입이 잦은 나이든 사업가 한 사람이 식후 스케줄을 
식당 건너편의 구내 커피점으로 잡았다. 
내가 옛날로 치면 판서댁앞의 지나가는 과객의 수준이면서도, 
성균관의 당상관 노릇은 하고 있음을 확인하며, 
이 사업가의 언변에는 이윽고 체온이 실렸다. 
필요상 그를 Q씨라고 부른다. 
왜 Q씨인가? 
얼마전 K 의원이 가수 나훈아씨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는데
그 자리에 함께한 나의 무의식이 
"나훈아의 명곡, Q"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Q씨는 나보다 두살이 위였으며 동향이었으나 중등학교는 
모두 조금씩 나보다 기울었다. 
그러나 최고학부는 최고수준으로 다녔다. 
"사주 팔자나 육갑에 대하여 잘 아시오?" 
경계심이 사라졌으리라고 방심하는 나에게 그가 느닺없이 달려들듯 
질문을 하자 나는 당황했으나, 
알고보니 사람을 끄는 그의 방책이랄까 습관이었다. 
내가 진실로 대답을 망설이자 그는 "뭘 모르시는군요?"라고 
의문형으로 단정을 내리면서, 
"사주팔자를 믿긴 하시오?"라고 말을 바꾸어 물었다.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한 나의 대답. 
"그래요? 저는 솔직히 사주가 있다고 봅니다." 
그의 서두는 단호하고 목소리는 격정을 담으며 떨렸다. 
그리고 격정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가 묘한 설득력을 지속하였다. 
아, 이렇게 사람의 주목을 끌 수도 있구나, 나는 탄복하였다. 
그는 사주팔자 당위론을 주장하며 실예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섯사람을 셋씩 두 그룹으로 나누어 묶어서 
구체화하였다. 
우선 먼저 든 그룹의 트리오는 현승일, 김중태, 김도현 제씨였으며, 
또 한 그룹은 김영일, 박철언, 김기섭 제씨였다. 
위의 여섯사람과 Q씨는 막역지교였고 나도 한두번 이상씩 이분들과 
밥을 먹었던 술을 마셨던 세교가 있어서 
"사주 풀이"의 실제적 예를 들기로 한다면 
이보다 더 적절할 수는 없었다. 
이 여섯 사람들의 현 주소는 이미 세인들이 익히 아는 바이고 
살아온 이력도 거의 공공연하다. 
그러나 들은 바를 여기에 다 옮기기에는 이날 나의 경청 태도에 
다소 문제가 있어서 기억이 소상치 않았고
어쨌거나 여섯 사람들의 사생활 보호권이라는 미묘한 문제도 따른다. 
이럴 경우 미주알 고주알 까발리기 보다는 
우선 세인들에게 알려진 부분만을 축으로 하여 
사주팔자 원리로 검증해 보는 것이 피차간 좋을듯 하다.
"6/3 사태"의 주역이었던 첫번째 세 사람은 모두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이후 특별사면에 이은 우여곡절은 상당부분 우리 대중의 몫이 되었고, 
마침내 그 중의 한 분은 대학 총장을 거쳐 현역의원이 되었다. 
그 이전에 이미 또 한사람은 양식있는 정치인으로 현실에 참여해 왔는데, 
그러나 이 해맑은 귀공자 타입의 저항 정치인은 한번의 차관과 
정부 주도 기관의 짧은 보스 역할을 끝으로 의원 출마에서는 
번번히 낙방하며 언제부터인가 지성적 야인 거사 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셋중 가장 언변도 좋고 역동적이며 Q씨의 말에 의하면
"체 게바라"를 연상 시키는 마지막 한분은,
미국으로 가서 "리커 스토어"로 생계를 유지할 때에도 
수많은 우국지사들을 주위에 모으는 열혈남아였으나 
일종의 금의환향 비슷한 귀국을 해서는 
종교에 심취한 조강지처와의 이혼과 현실 세계와의 불협화음으로 
아직도 독거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아니 독거생활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작년 어느 때이던가 이 양반이 남도 자락의 대흥사 뒤쪽 암자에서 
책읽고 저술하며 독거하는데, 
큰 산불이 나서 불속에 갇혔다고 한다. 
그의 산불 탈출은 극적이어서 옷가지 등으로 몸과 얼굴을 휘감고 
불속을 뛰고 계곡을 점프하여 구사일생했으나 
옷가지가 불에 타는 바람에 심한 화상을 입고 석달간 병원에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지금은 퇴원을 했는데 천만 다행으로 얼굴은 상하지 않았다. 
세사람 모두 뛰어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났다고 Q씨가 보는 
이 사람은 환갑이 넘어서도 아직도 불 속에 갇히는 딱한 생애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암자도 타버렸나요?" 
비서관이 아깝다는 듯이 물었다. 
"모르긴해도 타버렸겠지요. 움직이는 사람이 견디지 못했는데---" 
Q씨의 답변. 
"책도 모두 탔겠네요." 
따라와서 함께 밥을 먹은 자원봉사 여자 대학원생이 
시의적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 불판에 책이 뭐요!" 보좌관이 핀잔을 주었다. 
그 불판에 책이 뭐겠는가 만은 "세상아, 잘있거라 나는 간다"하고 
책 한 배낭 메고 산사로 떠난 사람에게 불벼락은 너무 심한 
날벼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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