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편 소설) 시월의 마지막 날에

원평재 2012. 10. 31. 05:43

 

할로윈을 맞이하여 구고 한편을 많이 수정하여 올립니다.

최근 강남 스타일 시리즈로 어떤 문예지에 올리는 글 중의 하나입니다.

 

(단편) 시월의 마지막 날에

 

할로윈이 늦가을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이 날이 다가올 때쯤이면 나는 가슴아리(알이?)를 한다.

캐나디안으로서의 내 한글 실력의 한계에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다.

(이 글도 한국 청년이 많이 고치고 새로 써준데가 많다.)

 

강남역 위쪽의 역삼동, 그러니까 "국립도서관 역삼 분원"이 있던 근처에 우리 영어 회화 학원,

"강남 아메리칸 가든"이 있다.

원래는 "아메리칸 킨더가튼(American Kindergarten)"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킨더가튼"이

유치원이라는 뜻이기에 그러면 혹시 교육부의 관리를 받아야할지도 모른다는

구청 사회 교육 담당의 지적이 있어서 구청 상대만 하자는 꼼수로 "강남 아메리칸 가든"이

되었다고 한다.

조기 영어 붐을 타고 유치원이 수입이 좋다고 하여 처음 그런 이름이 나왔는데, 가든으로

바꾸면서는 혹시 식당 이름으로 알려질까 걱정도 했던 모양이다.

 

가든이란 말의 홍수에 이런 염려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성공한 조기 영어 회화 학원으로

이름을 떨치며 성업 중이다.

우리 학원의 주 고객은 학령 전 아이들, 즉 유치원생들이 지만 초등학생반과 중고등 학생반도

구색으로 약간 운영이 된다.

나는 캐나다 동부, "노바 스코셔" 주의 주립대학원에서 영어회화 교사 과정, 즉 테솔(TESOL)

학위를 받았다.

"새 스코틀랜드 땅"이라는 뜻을 가진 내 고향은 한 때 뉴펀들랜드 해안이 세계 최고의 어장이던

20세기 초를 경제력의 정점으로 하더니, 마침내 산업 생산이 서서히 서부 브리티쉬 컬럼비아 주에

밀리고 말았다.

그 결과 영어 교사 생활도 재정이 딸린 고향에서는 하지 못하고, 마침내 코리아까지 밀려오게 된

30대 중반의 캐나디안 노처녀가 내 이력이다.

유행어처럼 골드미스인지도 모르겠다.

 

잘 살 때 노바 스코셔 주의 학급생 수는 25명이었는데 이제는 40명을 육박하니 신임 교사를

뽑을 리가 없다.

아, 내가 처음부터 코리아로 온건 아니고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멕시코로 가서

사설 영어회화 학원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경제 불황에 빠지고 심지어 게릴라들이 멕시코시티로까지 내려오게 될 무렵,

나는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서 태국으로 갔다가 십여 년 전부터 서울 강남으로 왔지만 마음은

항상 집시이다.

 

이 곳 강남의 영어 학원가의 경기는 88 올림픽 때가 최고였다고 영어 강사들이 만든

“글로벌 인터넷”에 떠있지만 요즈음도 아직은 해 볼만하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대상이 경쟁력이 있다.

그보다 위 학년이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아예 유학을 보내거나 방학 때 현지로

어학 실습을 보내기 때문에 강남에서는 오히려 수강생이 줄어드는 현상도 있다.

처음 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고 중고등학생들을 맡아서 열심히 가르쳤으나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이 나의 새로운 텃밭이 되었다.

하지만 요즈음 내가 주로 맡고 인기를 끌고 있는 유치원생들도 관리를 잘 못하면

한 순간에 썰물이다.

 

나는 원래 인디언과 프랑스 사람 사이의 튀기인데 외모가 동양인을 더 닮아서 소위 파란 눈,

노랑머리의 서양 얼굴에 비해서는 값이 덜 나간다.

나는 에보니 칼라의 흑단 같은 검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눈에는 마침 새로 개발된

파란 콘택트렌즈를 꼈다.

얼굴이 좀 넓은 편이지만 유려한 영어와 정규 교사 자격증이 이를 보상하여서 렌즈까지

낀 이후에는 값이 많이 올랐다.

머리를 물들이는 행동은 우리 조상인 인디언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이곳 강남 처녀들도 머리를 물들이고 유명한 탤런트를 따라서

파란 렌즈들을 많이 끼고 다닌다니 마음의 위로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나와 스킨십을 나눌 찬스는 별로 없을 한국의 청소년들이 무조건 나를 많이

따르고, 학부형들이 보내주는 특별한 사례금도 나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해석하면서

나는 이제야 사는 보람을 느낀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런 뇌물 풍조에 익숙지 않아서 거절을 했다가 강사자리를 짤리기도 했고,

외로움을 못 이겨서 어떤 작은 학원의 원장이라는 한국 남자와 동거도 해 보았으나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마침내 손찌검까지 하는 통에 이별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동거 원장의 수작으로 강남에서는 자리를 한동안 잡지도 못하고 변두리에서

개인 교습을 하다가 목동에 있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쫓겨날 번도

하였으나, "데이비드 영"이라는 미국 청년의 도움으로 지금의 꽤 괜찮은 학원,

"강남 아메리칸 가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몇 살 아래였으나 우리 사이에 나이가 문제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몇 해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내 마음은 다시 비참해졌을 뿐이다.

그가 죽은 날이 할로윈의 저녁이었다.

원래 우리 학원에서는 할로윈에 최고의 이벤트를 벌인다.

영어 연극도 아이들이 연습하여 올리고 학부형들을 초대한다.

연극이 끝나면 학부형들과 칵테일파티를 잠시 여는데 이때 그들이 우리 회화 강사들에게

주는 선물이 장난이 아닌 수준이다.

학부형들이 인근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고 나면 학생들은 "트릭-오어-트리트"라고 소리

지르며 북미 대륙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아니 더 극성스럽게 자기 집과 친구들의 집을

함께 방문한다.

"Trick(혼이 나보겠어요)? or treat(대접을 하시겠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소리 지르며 초인종을 누르면 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이 곳

학부형들은 영어 잘하는 자기 아들과 미래의 동지들에게 듬뿍 선물을 준다.

아니 학부형들이 투자를 하는 것은 이 날 만이 아니다.

할로윈 며칠 전부터 "잭커 랜턴(jack-of-lantern)", 그러니까 호박 랜턴을 학원에서 하는

단체 구입으로 장만하여주고 또 고추처럼 생긴 할로윈 의상들도 함께 마련해준다.

이런 복잡하고 성가신 일들은 모두 데이비드의 몫으로 용산에 있는 미8군 매장에서

해결하였다.

지금 같으면 한국 시장에도 많이 있고 데이비드는 티코라도 샀을 텐데 그 때만 해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분주히 다녔으니 생각할수록 가슴만 아프다.

행사에 늦지 않으려고 그날 그는 짐을 오토바이의 앞뒤로 잔뜩 싣고 매달고 속력을 냈을

것이고 한강변의 교통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곡예수준의 위험천만이었다.

시간이 넘어도 장식품과 옷가지와 소품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낭패가 난 영어학원에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고 학원은 잠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그냥 졸도 하였다.

  

미국에서 온 그의 가족이래야 누이동생 하나였다.

부모는 이혼하여서 어머니는 연락두절, 아버지는 와병 중, 누이만 학원에서 보내준

비행기 표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가 오빠의 시신을 알루미늄 관에 담아서 돌아갔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보험이 되어있는 이 나라 코리아의 질서를 보고 나와 동료들은 새삼 놀랐지만

내 개인적 슬픔의 감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데이비드가 한 집에서 동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 패턴이나 강의 시간이 달라서 서로 따로 살았지만 우리는 부부처럼 서로를

생각하였다.

꼭 객지라서가 아니라 오늘날 이 외로운 산업사회의 자투리 지역에서 몸을 나누고

믿을 수 있는 상대가 하나쯤, 그래 하나라도 골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축복이었던지---.

우리는 오럴도 하고 아날도 하면서 서로를 확인하였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였다. 그런 건 물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 온 몸을 섭렵하고 나면 나는 항상 재생, 아니 신생을 느꼈다.

 

그런 그 모든 구원의 순간들이 할로윈 날의 저녁에 갑자기 끝났다.

데이비드와 이렇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하고나서 나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슬픔이 솟구칠 때의 식음 전폐---,

그래 사람들은 이를 거식증이라고 하였고 이후의 폭식, 맞아, 나중에는 슬플 때마다

계속 먹기만 한 적이 많았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몸 무게는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하다.

인디언 피가 섞인 내 키는 겨우 163 센티미터. 그러나 이런 내 모양을 아무도 탓하지는

않는다.

백인 프리미엄이 이런 건지 모르겠다.

  

홀로 살아도 세월은 흐른다.

그가 가고 내 몸무게가 늘기 시작한지도 여러 해가 벌써 지나가고 다시 할로윈이

찾아왔다.

내가 쓴 교재와 티칭 노하우, 밤을 새워서 준비하는 교육 자료와 매일 매일의 성실한

과제물 평가, 그리고 표면적인 노 스캔들, 그게 나를 유지하는 전부이다.

"할로윈 저녁의 호구 방문" 이라는 요란한 행사를 내 클래스에서는 오늘이 아니고 어제 저녁

그러니까 30 일에 치렀다.

예년처럼 아이들은 "트릭 오어 트리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고추 모양의 의상을 입고서

호박 랜턴을 들고 아파트와 빌라 촌을 돌아다녔다.

나도 물론 그 호박들의 대열에 끼었다.

그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교사로서의 책임이기도 하고 이런 성의가

학부형들로부터 보상이 되는 탓도 있다.

 

사실 할로윈은 "올 세인츠 데이", 그러니까 뭐라더라, 그래 "만성절"인 11월 1일의

하루 전날, 그러니까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가수가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공교롭게도 이 날이 주일이었다.

할로윈은 사실 영국의 선주민들이 믿던 이교도적인, 비기독교적 풍습으로 전통의

보수 교회에서는 질색이다.

내 소망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학생들 영어 잘 가르치는 것과 오로지 나만의 종교심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 뿐이다.

주일성수!

할로윈 행사를 내가 맡은 클래스만이라도 주일을 피하여 하루 앞당긴 것은 그런 내

생각 때문이었다.

하긴 이교적 잡신들도 인간이 바치는 공물을 주일 보다 하루 전날에 공양 받은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그 공물 속에는 데이비드라고 하는 인신공물도 들어있지 않았을까.

  

끝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련다.

이건 일종의 비밀이자 esoteric한 이야기에 속한다. “밀교적 비의”라고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앞글을 길게 달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의 이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비극적 사건이 있었던 이후 매년 그때가 되면 강남학원에서 첫 번째 배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을 골라 데이트를 갖는다.

나와 데이비드의 슬픈 관계를 아는 제자들이 자연스레 모임을 엮었었는데,

일 년 중 이날이 되면 자연스레 모이게 되었다.

그들이 성년이 되던 해에 한 제자가 프러포즈를 하였고 모두들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데이비드 때와 마찬가지로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와 성년의식을 치른 그는 다음해에 유학을 떠났고 또 다른 젊은이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다음해에 군 복무를 하기 위하여 전방으로 떠났고, 다시 이 밀교적 비의의 집행자는

다른 청년으로 이어졌다.

이런 이교적 비의가 얼마나 계속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알 수 있으랴.

 

나는 무어라고 하여도 행성을 거느린 강남 학원가의 붙박이 항성이라고 자부해 본다.

언제 이 항성이 생명을 다하고 초신성, “노바”가 되어 폭발 후 소멸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리라.

할로윈 이브는 가을의 절정이고 겨울을 예감케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겨울은 길고 가혹하다.

그때를 당겨서 생각하는 일은 끔찍하면서도 유익할 것이다. 내 밀교적 제의는 이런 공포를

아우르는 필사적 행위가 아닐까.

아, 할로윈, 시월의 마지막 날, 내 생애의 변방에서 마음을 털어놓으며 몇자 적어보았다.

 

추신; 내가 지금 술을 했거나 약을 한건 아니다. 이 글이 요즘 누구의 SNS처럼 유서로

비칠까 두렵다.

밀교의 집행자가 유난히 내세를 들먹일 수는 있겠지만 죽음 자체를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비의의 한 순간에 대한 기록문서로 보아주기 바라며 그나마 사이버 공간에 흩날리고 만다.

 

(편지글 이번 이야기 끝)

 

개인적 숙제 때문에 당분간 자주 들리지 못합니다.

 

 

 

 

The Power Of Love

- Gregorian Chants

 

The whispers in the morning
Of lovers sleeping tight
Are rolling like thunder now
As I look in your eyes


당신의 눈을 바라 보니
곤한 잠을 자고 난 연인들의
아침의 속삭임이 이제
천둥처럼 울려 퍼져요
 
I hold on to your body
And feel each move you make
Your voice is warm and tender
A love that I could not forsake


당신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느끼죠
따스하고 부드러운 당신의 목소리
당신은 저 버릴 수 없는 사랑이에요

 
'Cause I am your lady
And you are my man
Whenever you reach for me
I'll do all that I can


난 당신의 여인이고
당신은 나의 남자이니까요
당신이 나를 향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드릴께요

 
Lost is how I'm feeling
lying in your arms
When the world outside's too Much to take
That all ends when I'm with you


당신 품에 안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주체할 수가 없어요
바깥 세상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지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Even though there may be times
It seems I'm far away
Never wonder where I am
'Cause I am always by your side


모든 어려움도 끝나 버려요
내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더라도
내가 어디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아요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으니까요

 
'Cause I am your lady
And you are my man
Whenever you reach for me
I'll do all that I can


난 당신의 여인이고
당신은 나의 남자이니까요
당신이 나를 향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드릴께요

 

We're heading for something
Somewhere I've never been
Sometimes I am frightened
But I'm ready to learn
Of the power of love
우리는 가보지 못한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있어요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난 사랑의 힘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The sound of your heart beating
Made it clear Suddenly
the feeling that I can't go on
Is light years away
당신 가슴에서 울리는 고동을 듣고
문득 확신이 섰어요
당신과의 사랑을 그만 둘 생각은
광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요

 
'Cause I am your lady
And you are my man
Whenever you reach for me
I'll do all that I can
난 당신의 여인이고
당신은 나의 남자이니까요
당신이 나를 향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드릴께요

 
We're heading for something
Somewhere I've never been
Sometimes I am frightened
But I'm ready to learn
Of the power of love


우리는 가보지 못한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고 있어요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난 사랑의 힘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the power of love
the power of love
Sometimes I am frightened
But I'm ready to learn
Of the power of love
사랑의 힘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난 사랑의 힘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