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가을의 전설 (영상 픽션)

원평재 2011. 10. 27. 18:24

 

 

 

 

"실례지만 미혜씨가 맞지요? 김미혜씨---."

"장우구나, 윤장우. 그런데 더덤하게 옛날 애인 얼굴도 잘 몰라보고---, 그 사이 마음이 변했나보네."

"어허, 칼같은 말 솜씨랑 미혜씨가 틀림없구나. 그런데 내가 언제 자네 애인이었노. 그저 항상 자네 주위를

멤돌았지. 자네가 청맥 회원 둘이나 잡아먹는 동안 나는 항상 변방의 존재였어."

"뭐라구? 무슨 말 솜씨가 그래---."

"미안해, 말이 좀 거칠게 나와서. 사과할께. 하지만 마음이 변했니 뭐니 하니까 나도 억울해서 울컥했지.

그건 그렇고 미혜 넌 참 워낙 예뻤지만 지금도 얼굴에 주름하나 안잡히다니 정말 놀랍구나.

또 실례의 말 같지만 혹시 요즘 유행하는 그런 주사 맞은건 아니겠지. 기분나쁜 말이면 용서해.

그만큼 예쁘고 놀랍다는 말일쎄."

"보톡스 맞은건 아니지만 그냥 칭찬으로 들을께. 하지만 세상에! 청맥회원을 둘이나 잡아먹었다니,

말도 거칠고 내용도 황당하네. 우리 기쁜 젊은 날에 문학한답시고 몇사람이 함께 어울렸고 그러다가 모임의

회장 격이던 장준상, 그 화상하고 내가 말많은 결혼이나마 정식으로 했다가 헤어졌고.

그런데 뭘 둘이나 어쨌다는 거야? 남편이었던 장준상 대신에 장우 너나 잡아먹었어야 내 팔자가 편한건데,

어흥! 지금이라도 잡아먹자, 호호호. 옛날 친구가 좋구나. 모처럼 내가 이렇게 철없이 웃네."

 

 

 

<호수에 뜬 관광호텔>

 

 

 

호수 주변에는 가을이 갖출 수 있는 것들은 다 갖추어 놓은 모양새였다.

잔바람에도 일렁이는 갈대가 그 대표였다.

초로에 들어선 두 남녀가 부부의 모습은 아닌체로 정담을 나누는 풍경까지 더하여 가을은

정말 모든걸 보살펴 갖추어 놓았다.

 

 

 

"미혜야, 한창 때는 너 만나러 불꺼진 창 앞에서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불러도 반응이 없더니

이제 인생 종장에 들어서니 만나는 일도 쉬운 기적처럼 생기는구나. 이런 표현 청맥 시절에 썼다면

말도 안되는 비문이라고 맹공격을 받았겠지. 모든게 아이러니야.

우리 두 고등학교 재상봉 행사도 이렇게 같은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다니. 동기회장들이 짜고치는

고스톱은 아니겠지?"

"평생 미국 살다 온 사람이 모르는 말이 없네. 하여간 일부러 날짜 맞춘건지 우연이었던건지

그건 장우 네가 더 잘 알아볼 수도 있을텐데?"

"미리 맞춘건 아닌것 같아. 두군데 행사에 겹치기 프로그램은 전혀 없잖아---. 하긴 내가 우째 아노.

나야 홈 커밍데이에 맞추어 엊그제 JFK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어제 저녁에야 도착한 몸 아닌가.

여기 호텔에 와서야 저 아래 쳐놓은 플래카드 보고 알았어.

그래서 당장 너네 행사가 있는 렉사이드 홀로 달려가서 동기회장에게 쪽지를 전했던거야.

새벽에 로비에서 만나자고 한 그 쪽지 말이야."

 

 

 

 

 

"장우 너도 많이 달라졌구나. 전 같으면 촌색시 별명답게 말없이 있었을텐데 과감하게

우리 모임에 쳐들어와서 나를 찾다니---. 아니 나뿐만 아니라 그때 청맥 회원이었던

미원이와 계희도 함께 찾았겠지만."

"아니야. 내마음 일편단심, 오로지 미혜 너만 찾았어. 걔들도 왔겠지?"

"미원이는 호주로 이민을 갔는데 오지 않았고 계희는 이미 고인이 되었잖아, 몰랐어?

아이 낳다가."

"미국에서 밥 벌어먹기 바쁜 내가 어찌 사춘기때의 문학 서클 회원 동정까지 챙기겠니---.

그건 그렇고 슬프다! 계희가 그렇게 되었다니.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출산 중에 그랬다니."

남자가 안타까움으로 어조를 낮추었다.

새벽 물새 한마리가 울지도 않고 수면을 낮게 비행하였다.

 

 

 

 

 

 

"지금이 아니라 한 세대 전 이야기야. 그래도 참 어처구니 없는 비극이었지. 몰랐었구나.

그건 그렇고 밥벌어 먹기 바쁘다면서 넌 미주 신문에 시와 수필을 자주 올린다고 누가 그러더라."

"문청시절의 참담한 잔재, 흔적 정도라고나 할까. 엉터리 글이라는 뜻이지. 우리 멤버이면서

글 보다는 유화와 조각을 더 잘하던 광수는 뉴욕에서도 가끔 전시회를 갖던데 가보지는 않았어.

과일 장수하는 내 모양이 처량해서---. 그 친구 한국에서는 어때?"

"신문에서 보면 추상 조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더라. 아니 그런데 여기 행사에는 오지 않았어?"

"내가 다 확인하지는 못하는 사이에 디너 잔치가 파하고 다들 방으로 헤어졌지만 하여간 광수는

보지 못했네---. 안온거 같아."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공주병이겠지?"

"아, 맞다! 그렇구나. 네가 대학 여름 방학때 광수와 여기 관광호텔로 한 밤중에 자러 온 걸 내가

알아. 나는 군대 가있을 때라서 한참 후에 들었지만, 네가 둘 잡아먹은거란 말이 그래서 우리 사이에

돌았네."

"그러지 말어. 너까지 그러면 이 나이에도 내가 또 슬퍼져. 내가 준상이하고 연애인지 뭔지 하여간

사랑놀이를 하다가 정작 결혼 문제가 나오니까 그쪽 집에서 반대였고 그런 답답하고 서글픈 사정을

광수와 중앙통에 있는 돌체 맥주집에서 나누었지. 그러다가 둘 다 술이 취해서 택시 잡아타고 정신없이

여기로 왔던거야. 다음날도 늦게 잠이 깨었는데 두 집에서는 사람을 찾는다고 난리가 났고.

그래서 소문이 좌악 나버린거라. 어쨌든 나와 준상이는 결혼을 했지만 그 일이 평생의 쐐기가 되어서

중년 이혼을 했어."

"준상이도 고인이 되었다지?"

"이혼 후에 사업도 실패하고 여기 고향에서 평판도 안좋고해서 건강을 버렸어. 그 집이 원래 땅 부자라서

나는 위자료로 그걸 조금 받았는데 그게 금싸라기가 되면서 나 혼자 잘먹고 잘살아 왔네.

이제 모든걸 반납할 나이가 가까워 왔잖아. 잘 먹고 살다가 남은 재산은 대학병원에 사후 기증하기로

이미 도장을 쳐놓았지. 남편이 앓던 병을 집중 연구하는 조건 하나는 달았어.

채무자들이 우리 이혼을 돈 빼돌리려는 사기 이혼이었다고 몇차례 고소를 하고 참 말도 많았지.

그런 소문도 싫었고 하여간 이제 마음이 참 편하네."

"훌륭하다, 미혜야."

"비행기 태우지 마라. 과부 마음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말빨도 예나 지금이나 야무지고 맛있네."

"내가 반 평생을 혼자 살며 세파를 헤쳐나온 여우아이가. 호호호"

"웃음도 똑같이 예쁘네. 내가 공치사가 아니야. 전에 내가 별볼일 없는 신문의 신춘 문예로 등단한 후,

이름도 내고 돈도 벌겸 시시한 주간지에 남녀상열지사의 단편들을 적나라하게 연재할 때 네가 따끔한

충고한 것을 아직도 잊지못해. 글을 쓰는게 이름내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라면 걷어치우라고.

그런 섹스 코미디 써서 오히려 자기 이름에 먹칠하고 자신을 축내는건 또 얼마나 많으냐고,

거의 호통치듯 했단다. 네가."

"미안해. 나 자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그런 말 했던거 다 기억해. 사실은 네가 제일 좋아서

그랬던거야. 하늘에 맹세코."

"나도 항상 네 주위를 멤돌며 너를 좋아했지. 아니 사랑했어. 너도 아마 눈치는 챘을거야. 그때 한번

안아 보는게 소망같았지, 그런데 준상이 녀석이 절벽처럼 앞을 턱 가로 막잖아.

아마 우리가 어쩌다 결혼을 미리한 사이였더라도 준상이가 내놔! 하면 그냥 널 내놨을꺼야,

비겁해서가 아니야. 어째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하하하. 웃어서 미안하다."

"아니야. 무슨 팔자같은게 있나봐. 나도 공부 잘하는 네가 신랑감으로는 만점이다 싶으면서도 나는

천생에 준상이 마누라다, 설혹 비극이 올지라도 준상이꺼다. 무슨 그런 생각에 짓눌리게 되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이혼을 하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해도 나는 그냥 혼자 살았어. 치근대는 사람들도

많았고 내가 또 불같은 정열과 정염이 있는 사람인데 그게 다 사그러지고 무언가 우뚝 마음속에

서는게 있더라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에서 시퍼런 불빛을 흘리는듯 남자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냉정과 열정을 함께하는 과부인데 유혹이 왜 없었겠어? 그런데 무언가 차가운 빙산같은게

마음에 떠돌더라구. 그래서 에라, 장학 기금을 하나 마련했어. 왕버들 장학회와 왕유 장학금이라는

이름이야.

저 건너편 고목나무 두 그루 보이지? 기억이 나? 거기가 우리 문학회의 산책 끝자락이었잖아.

그 버드나무 아래에 이층집이 있었고 아래층에는 밥집겸 술집, 이층에는 독방도 몇개 갖추어 있었고.

거기서 준상이가 나를 많이 안았어."

"아하, 저게 그 나무구나."

"이제 생각이 나는구나. 저 왕버드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고 근처의 지저분한 건물들은 다 철거

되었지. 내가 어찌 저기를 잊겠어."

 

 

 

 

"그래도 그 이름으로 장학 기금이라니 좀 그렇네."

"아니야, 우리가 자식 만드는게 뭐 거룩하게 의식을 치루며 작업하는건 아니잖겠어? 호호호.

물론 종교의 교리 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다 남녀상열지사에서 시작되잖아.

하여간 내 장학회의 수혜자들은 이제 숫자로나 결과로나 내놓을만해. 크게 자랑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장학회라면 법인도 만들고 이사회, 그러니까 보드 같은것도 구성하고 일이 많았겠네?"

"네 생각 많이 했지. 우리 문학회가 참 정갈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어. 내가 돈 좀 가지고 이런저런

장학사업한다고 신문에도 나고 그래도 그때 멤버들은 하나도 기웃거리지 않더라.

날강도 같은 놈들만 몰려오고. 나중에는 청맥 멤버들이 원망스럽더라니까. 너무나 모른체해서.

지금이라도 너 그 일 좀 맡아서 해주지 않을래?"

"나 보름 후에 나가야 돼."

남자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호호호, 그 모양이 참 아름답다. 돈많은 과부 손목 잡을 생각도 않고. 때가 되면 참여해 봐.

해외 이사도 필요하고 부대 사업에 따른 사외 이사도 필요하니깐.

미국에서 메디케어 헤택도 있겠지만 여기서도 의료 보험 혜택 받을 수 있도록 해줄께.

아까 말한 대학병원에 재산 기증 조건에도 그 정도 혜택은 들어가 있어---."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다가 발목 잡힐까 겁난다, 하하하. 미안해. 나중에 좀 생각해 보자.

아, 갑작스런 욕망이 아니라 미혜 너 만나면 꼭 한번 허그는 하고 싶었어.

결혼도 성스럽다는 단서 아래의 계약인데 내가 늘 이런 마음을 갖고 살다니, 이건 계약위반이

아닐까? 사소한 계약 위반일까, 중대한 과실일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너에 대한

허그의 욕망은 사라진 적이 없어."

"그래, 나도 변호사 동원해서 규약이니 약관이니 다 만들어 본 사람인데. 계약에는 근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해석의 융통성이라는게 있더라.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조금만

더 지평을 넓히면 우리가 가벼운 허그 정도로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를 찾지 못할것도

없겠지. 지금이라도 뭐, 우리 허그 정도는 하자.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나 시퍼렇게 눈을 뜬 네

부인에게 크게 미안할 건 없을것 같아. 우린 말없이 사랑했고 지금도 그렇잖아?"

"어디서?"

"지금, 여기. 이 심약한 사람아."

"아니, 여기 새벽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놀라지 말어. 걱정도 말고. 저 사람들 내가 새벽마다 만나는 사람들이야. 평소 내가 잘하지만

그러면서도 수절하는 과부라고 오히려 다 내편이야.

내가 사실 중고등 다닐때 다리를 약간 절었잖아. 그걸 돈많은 장씨네 집으로 시집가서 수술로

다 고치고 새벽마다 여기서 재활 산책을 했지. 그게 정말 반세기가 다 되어가네.

저기 저 아파트 동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이사도 다니며 이 호수를 매일 돌았지.

한번에 40분 가량 걸려. 두바퀴씩 하루 두번을 돌지."

"에이, 그렇게 밖에 안걸릴려고? 내 추억속의 시간으로는 항상 두시간 이상이었는데---."

"이 청년이 못땠구만. 누구랑 데이트하느라고 그렇게 시간을 늘렸니?"

"뭐 우리 멤버들이었지. 서로 시쓴거 적어와서 읽고 토론하며 이 방천 둑을 돌아다녔잖아.

넌 준상이하고 슬그머니 빠져나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끝날 때 쯤이면 항상 보이지 않았지."

"내가 다리가 좀 좋지 않다는 핑계로 둘이 빠져나가서 방천 밑에서 허그도 하고 키스도 하고

그랬어.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니까 좀 조숙했나? 문제아였나? 호호호"

"2-28 의거 때도 거룩한 대열에서 빠져나갔겠구나?"

"아니야, 우리 둘 다 경찰서까지 잡혀서 들어갔다 나온 정의의 청춘이었어. 우리 여고도 칼 찬

치마입고 뛰었잖아."

그녀가 세로로 흰띠를 붙여 입었던 여고 교복을 말로 그려내며 또한 연상하며 추억 모드로

들어갔다.

그도 동반녀의 양장 치마 허벅지 바깥 쪽으로 옛날을 상기한다는듯 교복 세로줄의 흰띠

모양을 가볍게 손으로 쓰윽 그려냈다. 말하자면 스킨쉽이었다.

 

 

 

 

 

"미혜야, 시간이 바쁘네. 어디서 안아볼까? 정말로 지금, 여기? 하하하"

젊을 때는 수줍었다는 남자가 다소 큰 목소리로 서둘렀다.

"멀리서 오느라 부인은 늦잠인가 보네? 아까는 내가 좀 쎄게 나갔지만 막상 남녀가 스킨쉽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청춘시절을 담보로 과용하는건 아닐까? 미안한 대상들이 너무 많지나

않을까? 작고한 전 남편도 생각이 나고 살아있는 네 부인에게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사법도 그러한데 너무 부담갖지 말자. 또 내

청춘시절의 마이너스 통장을 이제 겨우 채워넣는 순간이기도 한데---."

"아니 이 할아버지가 용맹스런 투사가 되셨네. 고마워. 그럼 저기 비행기 옆으로 가볼까?

저녁이면 스테이크가 맛있는 곳인데 새벽에야 파일럿이나 스추어데스도 자러갔겠지? 호호호.

근데 참 어느 항공 타고 왔어?"

"에어버스가 취항한지 얼마 안되어서 그걸 타 봤어."

"나이 들어서 비행기 타기도 힘들지? 에어버스가 좀 편하다던가?"

"그래, 그게 좀 공간이 넓은듯 하던데 힘들기는 마찬가지야."

"아직도 이코노미 타고 다니니? 이제는 좀 편하게 지내야지."

"내가 과일 장수한다고 했지만 이민 초기의 이야기이고 요즘은 리올터로 주택경기 좋을때

조금 재미도 봤고 교민 사회의 문화행사의 매니저 노릇도하고 그래. 한류를 타고 보람있는

행사 기획도 잡고 그러지. 얼마전에도 코리안 페스티발이 크게 히트했지. 한국 올때는

그 사람들 하고 섞여서 프레스티지 급으로 왔단다, 하하하."

 

<인순이 가수와 함께 ; JFK 공항에서>

 

 

<10월 10일 컬럼버스 데이에 조지 워싱턴 다리에 걸린 성조기>

 

 

 

 

 

"장우야, 넌 참 노래도 잘 불렀지? 창가하나 불러줄래?"

"요새 가을이 되니 봄에 흐드러졌다가 사라진 모란을 생각한다. 그런 노래가 있어. 이제하

시인이 김영랑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시와 작곡을 직접 노래부른 것도 있고 조영남 가수가

리메이크 한것도 있는데 어제 저녁에도 가라오케 하면서 불러봤지. 나는 이제하 시인의

담백한 창법이 더 좋은데 지금은 리메이크한 걸로 불러줄께."

 

남자는 곱게 나이든 여인을 에스코트 하여 비행기 트랩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비행기의 출입문은 쉽게 열렸으나 캐빈 쪽은 닫혀있었다.

남자가 조종석, 칵핏 쪽의 쪽문을 힘으로 밀자 쉽게 통로가 열렸다.

아늑한 공간이 기다렸다는 듯이 남녀를 맞았다.

시월의 일출시간은 아침 일곱시 경이었다.

두사람이 달콤한 포옹을 할 때 해가 솟았다.

호수너머, 아파트 너머, 팔공의 연봉너머에서 붉은 광망이 불끈 불끈 솟아올랐다.

 

 

<이번 이야기 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모란 동백 / 조영남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 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 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동백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조영남 / 모란동백


이제하 / 모란동백




모란동백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음악은
소설가 이제하의 발표곡이라는 것을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다.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이곡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을 발표하였으며
그 후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널리 알려졌다.

"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이라는 시는
이제하님이 음악가인 조두남과
시인 김영랑을 생각하며 지었다고 합니다.
이제하님은 1937년 밀양 출신으로
원래 전공은 조각과 화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으로 미술, 문학, 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한 다재다능한 분인 것 같습니다.
자기 시에 곡을 만들어 직접 노래까지 한 "모란동백"은
나이 육십이 넘어서 불렀다고 하네요.

이후 가수 조영남이 이 곡을 취입해서 많이 알려졌지만,
그 전에 이제하 본인이 직접 부른 이 곡이
더 소탈 하고 꾸밈없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