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품다, 검은 산의 나라 몬테 네그로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다음 기행지는 몬테네그로 쪽이었다.
국경을 두번 들락거리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라도 지리적으로나 해안의 경치로나 훨씬 좋았다.
국경에서 사진 찍는 것은 처음부터 여행 안내서에서 조심하고 삼가하라고 쓰여있었지만
처음부터 지키지 않았기에 이곳이라고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슬쩍 한 컷, 아니 여러 컷 이상 하였다.
몬테네그로는 이 나라를 관통하는 로브첸 산(1,749m)의 이탈리아식 표현으로
'검은 산(Black Mountain)'의 뜻.
이 나라 말로는 같은 뜻의 ‘쯔르나 고라(Crna Gora)’라고---.
면적은 1.38만㎢이며, 인구는 62.6만, 수도는 '티토그라드'로 한때 호칭되었던 포드고리차이며
종교는 동방정교회, 발칸에서는 유일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1881년 몬테네그로 공국으로 독립하였으나 파란만장을 겪은 후, 2006년 6월 3일 실시된 국민투표로
유고연합에서 마지막으로 분리 되었다.
이 나라의 국명답게 국경을 넘으면 검게 보이는 험준한 바위산들이 연속되며, 평지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큰 산을 뚫은 긴 터널을 벗어나면 바로 앞에 도시가 나타나는데 바로 코토르이다.
코토르는 몬테네그로와 동일한 지명처럼 인식될 정도이다.
작은 도시 위로 경사진 험준한 산에 어떻게 저런 성을 만들었을까?
성벽들은 산을 에워싸고 있고, 호수 같이 보이는 바다 옆에 있는 항구는 코토르 성의
광장처럼 보인다.
1463년 세르비아 전역이 투르크의 지배를 받을 때도 이 도시는 점령되지 않았으며,
1657년 두달 동안 포위를 당하였으나 점령되지 않은 것은 견고한 코토르 요새 덕분이었다.
지도상으로 코토르는 내륙에 있는듯이 보이지만 내해 속의 내항이다.
뒷면으로는 검은 암벽 산이 둘러쳐져 있어서 천연의 요새이기도 하고 또한 미항이다.
검은 병풍이 둘러쳐진 고집스런 미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찾아가는 길목은 아드리아 바다의 연장 선이다.
국민 소득이 낮아서 물가와 인건비가 싸고 소득세와 부동산 세가 낮아서
미국과 유럽, 특히 러시아의 신흥 부호들이 별장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검은 암벽산들이 나타난다.
코토르는 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포드고리차에서 80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앞으로는 아드리아해와 마주하고 있으며 나머지 삼면은 험한 산과 운하로 둘러쌓여있는
천혜의 지형조건을 자랑하고 있기에
2,000년간 외세의 침략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지금의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코토르는 높이 20m가 넘는 총길이 4.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안쪽 서문으로 대부분 드나든다.
코토르 항에 바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겨진 글의 내용은 티토가 한 명언이라고 하는데 지금 뜻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중앙 광장인 이곳에 있는 삼각 석탑 아래에는 단죄대가 있어서 죄인을 공중들에게 보여서
수치심을 일깨우는 장소였다고 한다.
사형장은 아니라고~~~.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단죄대 같은 성격인가 보다.
현지 가이드가 또 나왔는데 발칸의 역사가 연대기적으로 모두 비슷하여서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굵은 줄기로만 설명하겠다고 말하였다.
복잡한 연대기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으리라는 말은 맞는데 좀 공허한 느낌이었다.
17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건물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라는 트리폰 대성당 (Cathedral of St. Tryphon)
12세기에 지어진 성 누가(St. Luke) 성당
요한 요새로 오르는 입구
로브첸산(Mt. Lovcen)의 요한 요새
시계 탑이 서있는 이곳이 주 광장
두브로브니크에서 하루 밤을 더 자고 Split로 가기로 하엿다.
돌아올 때는 차와 함께 페리를 탔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이곳으로 오면서 '천국인지 달나라인지 모르겠다'라는 술회를 했다는데
아름다운 달마시안 해안과 이 작은 성채가 어울려 당대 문호의 혼을 빼았고도 남았겠다
아드리아 해로 나오면서 에스프레소가 점점 달콤한 맛을 더하였다.
국경을 넘는 일은 항상 지루하다---.
Tchaikovsky, Marche Slave Op.31
차이코프스키 / ‘슬라브 행진곡’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Mikhail Pletnev, conductor
Russian National Orchestra
2005.10.26
Pletnev conducts Tchaikovsky ‘Marche Slave’
1870년대 중반, 아나톨리아 반도는 극심한 가뭄과 기근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재정난에 처하게 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발칸 반도의 속국들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당연히 그 나라 국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결국 1875년 여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불가리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일련의 사태는 일단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정리되는 듯했다. 세르비아 군대는 알렉시나크와 주니스에서 투르크 군대에게 패퇴했고, 불가리아의 봉기도 무참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러시아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러시아는 일련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주도하여 세르비아와 투르크 사이에 강화를 주선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슬라브 동포의 독립을 위하여
사실 러시아는 처음부터 세르비아와 투르크의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 했다.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절치부심하며 흑해 연안으로 재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독 출병을 하면 자칫 열강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먼저 회의를 열어 투르크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공동권고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투르크가 거부하자 오스트리아의 중립을 확약 받은 다음, 마침내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다. 1877년 4월,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한 러시아 군대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2차 동방전쟁’의 발발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내세운 명분은 슬라브 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동방전쟁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투르크, 세르비아 병사들
세르비아와 투르크의 전쟁은 러시아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러시아의 출병이 지연되면서 세르비아가 수세에 몰리자, 러시아 국내에서는 ‘슬라브 동포’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이 각계에서 일어났다.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이었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도 그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세르비아 부상병 위문 성금을 모금하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친구인 차이콥스키에게 음악회에서 연주될 ‘애국적인 관현악곡’을 의뢰하기에 이른다.
평소 정치적 사안에는 둔감한 차이콥스키였지만, 이번에는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대의명분과 발칸 반도에서 들려오는 긴박한 소식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루빈스타인의 제의를 받아들인 그는 세르비아의 민요 선율과 러시아의 국가를 활용하여 불과 며칠 동안 전곡을 완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187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어 청중들로부터 ‘진정한 조국애에 불타는 흥분의 폭풍우’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 곡의 제목은 ‘러시아-세르비아 행진곡’이었지만, 악보가 출판될 때 프랑스어로 ‘Marche Slave’(슬라브 행진곡)이라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슬라브 행진곡>은 차이콥스키의 가장 인기 있는 관현악곡 중 하나이다. 그 원동력은 작곡 당시를 전후하여 <피아노 협주곡 1번>, <백조의 호수>, <로코코 풍 주제에 의한 변주곡>, <교향곡 4번>,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등 걸작들을 줄줄이 내놓던 차이콥스키의 한껏 고양된 창작력이다.
러시아군은 같은 민족인 세르비아를 도와 투르크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장엄한 행진곡은 대성공을 거둔 초연 이후에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각광받아 왔다. 특정 행사를 위한 ‘이벤트성 음악’이 1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 하겠다. 그 주된 이유로는 연주시간 10분 전후라는 적당한 길이, 귀에 잘 들어오는 선명한 선율선, 화려하고 폭발적인 관현악법, 극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곡은 듣는 이에게 격렬한 투쟁을 거쳐 역경을 이겨낸 승리에서 기인한 벅찬 감흥을 선사한다. 차이콥스키 자신도 이 곡을 자주 지휘했는데, 모스크바에서 처음 지휘자로 데뷔했을 때를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투어에서도 공연의 피날레를 청중의 열광으로 장식하기 위해 종종 무대에 올렸다.
Mitropoulos conducts Tchaikovsky ‘Marche Slave’
Dimitri Mitropoulos conductor
New York Philharmonic
1957.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