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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시간에

원평재 2018. 2. 28. 17:26








 
 



야누스의 시간에

                                                                     

1.


세모에 종종걸음을 치는가했더니 어느새 새해도 이만치 흘러갔다.

정월을 서양에서는 영어의 January와 비슷한 어휘로 부르고 있다. 모두 그리스 신화의 야누스

(Janus) 신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야누스는 양면신이어서 얼굴이 앞뒤로 둘이다. 그래서 때로

앞과 뒤가 다른 이중적 사람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모습의 속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당연히 정월은 야누스의 달이다. 정월의 의미는 참으로 중층구조라서 지난 한해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심금을 괴롭히는 기간인가 하면 새해의 각오와 결의로 전의를 다지는

달이기도하다.

이런 감상과 성찰에는 공인과 사인으로서의 입장이 또한 나누어지리라고 본다.

지난 한해 서초 문인협회를 맡고 이끌면서 공인으로서의 나는 무엇을 하였고 또 무엇을 놓쳤을까.

쉽게 말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닌가한다. 자칫하면 공덕을 자랑하는 말이 되기 쉽겠고 반대로 하지

못한 일을 회한하다보면 애초 허황한 목표를 내세운 꼴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자랑과 아쉬움 양면으로 토로하다보면 새해의 길잡이가 되리라 싶기도

하여서 이 야누스의 시간에 몇 가지를 반추해 보고 싶다.

지난 한해 서초문협을 맡으면서는 우선 그간 해오던 문학, 문화적 사업에 조금만 방향전환을 하면

본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 착안을 하였다. 예컨대 봄가을 시 낭송과 시화전을 벌일 때에

지금까지 팸플릿 수준으로 발행하던 자료집을 앤솔로지 책자로 만드는 일이었다. 예산이 조금 더

들기는 하였으나 예년의 수준에서 크게 상회하지는 않으면서 아름다운 한권의 책자가 탄생하지

않았던가. 책을 내는 기쁨은 문인으로서 어디에다 비할 바가 아니다. 모든 회원들의 기쁨 충만,

성취감 충일의 거대사가 아니었던가.

사실 이런 자랑은 좀 해도 욕먹지는 않을 듯싶다. 연간으로 나오던 문학서초가 봄가을

앤솔로지로 양 날개를 달았으니 한해에 세권의 문학지를 출간함으로써 다른 지역의 문인협회에

은근한 자랑이 되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은 되었고 또한 그 앞서 발간된 문학서초는 한국문인

협회의 약 200여개 지부 발간 문학지에서 우수 도서로 뽑혔으니 이 역시 뽐낼 일이 아니고 무엇

이랴.

서초구청과 문화원에서 지원을 받아서 그간 해오던 지역중심의 서초백일장을 전국규모로 확대

하고 첫 장원으로는 제주도 주민이 선정된 것도 서초문화의 외연을 넓혔다고 자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을 문학 콘서트에는 유명 인기 시인을 초빙하여 많은 청중을 모은 것도 으쓱한

일이었고 시화전의 볼륨을 좀 높여서 시화등을 만들어 점등하여 서초의 밤을 밝힌 것도 탁월한

기획이었다고 자긍한다. 서초 문화 거리에는 시판을 만들어서 지금껏 반영구적 전시를 하고

있다는 점도 내 세우고 싶다. 문화원에서 착안하여 우리 문인들이 자원봉사로 격주마다 문학

강연을 하고 있음도 적지 않은 기여라고 하겠다.

이제 자랑은 그만하고 아쉬움으로는 반포천 둑방길에 시화 판을 설치하고 그 길을 금아 피천득

선생의 길로 개명을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실천까지 이르지는 못한 점이다.

또 그 둑방길에서 피천득 백일장을 열어보자는 생각도 했으나 내년의 사업으로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서초구에 아직 없는 문학관도 우선 일차로 여러 문인을 함께 현양하는

규모로 만들었으면 하는 꿈도 갖고 있고 우리 서초구를 빛낸 시인들의 시비도 건립하였으면

좋겠다는 구상도 품고 있다. 이런 아쉬움은 말하자면 앞으로의 실천적 꿈이기도 하니까 무슨

회한이나 탄식하고는 거리가 멀다.


  

2.

야누스의 시점에서 공인이 아니라 개인적 감회를 조금 곁들여본다.

지난해는 십이간지로 닭의 해였고 이제 새해는 알다시피 개의 해, 황금개의 해라고 한다.

닭의 해 끝자락에 멀리 피츠버그에 사는 딸네에서는 아이들이 애지중지하며 키워오던 스피치

계통의 반려견이 동네 단지에서 교통사고로 희생이 되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에게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동네 사람 하나는 그 반려견을 담요에 싸서 수의병원으로 달려갔고

어떤 부인은 아이들을 안고 울음을 함께하며 위로와 정신적 치유에 동참해주기도 하였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도 개의 천수인 15년을 생각하면 사춘기까지 두어 차례 그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돌발적 경우에는 그 충격이 몹시도 컸으리라. 펜실베이니아에

사는 딸네는 이웃 오하이오의 콜럼버스까지 가서 새 반려견을 사온 모양인데 앞선 개는 흰색,

이번 개는 황금색이 섞였으니 황금 개의 해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알다시피 제야가 되면 여기서는 제야의 종을 울리듯 그곳에서는 곳곳에서 파이어 볼을 굴려

내리는데 이때 사춘기의 하이틴들은 모두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 순간을 함께 보내며 한 살 더

먹는 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우리 손녀는 금족령이 내려져서 집에서 보낸다고 멀리 할아버지에게

푸념이 대단하다. 하지만 사정을 이렇다. 하이틴들이 모여서 일단은 건전하게 헌 해를 반추하고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지만 해가 바뀌는 그 야누스의 순간은 남녀 간에 모두 껴안고 키스를

나누니까 동양의 부모가 어찌 그런 모임을 허락할 수 있으랴.


바야흐로 야누스의 시간이다. 젊은이들은 한 살 더 먹는 희망과 꿈에 젖어 있는 때이며 나이가

높은 사람들은 속절없는 세월을 한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의

개념에도 차별을 두고 인식하였다. 마치 사랑이라는 명제에도 몇 가지로 분류를 하였듯이. 그들에

의하면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배분된 속절없고 무시무시하게 흘러가는 격랑과 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그 대척점에는 치열하게 살아내어서 때로 정지된 현재(still now)

와 같은 개념의 시간 곧 카이로스의 흐름이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일리있는 이야기이자 위안이

되는 명제이다.

새해에는 지나간 날을 후회하기보다 통찰하여 새로운 계획으로 치열하게 살아내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리라. 금년에 모두 해내지 못한 일들을 해냄의 시간으로 가꾼다면 영원한 현재를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새해아침에는 멀리 있는 아이들에게도 카톡을 보내고 영상 통화를 나누었다. 과학이 일구어 놓은

좋은 시절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래로 내려오는 십이간지를 생각하며 부지런한 황금

개띠의 의미를 알려주었고 아이들이 황금같은 새 반려견과 얼마나 정이 들었는가도 의미심장하게

 물어보았다. 희망의 황금 개띠 만세~! 

  

(서초 문인협회 회장, 건국대 명예교수 전 부총장, 세계한인작가연합 공동대표. 한국시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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