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지방을 찾아 나섰다. 물론 프랑스의 남동부 광활한 지역을 모두 포함한 것은 아니고 특별히
아를과 생폴 드방스 지역을 중점적으로 탐방하였다.
프로방스 지역을 가보고 싶었던 마음은 오랜 갈망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중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알퐁스 도데의 작품 “별”에서 유래되었기 십상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유소년 혹은 청소년의 여린
정서에 외세가 틈입하였다는 고백같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로방스의 마르크 샤갈 유택이 있는 생폴 드방스 지역이나 아를 지역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족적을 따라가는 내 마음이나 세상에 대한 내 지적 정서적 변경에는 담장이 쳐져있을 리
없다.
프로방스의 유래에는 깊은 고찰도 가능하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지역, 지방”이라는 본뜻에서 보듯
로마제국시대의 한 속주라는 개념에서 유래한다(라틴어로는 프로빈키아, 영어로는 프로빈스).
따뜻하고 비옥한 남쪽 지방에 대한 북쪽 사람들로부터의 끊임없는 침노에 맞서서 로마제국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 마침내 제국의 속주가 되면서 프로방스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는 식이다.
대제국의 영향 아래에서 그들은 나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 받았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해 나아
가다가 마침내는 바다건너 제국보다는 가까운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는 역사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 이른다. 아직도 프로방스 방언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이유를 알만하다.
프로방스에 대한 내 집착에는 알퐁스 도데의 “별” 말고도 대학 때의 은사이셨던 김춘수 시인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도 관련이 있다. 잘 알다시피 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첫 시행은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로 되어있다.
내가 샤갈을 알게 된 것은 청년시절이었으니 그때 이미 이 화가는 고향 러시아를 먼먼 오래전 떠나
온 터였다. 두 차례의 전란과 특히 나치즘의 반 유태인 운동이라는 참혹함 속에서 그는 파리와
베를린 시절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를 한 이후, 다시 프로방스의 생폴 드방스에서 만년의 활력을
휘날리던 때에 나는 겨우 그와 친숙해진 셈이었다.
이런 추이에 건성 듣보잡이였던 나로서는 처음 춘수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눈이 온다”라는 선언이
현실에 맞지 않는 혹은 현실부재의 과도한 은유가 아닌 가 오래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설령 러시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샤갈은 눈이 내리는 마을을 그린 바가 없고 그 이후
프로방스에서 만년을 지낼 때에는 더더욱 “마을의 눈”이라니 천부당만부당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샤갈이 고향을 그린 대표작 “나와 마을”에도 모름지기 눈이 내리거나 내린 흔적은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아집이랄까 얕은 지식을 나는 오래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고로 나의 발길을 이끈 생폴 드방스에서 처음 끄적거려내기 시작한 필자의 졸시 “생 폴
드방스의 샤갈 마을”의 서두는 “스승님/프로방스의 샤갈 마을을 다녀왔습니다/삼월에 눈이 오면/
겨울 열매들이 다시 올리브빛의 물이 드는/그 눈 마을이 아니라//샤갈이 영면하고 있는 마을/
사계절 눈 내리지 않는 남프랑스/저녁이면 모연이 잔뜩 끼는 산록/생폴 드 방스” 어쩌구로 전개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졸시의 끝 부분에서는 이러한 단견이 허튼 생각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종결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춘수시인의 시는 그가 샤갈의 그림 “나와 마을”을 감상하고 나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주제는 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감이다.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여
봄의 생명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의미 전달과 무관하게 서술적 의미로만 연결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그의 무의미적 시작기법을 이해하는 데에는 실로 나의 두발 여정이 필요했다는 말도
되겠다. 이렇게 시작한 프로방스의 샤갈 마을, 생폴 드방스의 탐방기를 여기 그려 보고자한다.
여정의 출사표가 너무 길어졌지만 그 나름의 여행 분위기는 벌써 천명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자위해
본다.
프로방스 지방으로 가는 비행기가 착륙한 곳은 남프랑스의 니스 공항이었다.
지난여름의 테러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도로를 아직도 군데군데 막아놓고 무슨 공사를 벌이고
있는 모양들이 공연히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니스는 영어의 나이스와 같은 어원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말도 있지만 오래전에 와봤던 기억은 정말로 나이스한 곳이었다.
그때는 니스 해변으로 나가서 누드 비치도 먼발치로 보고서 망원렌즈를 가슴 두근거리며 길게 뽑은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테러의 도시 니스를 어슬렁거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어서 떠나고
싶었으니 이 무슨 단견이었더란 말인가. 도시 전체가 그저 아파트 건물 가득한 주거지로만 보이니
테러리스트의 공포감 조장 목적은 달성되고야 말았다는 역설인가.
니스에는 저 유명한 마티스 컬렉션을 비롯하여 유명화가들의 전문 미술관이 있고 샤갈도 이곳에
개인 뮤지엄이 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는 이곳에 있던 본인의 미술관을 생폴 드방스로
옮기려고도 했다. 하지만 니스 시민의 반대로 어렵게 되자 대신에 즐겨 찾던 생 끌로드 예배당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노년의 여유를 즐겼다고 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테러에 관계
없이 그 뮤지엄만은 들렀다 오는 건 데 싶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후회는 나중에 온다.
우리는 부랴부랴 발길을 인근 모나코로 옮긴다. 모나코도 예전에 방문했던 때 보다는 때가 많이
묻었다는 느낌이다. 그레이스 켈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의 감상 탓인가, 아니면 내 여행 안목,
세계를 조금 더 보아온 입맛 탓이런가. 예전의 동화 같던 마을의 미감은 이제 별로이고 그저
인공미가 덕지덕지 붙은 장난감 마을 같다는 표현이 맞을까. 물론 저 거창한 돈이 오고가는 도박장은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이 도시국가를 일별 후 평가한다는 게 참 어이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글쟁이의 촉은 있지 않은 가 말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위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쪽빛 바다
풍경(코트다쥐르;쪽빛 해안이라는 뜻)이라고 표현되는 풍광만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엄청난 자태로
길손의 시선과 감각을 빨아들이고도 남음이 있다.
모나코를 떠난 발길은 에즈와 그라스라는 향수 마을을 지척에 두고 지나친다. 물론 작은 마을이라 갈
길 바쁜 발길을 붙잡아 두기도 힘들 터이지만 영화 “향수”의 고향이라는 데에서 그냥 흘려지나가기
아쉬움이 더하다. 내 언제 이 근방을 다시 둘러보리라.
산길을 돌고 돌아 달리다보니 정오를 넘긴 햇살이 멀리 아름다운 성채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바라고도 바라던 생폴 드방스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근거리에서 원근법으로 보는 인상이
더 입체적으로 아름다웠다. 성채로 들어가고 나면 이와는 또 다른 미시적 아름다움에 취해버릴
것이다.
이곳은 원래 14-16세기부터 요새로 구축된 마을이라고 한다. “프로방스 지방의 바오로 성인 마을”
이라는 뜻이다. 위치로 볼 때 생폴 드방스는 프로방스의 초입, 출입구라고 보아도 좋다.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자 벌써 높은 환영 조형물이 예술성을 자랑하며 우뚝서있다. 삼거리에 위치한
그 추상형태의 주물로된 환영 구조물 자체가 이미 설치미술인가 싶다. 뿐만 아니라 위치를 나타내는
입간판 아래에는 샤갈의 복사 그림이 거대하게 부착되어있다. 제목은 몰라도 벌써 화풍이 샤갈의
그림이다. 생폴 드방스는 언덕 위의 성채 마을로서의 위상 자체가 미학적 특성을 발현하지만 이에
더하여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등 유명 화가들의 활동 무대였다는 사실과 가수이자 배우인
이브 몽땅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도 세속적 이름이 더한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넓지 않은 마을
가운데에 화가의 갤러리와 작업실이 빼곡하다. 곳곳에 널린 조각 작품에는 빼빼로 타입의 조각가
자코메티의 친근한 작품들도 눈에 띄어서 공연히 마음이 놓인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들 이외에도 생폴 드방스는 자크 라베라, 그웬 라베라, 마르크 샤갈,
르느와르, 마네, 브라크, 후앙 미로 그리고 좀더 최근에 와선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아리엘
동바슬 등의 유명 예술가들이 거주했던 마을로도 잘 알려져있다. 롤링 스톤즈의 전 베이시스트
였던 빌 와이드도 이곳에 살고 있다. 미국의 작가인 제임스 볼드윈은 1987년 이곳에서 사망
하였으며 영국 배우 도널드 플리전스도 1995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브 몽탕은 이곳에서
결혼식도 올렸고 디카프리오는 밀월여행을 오기도 하였다.
생폴 드 방스는 해발 고도 39m-355m, 면적은 726평방km, 인구는 3477명으로 순전한 예술
창작, 전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견과 신예의 화가와 조각가들이 현재 70여개의 작업장을
열고 있는데 그 사이에 적당히 있는 먹거리와 마실거리 카페,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또한 예술이다. 12세기부터 로마네스크 스타일로 아름답게 건축된 고건물들이 그대로 고색창연
하게 남아있는 모습 또한 정말 숨이 막히도록 여행객의 오관을 압박한다.
사람들의 발길은 성채의 아래 낮은 쪽에서 시작하여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가는 그랑 거리, 큰 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게 된다. 이 큰길이라고 해봐야 서너 사람이 함께 걷기도 힘든 아기자기하게 좁은
골목길이지만 여기를 중심으로 다시 좌우로 샛길과 계단들이 나있어서 물고기의 뼈를 연상시키는
구조라고나 할까. 이 골목길들은 직진이 아니고 모두 꼬불꼬불하여 시선을 지치지 않게 하고 샛길은
단애처럼 오르내리게 된 곳도 있다. 이런 길 가에는 때로 우물도 있고 작은 분수도 있다. 지금은 모두
관광자원같이 되어버렸지만 원래는 생활의 필수시설이었을 것이다.
좌우의 갤러리와 공방은 작품을 전시하고 파는 열린 공간이지만 아울러 작가이자 주인이 작업을
하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그 공간이 너무나 예뻐서 셔터를 눌러대니 미소로 응대하는 화가도
있는가하면 험한 얼굴을 하는 조각가와도 마주친다. 하지만 내 탐험심이 쉽게 물러설 일은 아니다.
나중에 사진들을 펼쳐보니 정말 용감하게 얻은 화첩이 그 자체 예술품에 다름 아니었다.
중간 중간 예술가의 실명을 내다 건 갤러리가 많이 보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샤갈의 이름을 딴
간판이 많이 보이는 것은 이곳이 과연 샤갈의 마을임을 실증한다. 샤갈은 이 갤러리 골목 말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 들어서있는 주택가에서 생활을 했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생가”를
둘러볼 시간과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갤러리 마을 초입의 작업실 공간은 일찌감치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허름하게 무너져 내릴 듯 한 가건물이 무엇이라 따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고
지금은 과일과 식료품을 파는 가게로 그냥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샤갈은 그 장소에서 명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그렇게 지냈다고 한다. 만물은 그냥 그대로 거기 주저앉아있다고나 할까.
샤갈과 함께 춘수 선생님의 “샤갈의 눈이 내리는 마을”이 마음속에서 뒤채이고 있는데 발걸음은
어느 사이 문득 골목길의 맨 끝에 다다르고 있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 중에도 그곳이 공동묘지임을
알게 된다. 부연하자면 유태인 공동묘지라고 하는데 규모가 꽤 컸다. 고색이 창연하다 못해 무너져
내릴듯한 공동묘지 둘레의 돌담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입구에 세워진 입석에는 묻혀진 이들을 찾기
쉽게 번호가 무심한 듯 매겨져있다. 그런 중에도 샤갈의 이름은 화살표를 하여서 따로 쉽게 보이게
하였다. 입구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단숨에 도달한 묘소는 마르끄 샤갈의 이름에 걸맞게 유택도 크고 잘 단장이 되어있다. 주위의
돌멩이에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들도 담겨있다. 첫 부인 바바와의 애틋한 사랑과
그 맺음은 순애보와 같았는데, 마침내 미국으로 도피를 하여 이제 막 평화를 맞보려는 즈음 그녀는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다. 거장은 한동안 의기소침하여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나 8년쯤 후에
유태계 여인 미셀 브로드스키와 인연을 맺고 만년의 왕성한 창작의욕이 다시 되살아난 과정 등이
세 사람을 합장한 묘소에 그대로 알알이 현현되어있는 듯하다. 거기에 춘수 스승이 선순환을 노래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상념이 펄펄 눈이 되어 덮이는 듯하다.
이제 저녁이 으스름히 스며들고 모연이 끼기 시작하였다. 모연은 멀리 두고 온 국내의 복잡한
사정들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는 샤갈도 고향을 떠나 예술혼을 불태우다가 영면한 땅
생폴 드방스. 잠시나마 나도 상념의 불꽃, 내 얕은 고향떠나 가꾸어보고싶다. 이제 다음 발길은
고흐의 예술향 아를이다.
졸시의 뒷부분을 붙여본다. “예술가들이 붓을 움직이는 좁은 화랑 거리를 올라/끝자락에서 샤갈의
묘지를 만나니/하늘 맞닿는 공간에/잿빛 모연이 서리지 뭡니까//스승님은 고향 잃은 샤갈의
이력을/겨울에 이은 봄의 교체/생명 순환의 시어로 엮으셨으나/지금 샤갈의 영면마을은
끈적하게 모연의 불활성 속내이니/필경 내나라 생각이 묻어 온 탓입니다//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마네, 브라끄, 후앙미로가 걸었던/찬연한 발자위 위에/내 자위의 신발자위 하나 던져
두자는데/지친 모연이 저만치 어슬렁거립니다
생폴 드 방스의 샤갈 마을
김 유 조
스승님
프로방스의 샤갈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삼월에 눈이 오면
겨울 열매들이 다시 올리브빛의 물이 드는
그 눈 마을이 아니라
샤갈이 영면하고 있는 마을
사계절 눈 내리지 않는 남프랑스
예술가들이 붓을 움직이는 좁은 화랑 거리를 올라
끝자락에서 샤갈의 묘지를 만나니
하늘 맞닿는 공간에
잿빛 모연이 서리지 뭡니까
스승님은 고향 잃은 샤갈의 이력을
겨울에 이은 봄의 교체
생명 순환의 시어로 엮으셨으나
지금 샤갈의 영면마을은
끈적하게 모연의 불활성 속내이니
필경 내 나라 생각이 묻어 온 탓입니다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마네, 브라끄, 후앙미로가 걸었던
찬연한 발자위 위에
내 자위의 신발자위 하나 던져두자는데
지친 모연이 저만치 어슬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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