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두언 ‘역병의 연대기’를 다시 쓰자
영국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665년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다니엘 디포는 소설, 『역병의 연대기』 혹은
『역병의 해 일지』 (A Journal of the Plague Year)를
썼다. 책은 1722년 3월에 출간되었는데 디포의 나이
59세 때였다. 그가 런던의 흑사병을 목격한 것은 그러니까
나이 겨우 5세 때였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목격담을
적어내기에는 작가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사실도 있었다.
7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는 당시 런던 시 인구 46만 명 중
15%나 되었으니 어린나이의 소년이 기억하고 저널로
기록해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재난이었으므로
표절이라는 반론도 나왔다.
그러나 디포가 누구인가. 『로빈슨 크루소』를 쓴 저 문호의
상상력과 자료 정리의 성실성은 만인의 인정을 받았고
작품은 위대한 역사소설로 자리매김을 한다.
그리고 ‘연대기(journal)’라는 제목에 걸맞게 당시의 상황을
한 점 오류나 빈틈도 없이 기록하려고 한 성실한 작가정신은
오늘을 살며 글을 쓴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
어쩌다가 우리도 오늘날 신 역병의 시대에 동시대인이 되어
엮이게 되었다.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하였기에 처음 ‘우한
폐렴’이라던 병명은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19(COVID 19)
로 조정되고 그 황화黃禍의 여파는 바로 이웃한 우리가
가장 많이 받아서 세계제일의 피해국가가 되고 말았으며
발원지로 덤터기를 쓰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칠 지경에 이르
렀다. 물론 이런 억울하고 분한 지경이 한중간의 역사에
어디 한두 번이던가.
역병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은 갑골문(甲骨文)에 남아있다.
'병'(病)자와 '질'(疾)자는 기원전 13세기 상(商)왕조 시기
남겨진 갑골문에서 처음 출현했다. 주(周)나라 때부터
역사책에는 '대역'(大疫·역병의 대유행)이란 글자가 자주
나오기 시작한다. 오늘날로 치면 판데믹pandemic 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는 흑사병도 중국 대륙이
발원지라는 것이 정설이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우리
나라에서는 무오년 독감이라 불렀다), 1957년의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등도 모두 중국에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럴 때 우리나라의 기록문학은 신이적(神異的) 체험의
설화 수준이고 대작은 크게 눈에 띄지 않으나 2013년에
정이정의 괴질을 다룬 소설 『28』이 나왔음을 일단 여기
에서는 짚고만 넘어간다.
서양에서의 질병의 역사는 기원전 430년에 그 기록을
남긴다. 역사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아 인구의
25%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감염병의 공포에 질린 그리스 사람들은 나도
언젠가 걸릴 것이고, 결국엔 모두가 역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염 병의 세계적 범 유행을 의미하는 단어 ‘판데믹'의
어원은 그리스어 ‘판’(모든)과 ‘데모스’(사람)다. 그리스의
기원전 5세기 당시는 흑사병으로 의심되는 역병의 시대
이면서 동시에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시대
이기도 했다. 질병의 역사가 인류의 서사문학사와 질긴
인연을 맺는 현장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환희와 열락의 순간은 짧고 신음과 고통의 무시무시한
운명은 신탁과 함께 인류의 문화사에 엄숙하게 드리운다.
인간사의 드라마를 재현하는 문학에 역병이 결정적 역할
을 하는 당위성이기도하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서사는 그가
다스리는 테베에 역병이 돌면서 그 원인을 캐기 시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배경뿐만 아니라 쓰여 진
시대도 역병의 시대였다. 결국 신탁의 숙명에 따라서
어머니를 아내로 삼게 되었던 오이디푸스 왕은 왕비
이오카스테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침내 왕은 이오카스테의 황금장식으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역병이 프롤로그인 이 비극작품은 사실은 인간의 본능에
내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형상화한 원전으로 후일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보듯 인간 심리의 본원을 캐는
문학적 샘물 역할이 되기도 한다.
이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두
연인이 결국 비극적 결과를 맞은 것은 당시 역병이 유행
하여 로렌스 신부가 자신의 계획을 담은 편지를 로미오
에게 전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데에서 기인한다.
흥미로운 사실로는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쓰던 시절에도
영국에는 페스트가 유행했고 작가의 작품에 그 시대상이
녹아들어갔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역병의 문학사를 들추자면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1351년)을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창궐한 흑사병을 피해
숨어든 일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가 각자 열 가지 이야기
총100편을 서로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과 악덕, 허위를 폭로하는 내용이다.
현대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과 혼동하기 쉬운 영국의
희곡작가 벤 존슨의 『연금술사』(1610년)는 역병이 찾아
온 런던을 그 배경으로 삼는다. 역병과의 관계는 단순히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특성, 극의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도덕적 판단으로 확대된다. 이 극의 주인공은
지배 계층이 역병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내밀한
언어와 책략으로 온 계층의 사람들을 오염시킨다. 5막에서
주인이 돌아와 하인을 몰아내고 질서를 회복하지만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작가는 암시한다.
결국 『연금술사』는 역병의 상징을 차용해서 인간이 겉
으로 드러내는 그럴듯한 이념을 넘어 더 깊은 차원에서
준동하는 권력의지와 치사한 수단을 폭로하여 오늘날의
정치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년)는 무서운 전염병이
휩쓰는 가운데 고립되어 버린 도시에서 공포와 죽음,
이별 등 극한의 절망적 상황 속에 처한 인간 군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출간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면서 2차
세계 대전 시기를 경험한 동시대인들에게 큰 공감을
얻어 냈다. 카뮈는 재앙에 대처하는 인간상들의 서로
다른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첫째 유형은 이 도시의 이러한 사태가 ‘이 고장 사람이 아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기자 랑베르의
도피적 태도이다. 둘째는 초월적인 존재에 기대어 상황을
해석하려는 파늘루 신부의 태도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이 작품의 주요 주제인 반항적 인간형의 태도이다.
토박이도 아니면서 마을에 머무는 미지의 인물 타루는
의사 리유를 찾아가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된 조직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리유는 타루에게 동의하고 페스트, 즉 질병과 죽음에 맞서
싸우며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려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성실성, 참된 인간의 실존적
자세가 필요함을 세상에 천명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러한 작가정신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저
처참한 부조리형상이 페스트라는 역병의 상징 속에서 재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부푼 꿈을 안고 새로운 천년을 계획하다가 한
순간에 재난의 세기로 맞이하게 된 ’지금, 여기‘ 우리 문인
들에게도 당장 그대로 적용될 상황 전개가 아닌가 싶다.
사실 권두언을 쓰는 이 시간은 ‘자의적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 등등의 생경한 어휘가 전혀 생소하지 않게 들리는
참으로 기이한 순간으로 ‘역병의 신 연대기’를 쓰는
마음이다. 겪지 않으면 좋았을 오늘의 체험이지만 기왕에
닥친 사실을 부인할 수 없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이
재앙이 인류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깊이 천착해
보아야할 귀중한 기회가 아닌가 한다.
사실 시절이 이토록 위중하지 않았더라면 『현대작가』
라는 제호에서의 ‘현대’ 즉 ‘모던’, ‘모더니즘’, ‘모더니티’
라는 의미에 대한 조명과 재조명을 하며 벌써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을 운위하는 지금도
우리는 어떻게 영원한 모더니스트가 되어야하는가를
주창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앞으로 언제라도 다시 있을 것이고
지금은 판데믹한 역병이 창궐한 이 시대상을 지나간
역병시대에 견주어 사유해 봄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흔히 인용하듯이 “이 또한 모두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우리 문학인들은 ‘이 또한 지나갈 일’로
이 시대를 보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신 역병의 연대기를 꼼꼼히 기록하고 그 의미와 앞
으로의 미래상을 예지의 능력으로 가늠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역병의 신 연대기’를 쓸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