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날에(착각의 시학 21 가을호)
김 유 조
할로윈이 늦가을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할로윈 데이라고도 하지만 저녁행사이기에 그냥 할로윈이 맞다고 할 것이다. 크리스마스처럼 할로우마스라는 말도 영어에는 있다. 아무튼 이 날이 닥아 올 때쯤이면 나는 가슴아리(앓이?)를 한다. 외국인으로서의 내 한글 실력에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다.
강남역 윗 쪽의 역삼동, 그러니까 예전 ‘국립도서관 역삼 분원’이 있던 근처에 우리 영어 회화 학원, ‘아메리칸 가든’이 있다. 원래는 ‘아메리칸 킨더가튼(American Kindergarten)’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킨더가튼’이 유치원이라는 뜻이기에 그러면 혹시 교육부의 관리를 받아야할지도 모른다는 구청 사회 교육 담당의 지적이 있어서 단순히 구청 상대만 하자는 방법으로 두루뭉수리 ‘아메리칸 가든’이 되었는데 원장님은 처음 식당 이름으로 오해받을 까봐서 걱정했다고도 한다.
가든이란 말의 홍수에 이런 걱정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covid 19, 그러니까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는 가장 성공한 조기 영어 회화 학원으로 이름을 떨치며 성업 중이었다. 그러다가 한 두어해 전염병의 시절을 겪으며 이곳도 파리를 날리는 형편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떨릴 지경이다. 겨우 비대면 수업, 줌 방식 등으로 생활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이제 다시 할로윈을 맞으며 겨우 숨통을 트는 순간이 찾아온 것도 같다. 우리 학원의 주 고객은 학령 전 아이들, 즉 유치원생들이 태반이고 초등학생들도 약간 있는데 한국의 부모들이 갖는 자녀교육열이 코로나도 이겨냈다고 우리 외국인 영어 선생들을 입을 모은다.
나는 캐나다의 동부 ‘노바 스코셔’ 주의 주립대학에서 유치원 교사 과정의 학사과정을 마쳤으나, 새 스코틀란드라는 뜻을 갖인 내 고향은 한 때 뉴 펀드랜드 해안이 세계 최고의 어장이던 20세기 초를 정점으로 하여서 마침내 산업 생산이 서서히 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로 밀리면서 의무 교육이 되다시피 한 유치원 교사 생활도 고향에서는 하지 못하고, 코리아까지 밀려온 30대 중반의 캐너디언 노처녀이다. 잘 살 때의 노바 스코셔 학교의 학급 생 수는 25명이었는데 이제는 40명을 육박하니 신임 교사를 뽑을 리가 없다.
아, 내가 처음부터 코리아로 온건 아니고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처음에는 멕시코로 가서 사설 영어회화 학원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경제 불황에 빠지고 심지어 게릴라들이 멕시코시티로까지 내려오게 될 무렵, 나는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서 태국으로 갔다가 7-8년 전부터 서울 강남으로 왔지만 마음은 항상 집시이다.
이 곳 강남의 영어 학원가의 경기는 88 올림픽 때가 최고였다고 영어 강사들의 글로벌 인터넷에 떠있지만 요즈음도 아직은 해 볼만하다는 것이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의 평가이다. 물론 코로나 이전의 반응이긴 하였지만 역병의 시절에는 세상 어디나 똑 같은 입장이고 이제 한 고비를 넘었으니 예전의 영화가 다시 찾아오리라고 굳게 믿는 심정이다. 다시 일상이 돌아오면 특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대상이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그보다 위 학년이 되면 돈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아예 유학을 보내거나 방학 때 현지 어학 실습을 보내기 때문에 강남에서는 오히려 수강생이 줄어드는 형편이다.
내가 맡고 있는 유치원생들도 관리를 잘 못하면 한 순간에 썰물이다. 나는 원래 인디언과 프랑스 사람 사이의 튀기인데 외모가 동양인을 더 닮아서 소위 파란눈, 노랑머리의 서양 얼굴에 비해서는 값이 덜 나간다. 나는 궁리 끝에 에보니 칼라, 정말 흑단 같은 검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눈에는 마침 새로 개발된 파란 콘택트렌즈를 꼈다. 얼굴이 좀 넓은 편이지만 유려한 영어와 유치원 교사 자격증이 이를 보상하여서 렌즈까지 낀 이후에는 값이 많이 올랐다. 또 한국 사람이나 외국인 강사들과 아무 스캔들이 없다는 점도 내 몸 값을 올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조금 험한 표현이지만 나는 내 몸 위에 누구도 올려놓지 않고 바이시 버서(vice versa),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올라가지 않는다는 뜻인데 의미전달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물들이는 행동은 우리 조상인 인디언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이곳 강남 처녀들도 머리를 물들이고 유명한 탤런트를 따라서 파란 렌즈들을 많이 끼고 다닌다니 마음의 위로가 된다. 뿐만 아니라 나와 결코 스킨십을 나눌 찬스는 없을 한국의 청년들까지 무조건 많이 나를 따르고, 학부형들의 특별한 사례금도 나에 대한 존중의 뜻으로 해석하면서 나는 이제야 사는 보람을 만끽한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런 뇌물 풍조에 익숙지 않아서 거절을 했다가 강사자리를 짤리기도 했고, 외로움을 못 이겨서 어떤 작은 학원의 원장이라는 한국 남자와 동거도 해보았으나 매일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마침내 손찌검까지 하는 통에 이별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동거 원장의 수작으로 강남에서는 자리를 한동안 잡지도 못하고 변두리에서 개인 교습을 하다가 목동에 있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쫓겨날 번도 하였으나, "데이비드 영"이라는 미국 청년의 도움으로 지금의 꽤 괜찮은 학원, ‘아메리칸 가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몇 해 전에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내 마음은 다시 참람해졌을 뿐이다.
그가 죽은 날이 할로윈의 저녁이었다. 원래 우리 학원에서는 할로윈에 최고의 이벤트를 벌인다. 영어 연극도 아이들이 연습하여 올리고 학부형들을 초대한다. 연극이 끝나면 학부형들과 칵테일파티를 잠시 하는데 이때 그들이 우리 회화 강사들에게 주는 선물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학부형들이 인근 강남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고 나면 학생들은 "트릭-오어-트리트"라고 소리 지르며 북미 대륙에서 하는 것과 꼭 같이, 아니 더 극성스럽게 자기 집과 친구들의 집을 함께 방문한다.
"Trick(혼이 나보겠어요)? or treat(대접을 하시겠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소리지르며 초인종을 누르면 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한 이 곳 학부형들은 영어 잘하는 자기 아들과 미래의 동지들에게 듬뿍 선물을 준다. 아니 학부형들이 투자를 하는 것은 이 날 만이 아니다. 며칠 전부터 잭커 랜턴(jack-of-lantern), 그러니까 호박 랜턴을 학원의 단체 구입으로 장만하여주고 또 고추처럼 생긴 할로윈 의상들도 함께 마련해준다.
이런 복잡하고 성가신 일들은 모두 데이비드의 몫으로 용산에 있는 미8군 매장에서 해결하였다. 지금 같으면 데이비드가 티코라도 샀을 텐데 그 때만 해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행사에 늦지 않으려고 그날 그는 짐을 앞뒤로 잔뜩 매달고 속력를 냈을 것이고 한강변의 교통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곡예와 위험천만이었다. 시간이 넘어도 장식품과 옷가지와 소품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낭패가 난 영어학원에 갑자기 비보가 날아들었다.
미국에서 온 그의 가족이래야 누이동생 하나였다. 부모는 이혼하여서 어머니는 연락두절, 아버지는 와병 중, 누이만 학원에서 보내준 비행기 표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가 오빠의 시신을 알미늄 관에 담아서 나갔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보험이 되어있는 이 나라의 질서를 보고 나와 동료들은 놀랐지만 내 개인적 슬픔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데이비드가 동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 패턴이나 강의 시간이 달라서 따로 살았지만 우리는 부부처럼 서로를 생각하였다. 객지라서가 아니라 이 외로운 산업사회의 자투리 지역에서 몸을 나누고 믿을 수 있는 상대가 하나쯤, 그래 하나만 골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이었던지---.
우리는 청춘의 방식으로 서로를 확인하였다. 그가 내 온 몸을 섭렵하고 나면 나는 항상 재생, 아니 신생을 느꼈었다. 그 모든 구원의 순간들이 할로윈의 저녁에 갑자기 끝났다.
데이비드와 이렇게 지상에서의 이별을 하고나서 나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슬픔이 솟구칠 때의 식음 전폐, 그래 사람들은 이를 거식증이라고 하였고 이후의 폭식, 맞아, 나중에는 슬플 때에도 계속 먹기만 한 적이 많았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몸 무게는 이제 이 곳 기준으로 말하면 100kg이 넘는다. 인디언 피가 섞인 내 키는 겨우 163 센티미터.
그러나 이런 내 모양을 아무도 탓하지는 않는다. 내가 쓴 교재와 티칭 노 하우, 밤을 새워서 준비하는 교육 자료와 매일 매일의 성실한 과제물 평가, 그리고 노 스캔들,
‘할로윈 호구 방문’ 이라는 요란한 행사를 내 클래스에서는 오늘이 아니고 어제 저녁 그러니까 30일에 치렀다. 아이들은 "트릭 오어 트리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호박 랜턴을 들고 그리고 고추 모양의 의상을 입고서 아파트와 빌라 촌을 돌아다녔다. 나도 물론 그 호박들의 대열에 끼어서.
사실 할로윈은 ‘올 세인츠데이’, 그러니까 ‘제성첨--’ 무슨 날이라고 번역하던가, 그래 ‘만성절’인 11월 1일의 하루 전날, 그러니까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가수가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공교롭게도 이 날이 주일이었다.
할로윈은 사실 영국의 선주민들이 믿던 이교도적인, 비기독교적 풍습으로 전통, 보수 교회에서는 질색이다. 내 소망이라고 하면 한국에서 학생들 영어 잘 가르치는 것과 오로지 종교심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일 뿐이다.
주일성수!
핼로윈 행사를 내가 맡은 클래스만이라도 주일을 피하여 하루 앞당긴 것은 그런 내 생각 때문이었다. 하긴 이교적 잡신들도 인간이 바치는 공물을 주일 보다는 하루 전날에 공양 받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약력; 문학마을 등단, 국제PEN 한국본부 부이사장, 건국대 명예교수(부총장 역임), 미국소설학회 서초문인협회 등 회장 역임, 여행문화 주간, 010-4523-3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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