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엄마도 그러니깐 메조이면서도 계속 잘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었네, 뭘!
그런데 2류 타령은 왜 해요? 순 엄살이야---."
"메조 인생은 그렇게 아등바등해야 겨우 잘난 그룹의 말석이라도 지킨다는걸
예전엔 미쳐 몰랐다는 이야기야.
나이 들어서 그런걸 깨닫고 깜짝 놀라보니 무슨 소용에 닫나.
그래서 내가 널 지금부터 자꾸 끌어 올리려고하는데, 너도 나처럼 소프라노
가 되지 못하고, 그런데도 대만족이라고 하고 있으니 내가 짜증과 한숨만
난다는 것이야."
"남이 들으면 진짜 욕먹겠어요.
엄마, 정말 괜찮아요. 난 뽑힌 중에서라면 2류 아니라 3류가 되어도 좋겠어.
그리고 우리 집 안에서 잘난 아빠, 아름다운 엄마의 사랑을 흠뻑 받고
사니까 그 정도만 해도 난 만족이야.
정말 부족함 없어요, 엄마!
아빠도 돈 없이 법관 생활 시작하셔서 공무원 청렴상도 타시고 이제 국가의
아주 중요한 일 하신다면서요?
우리가 강남에 안 살면 어때요? 아빠 출근도 강만 건너면 되신다면서---.
자랑은 안해도 자부심은 갖고 살자고 언젠가 엄마도 말했잖아요. "
"내가 마음에 품고 사는 생각하고 딸 자식에게 닥달하는게 어찌 갔겠니.
이중인격자라도 좋고 이중성격자라도 좋다.
너야 정말 요람에서부터 사랑과 긍지의 자리를 누리고 살았으니 나하고는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겠다만, 난 항상 사랑과 정과 성취욕구에 목말라 온
세대야.
내 아버지, 그러니까 돌아가신 네 외할아버지는 나라 밖에 계신 날이 더
많았고, 국내에 계실 때에도 남자가 대문을 나서면 가정은 잊는게 당연
하다고 선언을 하신 분이란다.
개인의 성취를 위하여 가정과 가족을 희생시키시면서 무슨 애국지사 같은
생각을 하셨단다.
일주일이면 여드레 술을 드신 분이셨다.
어째 하루가 남는가 하면 낮 술이 들어가신다더라---."
"외할머니가 힘드셨지 엄마는 일류였다면서요. 그 시절에도 이미 남들과는
달리 엄마는 초등학교 다니면서부터 북치고 장구치고 부채춤도 추고
노래하며 세계를 돌아다녔잖아요.
빈 어린이 합창단이나 파리 나무 십자가 처럼 '코리아 칠드런즈
리빙 코러스'로 온 세상에 소망과 생명의 노래를 전파하였고,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까지도 무슨 무슨 레이디즈 싱어즈로 계속 세계 일주를
일년에 한두번씩은 했잖아요. 메조 파트를 굳세게 지키시면서---."
"그건 너도 알다시피 싱어즈라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독창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 아니냐.
그러니 코러스를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솔로로 봐주는거야.
단원들의 사기를 위해서거나 객석의 기대치를 높이는 전략이라고 할는지
모르겠다만 레이디즈 싱어즈의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자부심의 화신
이었지.
무대에 서는 순서까지도 소세알, 그러니까 객석에서 무대를 볼때 너도
잘 알다시피 왼쪽 공간으로부터 소프라노, 그 다음 자리인 중간 위치가
세컨드 소프라노인 메조, 그리고 오른쪽이 알토, 이렇게 서니까 메조가
가장 중간에서 스폿 라이트를 받았지.
더구나 좌우의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는 무대 중앙을 향하여 비스듬히
서니까 자기 얼굴도 객석으로 잘 나오지 않지.
위로사인지 몰라도 지휘자 선생님은 그래서 제일 예쁜 단원들을 메조로
뽑아서 중간에 세운다고 내게 은근히 말씀하시더군.
아, 그래서 메조가 다 예뻤지만 혹시 그 중에서 좀 덜 예쁜 싱어가 있으면
무대의 정 중앙에 세웠단다.
이유가 뭔지는 내가 전에 말했지?"
이정미 여사는 말을 멈추고나서 잠시 딸을 바라보았다.
"아, 지휘자 선생님이 그 얼굴 가려 주니까, 호호호, 하하하."
모녀는 그 말을 거의 동시에 하고 웃었다.
"엄마, 배고파. 맛있는거 사먹어요. 그런데 지휘자 선생님 하고는 가까이
지낸적 없었어요?
연애 감정 같은걸로---. 돈텔 파파 원칙 지킬께. 말해봐요."
"미친 것, 코치 선생하고 여자 운동 선수가 연애하고 결혼하는거 봤니?
눈앞의 목표가 뚜렷하면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어.
내가 항상 지휘자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에이, 앙드레 프레빈이나 폰 카라얀의 경우라던지---. 우리나라 출신
최고의 디바들과 염문이 있었잖아요."
"그건 모두 최고의 현악 독주자나 소프라노 독창자와 마에스트로 사이의
경지였지. 난 겨우 합창단의 메조였어."
"그래서 나보고 소프라노 하라는거예요? 프리마 돈나가 되어서 마에스트로
와 염문 뿌리라고?"
"얘가 못 할 말이 없네. 엄마를 데리고 놀아요, 아예. 농담이라도 좀 도가
지나치는구나.
하여간 어쩌겠니. 메조로 출발했으니 메조 디바라도 꼭 되어야지.
그래, 사실 요즈음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오페라의 악역이나 실패한 프로태고니스트와 악마의 목소리에나 맞는것,
그리고 소프라노 못되어 밀린 음역의 성악가라던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이제는 더 폭넓은 음역대의 소유자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니 나도 큰
위안이 되더구나."
"엄마, 나 좋은 대학으로 입학 할테니까 이제 입시 끝나고 한 숨 돌리시면
한 때 좋아했던 지휘자 선생님도 한번 찾아봐요. 돈텔 파파---."
"그렇지 않아도 얼마전에 나를 극진히, 정말 끔찍히 보살펴 주시던 지휘자
선생님을 뵌적이 있단다.
별명이 그 때 인기 절정의 팻 부운이었어.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팻 부운. "
"우와, 끝내준다, 울 엄마, 로맨스 그레이!"
"까불지 말어라.
슬픈 이야기야.
서울 역에서였어."
이정미 여사는 목이 메어 말을 자꾸 끊어야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