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출장의 바쁜 일정에서도 시간을 뚝떼어,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가 시작하였다가 완성치 못하고 죽은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 현장을 둘러본 것은
여분의 큰 소득이었다.
이어서 서울가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할 화란의 스키폴 공항에 내가 타고 들어온 비행기는 예정보다 30분쯤
연착이 되었으나 서울행 KLM을 타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급하게 환승 수속을 마치고 마침내 기내에서 "파이낸셜 타임즈"를 펼칠 때 쯤에는 그간의 피로가
몰려왔으나 기분은 상쾌하였다.
"어? 큰일 날뻔했네."1면 중간쯤에 난 기사를 보니 지금 스키폴 공항은 소위 "와일드 캣 스트라이크" 중이어서,
그 곳에서는 드물게보는 탈법 파업 상태라고 하였다.
아울러 탑승과 환승 수속이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옆의 동양인 청년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서울행의 동양인이라면 한국 혈통인데 왠 영어?청년에 따르면 자기는 화란에 사는 한국출신인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와서 한국말은 거의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릴때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이 청년은 지금 암스텔담 대학에서 건축학을 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에 한국에 가서 "서머 인턴"도 건설현장에서 하고 한국인 친구들도 만나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실례지만 이름이 뭐요?"내가 명함을 꺼내며 물어보았다.
"이창호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바둑왕의 이름과 같네요. 바둑 둘줄 아시오? 동양의 체스 말이오."
"이창호라는 바둑왕 이야기는 아리랑에서 들었지요. 물론 바둑은 못두지만요---"
"한국에 친구가 많소?"
"작년 여름에도 한국에서 건축현장 인턴을 하러 왔기에 몇사람이 생겼지요."
그가 담담하게 말을해서 한국 청년들과 크게 가까워진건 아닌가부다라는 생각이 들엇다.
"오늘 아침에 나는 가우디 성당을 방문했는데 오후에는 이렇게 건축학도를 만나니, 나에겐 하루가
건축의 날 같군요"
내가 조금 우스개 소리를 했으나 그는 웃지않았다.
"암스텔담에는 아리랑이라는 모임이 있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웃지도 않고 조용히 말하던 그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자기 말에 열정을 담았다.
"저는 그 모임에 나간지가 얼마 되지않는데 시작한지는 벌써 몇해 되었나봐요. 젊은이들끼리---"
"객지에서 참 좋은 모임 만들었군요. 주로 유학생들이겠지요?"
나의 대답겸 묻는 말은 무료를 달래는 수준이었다.
잠이 자꾸 몰려드는데 동족과 모국어도 아닌 언어로 신경쓰기가 사실 번거로웠다.
"아니 그 모임은 주로 화란으로 온 입양아들의 만남이랍니다."
"세상에! 여기도 입양아들이 그렇게 많아요?"
"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보다는 못해도 많답니다. 다만 저는 입양아도 아니고 재미로 나가 본지도 얼마되지
않아서 구체적인건 잘 모르지만---."
그가 구체적인 것은 잘 모른다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무언가를 드러내기 싫은 함의(含意)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얼핏들었다.
하지만 조름 오는 과객이 그런것 까지 꼬치꼬치 관심갖기는 싫었다.
조금 후에 그가 쭈볏거리더니 부탁 비슷한 것을 했다.아니, 부탁의 말이었다.
"사실은 여기 아리랑에서 알게 된 걸-프렌드가 저 뒷쪽에 따로 앉아있는데 자리를 좀 바꿔주실 수
있겠는지요?"
어째 말에 열정이 담기는가 했더니 불순한 동기가 좀 있었구나---.
"그건 어렵지 않지만 그녀도 입양아인가요?"
"네, 그런데 한국의 친 부모를 찾게 되어서 1년에 한번은 만나러가지요."
"아, 생각이 나네. 북유럽에도 입양아가 많이 들어갔지요.몇년전에 우리 공영방송에서 '수잔 브링크스의 아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는데, 북유럽 쪽으로 입양이 된 어떤 처녀의 애환을 그린 것이었어요.
본적이 있어요?"
"말은 들었는데 그 프로그램은 보지 못했죠. 사실 그 방영 때문에 화란에서도 아리랑이라는 모임이 생겼답니다.
속으로 앓지만 말고 모여서 털어놓고 또 의견도 교환하고 힘도 모으자고---."
"미스터 리는 당사자가 아니고 일종의 업저버라서 모임에서 마음은 좀 편하겠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금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그의 초조가 나의 좌석 변경 동의 여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자리를 내주기로 하였다.
"하나만 더 물어 봅시다. 걸 프렌드라면 결혼할 사이요?"
"아뇨. 제가 걸 쪽이 아니라 프렌드 쪽에 더 강세를 주어서발음했잖아요. 저 여자아이는 또 자기
애인(스위트 하트)도 있어요."
말을 잇는 사이에 닥아온 "코리언-더취" 처녀를 보니 말끔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바꾼 자리에서 나는 9시간 반 동안을 졸다가 영화를 보다가 하며 인천 공항으로 들어왔다.
뒷쪽 화장실로 갈 때 두사람이 얼싸안고 있는 모습을나는 모른체 하였다.
입국수속을 할 때 그는 외국인 전용 쪽으로 갔는데,내 옆을 지나가면서는 이제 별로 아는척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배기지를 찾는 벨트라인에서도 나를 짐짓 외면하였는데 내가 아는체하며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았더니
한 쪽 눈이 심한 사시였다.
벨트라인은 조금 가동하더니 이내 멈추었다.
화란 공항이 파업이라 짐들이 거의 실려오지 못하였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모두들 물표를 갖고서 짐찾을 예약을 하느라 또한번 줄을 서고 난리가 났다.
그는 내 앞에 서 있더니 자리를 양보한다는 듯이 옆줄 뒷쪽으로 갔다.
내가 만류했으나 그는 집요했다.
이럭저럭 신고를 마치고 다음날 택배를 해준다는 약속까지 받고나서 발길을 돌리는데 또 그와 조우하였다.
그의 걸 프랜드는 짐이 없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 경직되어있어서 함께 걸어나갈 생각을 하니 나도 성가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신고를 받고 있었던 뒷쪽 공항 담당자가 큰 소리로 우리족을 향하여 소리쳤다.
"미스터 트라이던트, 플리스 캄 백 어게인"
그가 흠칫하더니 나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몸을 돌렸다.
"미스터 트라이던트", "사시(斜視)", "지체아를 유기하는 매서운 모정의 나라", "수잔 브링크스의 아리랑"---,
나는 무엇을 어떻게 조합하여야 모국어도 모르는 이 청년의,진정한 오늘의 청사진이 나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