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빼빼로 날에 모인 사람들"

원평재 2004. 11. 8. 00:23
 Brahms - Symphony No.4 op.98 E minor "가을 교향곡" 제1악장 Allegro non troppo

"빼빼로 날"에 11명이 남한산성에 모였다.11월 11일을 그렇게 부르는 줄이야 물론 인터넷 상식의 테두리에 속한다.원래 우리 모임은 고등학교 때의 문예반에서 시작되었고 "청맥"이니 "날뫼"니 시답잖은 서클 이름을 몇가지 거친다음구성원들의 해학과 패러디 감각이 너무 튀어서 "입만 동동 뜬다"는 자조와 자멸감을 바탕으로마침내 모임의 영원한 이름은 "동동"으로 낙착되고 말았다.물론 해학의 무리들이 모임의 이름을 그냥 입만 뜬다는 의미로 방치해 두지는 않았고 "고려속요"의 그 "동동(動動)"을 인용하여 만고에 빛날 선언문은작성해 두었으나 여기에서 그걸 낭독하자는건 물론 아니고 첫 연(聯)이랄까, 첫 구절만 상기해 본다.(動動) 덕(德)일랑 뒷잔에 바치고 복(福)일랑 앞잔에 바치고 덕(德)이라 복(福)이라 하는 것들, 나와 오옵니다 아으 동동(動動)다리 어쨌든 끼리끼리 패거리 정신이 알려져서 눈에 나면 좋을게 없다.아으 동동다리동기회 정례 모임이나, 송년회, 이런저런 취미회같은데에서도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앉지 않을만큼 서로 조심하여 처신하였다.옛날, 대학의 교양학부 시절에야 우리의 모임은공공연하였었고, 우리가 매일 만나지 않으면 지구의 공전과 자전이 문득 멈추리라는 우려와 확신으로 무리들은 몰려다녔고졸업과 입대, 그리고 유학이나 해외 근무로 우리의 거처가 불확실하던 때에도 서로간에 빗발치는 서신과 장거리 전화로 우리는 서로의 별자리를 시시각각 확인하였다.이제 행성(行星)이 항성(恒星)으로 자리를 잡을 무렵, 우리는 적어도 1년에 두번은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하고여름과 겨울 한철에 각각 하루 낮밤을 비워놓기로 뜻을 모았다.한때 시나 산문이나 그림에서 인생을 결하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이그런 영역과는 전혀 별도의 일을 하며 밥먹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장하기도 하고 징하기도 하였으나 하여간 1년 중 두번이라는 정기 모임만은 피눈물나는 열정으로 견실하게 지켜나갔다. 그건 아무래도 뮤즈의 신에게 올렸던 청년시절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버린 배신자들이 마지막 회개의 의식같은 비장함을 간직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그런데 올해 여름 모임을 안동 하회 마을에서 1박2일로 치루면서 무리들간에는 금년 가을을 그냥 보내지는 말자는 묵언의 약속이랄까,기이한 공감대가 느닷없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누구의 입에서랄 것도 없이 금년 다음 모임은 겨울까지 갈 것이 아니라, 늦가을에 다시 한번 모여야하지 않겠는가,"만추"라는 어휘가 모두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제2악장 Andante moderato

아니, 정확하게 시초는 이러하였다."여보게들, LA에 사는 L이 이번 여름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지 못했잖아. 그런데 금년 가을에는 꼭 한번 모임을 더 갖자고 전화를 하더군."회장이 지나가는 투로 말하였다.보통 때 같으면 그 녀석이 이런 정기 모임에는 오지도 않고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냐고 성토와 핀잔이 대단하였겠지만, 그 여름 모임에서만은 아무 군말들이 없었다.아니 오히려 다들 머리를 주억이며 동의를 하고 있었다."그럼 날짜는 바로 그 날로 잡아야겠지?"또 모두들 어느 날이냐는 질문도 없이 끄덕끄덕.물론 그날이란 11월 11일이었다."장소는 어디로 할까?""그것도 남한산성 쪽이라야지 뭐---."다소 처연한 분위기였달까, 시무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들이 모이더니 군말없이 장소도 금방 합의되었다.보통 우리가 모이면 무엇을 하였는가.까놓고 말하여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보통 노래방에서 첫날 밤의 행사가 끝난다.마당놀이를 간적도 있긴하다.그럼 다음날은?경마장에 한번 가보자, 아니 경륜장도 짜릿하다던데---,레즈비안 연극은 어때? 벌거벗는 연극도 있지.에로스 박물관은 어때?여러가지 일탈성 제안이 있었고 실천적 방안이 모색되어서 몇차례 성사도 되었지만,결국은 늦은 기상과 게으른 산책, 해장술과 모든 것에 대한 느린 반응으로 휴일 한나절을 지내다가 오후의 햇살이 뉘엿거리면 총총히 헤어지는 것이었다.마치 무엇에 쫓기듯---.두번째 날 행사를 위한 건설적 제안이 매번 조금씩 있었으나,대세는 번번이 파괴적 분위기로 귀결이 났다.그런 마당에 올해는 가을 모임을 특별히 갖여야 된다는 만장일치의 결론이 났으니 참으로 희안한 사태였다.더우기 참석하지도 않은 해외거주자의 제안이 통과되다니.이제 그 기이한 날이 마침내 왔다.우리는 LA에서 온 L군이 묵고 있는 시내의 어떤 호텔 커피숍에서 일차 회동하여 남한산성의 음식점에서 보내준 중형 밴을 타고가서 산성이 내다보이는 명당 터의 안방에 자리를 잡았다.식당과 노래방과 마침내 잠까지 잘 수 있는 전천후 객주가 거기 있었다.장소 마련은 "중부 응급 센터"라는 그만그만한 보험사 전용 병원의 사무장으로 있는 B가 책임을 맡았는데 우리 "동동"들에게는 참으로 의미 심장한 장소를 물색해 놓은 셈이었고 일반적인 놀이라는 측면으로도과연 B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었다."야, 전천후네?" 누가 탄성을 발했다."주로 중부 고속을 달리는 운송회사의 사고 처리 상무들 데리고 고스톱 치는 곳이야.우연의 일치지만 우리가 찾던 장소하고도 맞물리잖아."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울더니대학에서 사학과 다닐 때는 같은 과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여배우 손숙을 따라다니던 녀석이었다,풍문여고 때부터 "벽을 향한 나의 자세"같은 단편으로 대학 문예 콘테스트를 휩쓸던 손숙은 대학을 졸업도 못하고 선배 연극인에게 스카웃되어 시집을 가버렸다. 우리 이야기를 쓰려다가 잠시 남 이야기가 끼어들었다"이게 닭 백숙 아닌가?!"누가 탄성을 지르자 B가 볼멘 소리를 했다."닭이 아니고 오골계로 특별 주문한거야.""오골계 뿐이야?"LA에서 온 L이 눈치없이 채근하였다."내가 미치네. 고향찾은 녀석 멱살잡이도 못하겠고---.염소 중탕에 돼지 목살, 갈메기 살, 쇠고기 치맛살,하여간 지지고 복고 구울건 다 나온다.""술은 예정대로 충분히 준비되었을 것이고?"주량이 말술인 회장이 확인투로 물었다.그는 의사이면서도 시조 시인으로 한국 펜 클럽 이사로도 활동인지 활약인지를 하고있다."민속주, 맥주, 와인이 부지기수이고 L군이 LA에서 들어 올 때 갖고 온 꼬냑이 또 두병."준비위원장 B의 노래 투 답변이었다."그리고 럼주가 또 한병, 이런 노래가 나오던 스티븐슨의 보물섬인가하는 해적 이야기가 생각나네."치과 의사하는 또 다른 B가 말했다.제3악장 Allegro giocoso-Poco meno presto Tempo-1

"난 이제 술 끊었다---."음악 대학의 교수 K가 입 맛을 다시며 말했다.최근의 종합 건강 진단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다.무리들은 그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하였다."화투 드릴까요, 카드 드릴까요?"주인 아주머니가 슬쩍 끼어들었다.화장끼가 뽀시시한 야시꾸리 중년이었다."이 분들은 사고 담당 상무들이 아니셔. 고도리는 치우고 음식 준비 되는대로 빨리 들여오고 맡겨논 복분자 술부터 먼저 갖고 와요."B가 아주머니의 젖무덤 쪽을 덤덤히 더듬으며 소리질렀다."자아, 이제 몇 대가리나 왔나? 나중에 두 대가리가 좀 늦게오기로 했지?"내과 의사하는 금년도 회장이 좌중을 둘러 보았다.별하나 달고 예편한 장군과 강원도로 수금하러간 C,둘을 제외하고 아홉명이 모두 모였다."열 한명이 모이기도 참 힘드네---."회장이 술잔을 높이들며 조금 탄식하였다."미안 미안,"이러면서 예비역 장군이 그 순간에 들어왔다. "내 욕 많이 했지?""그래. 침이 튀었다."이제 수금하러 동해안 쪽으로 갔다는 보험사의 점장, C만 들어오지 않았다.우리는 장군의 선창으로 육사식 건배를 힘차게 외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육사식이란 "건배, 건배, 건배" 이렇게 세번 외치는 것이었다.다만 소리는 컸으나 평소와 달리 말들은 별로 없었다."열한명이 다 모이면 큰 건배 제의를 할려고 했는데 C가 오질않네. 오늘이 빼빼로 날이라고 하더군. 11월 11일이란 말이지. 그리고 우리 비밀결사, 동동의 인원도 11명이잖아."회장이 개식사 비슷한 말을 한참만에야 좌중에 흘렸다."열하나가 아니지. 사실은 열두명이잖아."은행원하다가 명퇴하고 나온 T가 깐깐한 소리를 냈다."그래 자살한 O를 넣어서 원래는 열둘이었지. 다들 말하기 싫어하지만 말은 바른 말이지 우린 열둘이었어. 화가 지망의 O를 빼면 안되지."경영학과를 나와서 IT관련 회사에 재무 담당으로 다니다가 전자 대리점을 하나 따내서 퇴직한 내가 마침내 할 말은 다하자는 투로 톤을 좀 높였다.그러자 LA에서 온 L도 계속 소리 높여 외쳤다."맞다, 맞어. 사실 오늘은 O가 자살한지 30년이 되는 날이잖아. 그래서 그의 기일에 우리가 함께 모이자는 뜻에서 내가 가을 모임을 주장했던거야. 내가 나성에서 사니까 제일 먼데 살잖아. 그러니까 특별 모임을 보채기도 제일 맘 편하고해서---.""제기랄!, O가 자살한건 너 때문이었잖아. 그래서 네가 오늘 모임을 서둔걸로 나는 이해하는데!"은행원이 또 깐깐한 소리를 냈다."뭐야? 이 자식!"LA가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맞잖아, 윤자를 네가 꼬셨으니 O가 약 먹었지!"두사람이 멱살 잡이를 할 판이었다."아니야, 아니야, 내 탓이었을거야. 우리가 그때 종로 3가의 갈보집엘 다녔는데 O와 내가 시필리스,그러니까 매독에 걸렸던 것 같애. 나는 인턴하는 선배한테서 약과 주사를 맞고 나았는데 O에게는 제대로 약과 주사를 주지 못했거든. 약속을 해놓고도---. 모르긴해도 병이 심했을거야. 다 내 탓이야."회장인 내과의사가 탄식처럼 말을 했고 싸움 직전의 분위기는 중재자의 충격적인 말 때문에 갑자기 아연해졌다."아니야, 내 탓이야." 예비역 장군이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고생스런 육사의 영내 생활을 하다가 외출을 나와서 보니까 이 녀석은 세수도 안하고 무질서하게 화실에서 딩굴며 멋대로 붓을 놀리더라고.내가 화가 나서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네가 무슨 반 고호냐. 이 쓰레기같은 그림을 갖고서---, 하긴 고호도 겨우 동생 태오가 동정 삼아 그림을 몰래 사주었다던가---. 내가 하도 매몰차게 몰아세우니까 맘 약한 그 녀석이 깡 소주를 들이키고는 울었어. 지금까지 비밀이었다만---."장군이 다른 술은 재치고 소주를 큰 컵으로 자작하여 마셨다."아니야, 내 영향이 컸어. 내가 재수를 하여 공대 전자과를 들어갔잖아.재수 시절에는 그 녀석의 화실에 자주 드나들며 술도 마시고 했는데 운이 좋아서 공대 전체 수석을 해서 장학금도 받고, 신문에도 났지.O는 그 전 해에 미대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서 사실 이류인 후기 대학의 응용 미술과를 들어가고나자 자조가 심했어. 그림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 규모의 학도 예술제를 휩쓸며 벌써 천재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잖아. 내가 한해 늦게 들어간 주제에 톱을 했다고 우쭐하여 만날 때마다 이 바보야 하고 아픈데를 찔렀지. 잘 참고 웃더군. 그런 식이 두어해를 넘기니까 참기 힘들어했어. 그러고보니 내가 서서히 죽인 것 같애."평소의 자칭 "공돌이"가 말을 마치고나서 꼬냑을 대접에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모르는 소리 말어. 내 죄야. 내가 치대 선배들에게서 수면제를 얻어다가 여자애들을 꼬셔서 O의 화실로 데려갔지.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수면제로 한두번 재미를 봤는데, 기집애 하나가 문제를 삼고나서 그 화실로 경찰이 들락거렸지.O가 내 죄를 감싸고 혼자서 책임을 지느라고 한동안 머리를 싸맸어. 자기가 음료수에 수면제를 탔다는 거야.고생도 많았고 나중에 O가 다른 목적으로 수면제를 약방에서 구하여 모으기 시작한 것도 나한테서 동기 유발이 된 것 같아. 이제까지는 아무에게도 말 못했지. 우리끼리도---."치과 의사가 맥주를 "노털카"로 마시면서 "흑!"하는 소리를 냈으나 흐느낌인지 술마시는 소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O가 약을 구하러 다닐 때에 나도 약간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그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거나 주위에 알리거나했어야 되었는데, 방관한 죄책감이 내게 있어. 좀 큰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조금만 준 것도 내내 맘에 걸려. 주지말았거나 많이 주거나 했어야 되었는데 싶어서---."대기업에서 숫자 놀음을 하면서도 소설쟁이가 되고자 분투 노력하다가 이제는 돌아와 국화 앞에 선게 아니라부끄럽게도 전자 대리점의 "최고 경영자"로 제기랄스런 인생을 낙착한 나도 그간에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응어리를 내뱉었다."아니야, 내 죄가 더 커."출판사에 지금도 근무하는 M이 말했다."그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해병대 입대를 했잖아.고달픈 훈련생활의 하루가 끝나면 플래쉬를 몰래 켜고 침상에서 내 비관적 명상록을 그에게 써 보냈거든. 마치 또스또에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프리드리히 니체와 실존주의 비관론자들의 이야기들이 내 주된 메뉴였지. 갈겨 쓴 그 우수와 오뇌의 글에 그는 박수치며 거의 매일 답장을 보냈어. 내가 그의 자살 주위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들 생각하고 심지어는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가 그런 극단의 일을 결행치는 않았으리라고들 하지만 사실 나는 바로 그의 옆에 그런식으로 붙어 있었던거야."M도 말을 마치고 양주를 단숨에 털어넣었다. 제4악장 Allegro energico e passionnato-Piu Allegro

"그 친구를 죽인건 여기 첼리스트인 바로 나요, 나!"음대 교수였다."내가 맨 날 여고생들 꽁무니만 따라 다니다가 고3이 되어서야 돈많은 아버지 덕에 그때는 우리 사회에 생소한 첼로를 시작해서 서울대에 거뜬히 들어갔잖아. 1차에 떨어진 O가 특히 나를 찾아와서 엉엉 울더라고.저기 앉아있는 공돌이는 이미 재수한다며 낄낄대고 당구장엘 다녔는데 말이야.""임마, O의 여동생 애먹인 이야기는 왜 빼먹나?"회장이 윽박질렀다."글쎄, O의 여동생 정순이하고의 이야기에는 오해가 좀 있어. 그리고 나와 일을 벌렸을 때는 그 애도 대학 들어와서의 이야기니까 성인으로서 모두 자신의 책임 아래 일어난 상황이었고---."첼리스트가 좀 쩔쩔 매었다."임마, 너도 딸 키우면서 요즈음에는 생각이 좀 깊어진 줄알았는데---. 여동생에 대한 오빠 사랑을 네가, 아니 우리 모두가 어찌 그때 알았으랴---.""그래, 그래, 내가 버린 그 친구 여동생 때문이라면 모두가 내 탓이오. 메아 뀰빠, 내 큰 탓이로소이다." 밖이 왁자지껄 하더니 마침내 C가 곱게 나이가 든 어떤중년 부인과 함께 나타났다.O가 늦어서 미안하다는 소릴 질렀으나 우리의 시선은 모두 곱게 생긴 중년 부인에게로 향해 있었다. 얌전하던 C는 법대를 나와서 고시에 몇번 떨어지더니 보험 회사로 들어갔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하긴 엘리트의 탈을 벗고 인간이 되었다."내가 O를 죽였어. 그때 내가 고시는 자꾸 떨어지고해서자진 입대를 했는데 배속 받은 데가 1111 야전 공병단이었어.소위 닐리리 야공단이었지. 야공단 군기가 좀 쎄냐 말이야.O와 편지께나 교환했는데 이건 맨날 비관론자들의 유서같은 것이었지.그 때 O는 여기있는 윤자씨하고 청춘사업도 잘 진전되지않고해서 여러모로 마음 고생이 많았지.""내가 왜 그 양반의 자살에 책임이 있어요? 난 아무 책임없어요."고운 부인의 목소리가 좀 앙칼지게 들려서 어울리지 않았다."답답해서 못 살겠어요. 그 때도 모두들 내 책임이라고윽박질러서 정말 저도 죽고 싶었어요. 저기 저 양반이L씨 맞죠. 공연히 오해만 샀지요. 나와 저 양반이 따로 바람을 피웠다나---. 그 후에 저는 어쩌다 돈 많은 집의 재취댁으로 시집은 갔는데 멀쩡한 처녀가 왜 재취댁이냐 말이죠. 모두 소문 때문이었어요. 하긴 그 남편도 또 일찍 죽더라고요.""그래서 돈 많은 과수댁으로 평생 잘 지내고 있지않소.멋쟁이들의 몸 보시도 즐기고---.""이 양반이 낮 술은 했지만 말이 좀 과하시네. 내가 30년만에 그 책임론 한번 이야기 하자고 오긴 했지만 이런 식이면 난 나갈래요."윤자라는 여인이 발딱 일어섰다. 요즘 유행하는 란제리 룩의고급 명품으로 몸을 감았는데 정말 말을 좀 과하게 하자면참 섹시했다. "아하. 이 귀부인이 낯이 익다 했더니 그 때 그 여대생이네.앉으세요. 제가 의학 박사니까 알아두면 노후에 나쁘진 않을겁니다. 건강 백세에 도움 드릴께요."역시 회장이었다.그가 윤자라는 여인을 은근한 말과 손길로 자리에 도루 앉혔다."오늘은 모두 O군이 이 남한 산성의 저 성곽 위에서 세코날 서른 네알을 털어넣고 저쪽 단애로 떨어져 죽은지 30년만에 모두 모여서 그의 죽음이 모두 자기 채금이라고 고백 성사를 보고 있는 셈인데 이제 유일하게 자기 채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외다.""제 채금이 절대로 아니에요."얼떨결에 윤자라는 여인도 채금이라는 표현을 따라해서 일순 방안에는 웃는 소리들이 신음처럼 나왔고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사실 저는 그림을 보는건 좋아했지만 어렵게스리 무슨질감이니 마찌에르니, 또 뭐더라 그래 후기 인상파니 기하학적 분해니 하는 소리는 골치만 아팠어요. 지금 이런 말을 쓰는 것도 나중에 할 일이 없어서 신문사 주부 교양 교실 같은데에 다니며 귀동냥한거라구요.하여간 그 때 나는 O씨의 접근과 집착을 너무나 부담스레느낄 뿐이었어요.""당신 같은 그래, 자칭 불학무식한 여자를 현학의 극치를달린 화가 지망생이 왜 좋아했을까---."혀가 벌써 좀 꼬부라진 C가 또 분위기를 위기로 몰고갈태세였다."이 양반이 또---.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 청년이 날 좋아한건 내 몸매가 좋았기 때문이었을거요. 오해하지들 말아요. 나를 모델로서 좋아했다는 말이예요. 내 손목 한번 만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화실 속에 함께 오래 있었지만--.그리고 모두 들어두세요. C점장 이 양반은 정말 나빠요. 아무리 내가 돈이 많고 그래서 보험 설계의 표적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옛날에 좋아했던 여자를 꼬셔서 관계를 맺어요? 내가 나중에 알고 돈을 몽땅 다 빼버렸더니 몸보시 어쩌구 하면서 망신을 주는겁니다."윤자는 꼬냑을 한잔 마시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죄책감들 갖지 마세요. 그 양반이 자살한건오로지 거 뭣이냐, 그래 갈렴상의 문제였어요."갈렴이라니?오라, 관념상의 문제였다는 것이구만.역시 지혜로운 미인이구나.많이 안다는게 뭐 말라빠진 지식 작태인가.저 직관!"그 분이 돌아가신 건 철학적인 죽음이란 말입니다. 듣자하니 모두들 가해자인걸로 자책하시지만따지고 보면 피해자도 된다는 말입니다.또한 그래야 그 분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지요.제 말이 말이 됩니까?오랜만에 뵈니 얼굴 기억은 삼삼하지만 참 좋네요."타고난 관능미의 여인은 옛 사람들에게 말의 끝 부분으로 가며 보기에 따라서는 교태를 약간 부렸고 남한 산성의 밤은 깊어갔다.아무래도 "빼빼로 날"에 시작된 이 고백성사의 시간은 새벽으로 이어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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