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찌라와 곡사이 호소데스(여기는 국제 방송입니다)."--"VOA, 여기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보내드리는 미국의 소리 방송입니다."사춘기 때에 단파 방송이 나오는 라디오가 집에 있어서 자정이 다 될 무렵이면 공부를 하다말고 어른들 몰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주파수를 맞추고 가슴 졸이며 들은 기억이 난다.때로 북한에서 나오는 난수표 방송도 어떤 음역대에서는불쑥 나타나곤했다.우리나라의 방해 전파가 얼른 이 난수표 숫자의 나열을 차단할 때도 있었으나 재빠른 차단과는 거리가 먼적도 많았다.소년에게는 전혀 의미없는 이 숫자의 나열은 곧 지루함을 가져왔지만 다만 가슴 조리며 듣고 있을 간첩의 얼굴을 상상배보면,아마도 조국 해방의 열정 보다는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사실이야 어찌되었건 그 때는 일방적 의사 전달의 모양이숨막히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시절에 읽은 학생 잡지가 "학원"과 "학생계"였는데 그 어느쪽엔가 한반도에서 핵 전쟁이 일어나 마침내 지구 전체가 초토화 되는 스토리가 있었다.주인공은 원자력 관련의 엔지니어로서 포항 인근의 "삼포진"이라는 곳에 설치된 비밀 연구소에서 핵무기 연구를 하고 있었다.그런 어느날 갑자기 하늘은 버섯 구름으로 덮어 씌어지고 포항과 그 인근 지역은 순식간에 폐허가 된다.핵무기 연구소가 선제 공격을 당한 것으로 주인공은 짐작한다.하지만 공격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느 범위까지 이런 참변이 확대되었는지 지하 벙커에 상주하던 그와 소수의 과학자들은 전혀 알길이 없다. 적어도 포항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최초의 핵폭발단계에서 절멸되었고 얼마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낙진으로 죽어가기 시작한다.주인공은 전 세계를 향햐여 도움을 달라고 통신을 보내지만 핵 폭발에 따른 전자 교란 현상 때문인지,아니면 온 세상이 모두 절멸 되었기 때문인지 아무런 답신도받을 수가 없다.최후의 며칠간 그가 외부 세계로 보낼수 있는 신호는 오로지 "삼포진에서 발신중" 이라는 절망과 고독의 말 뿐이었다.답은 물론 없었다.내가 "손전망(孫展望)" 여사를 안 것은 "국립도서관"의 "역삼동 분원"에서 시사 관련 영문을 해석, 요약하는 방법론과 나아가서는 국제 정세에 대한 시사평론으로 끝을 맺는어떤 독서 지도 연구소의 강의를 시작한지 두어달쯤 지나서였다.처음 이곳 도서관 분원의 공간을 이용하던 이 연구소는 그 후 돈을 벌어서 독자적인 빌딩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돌이켜보면 내 청춘시절은 출발부터 빛나는 기록이었다.약시(弱視) 때문에 군 복무가 면제되고,이른바 언론고시라고 하는 100대 1의 관문을 뚫고 내가 4대 일간지 중의 하나에 들어가 보니 최연소 기자가 되어 있었다."수습"의 딱지를 떼자 알량한 영어 실력으로 외신부를 맡게되면서, 해외의 민주화 운동 소식을 적당히 포장하여 국내의 군부독재를 비아냥거렸으나 이게 정의와 진실의 게임이었는지지적 마스타베이션에 다름아니었는지는 지금도 자신이 없다.어쨌거나 이런 나의 행적은 집권세력과 언론계와 여야 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주요 메뉴가 다른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에 신상에 위해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언론 장학 재단"이 기자들 중에서 매년 해외로 유학생을 보내주는 시험에 합격한 것은 꼭 행운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니, 행운도 가미되었다고 해야겠다.영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한 내 실력의 결과를 행운이라는 용어로 바꾸기에는 좀 저항이 오지만, 그해에는 특히 내가 자신있는 영작문에 대한 출제가 많았고 해석문제도 거의 외신에서 다룬 내용들이었다.마지막으로 내 평소의 눈에 가시같았던 논조도 행운 리스트에 들어가 내가 밖으로 나가는 데에 일조는 했을 것이다.마침내 내가 보스톤의 하바드 대학 내에 있는 케네디 스쿨을 지원하여 공부를 한 이야기는 이번의 주제가 아니어서 뒤로 미루고, 하여튼 나는 보통 2년이 걸리는 이 국제행정 대학원을 1년반 만에 마치고나서 내가 있던 신문사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았다.워싱턴 특파원 10년 사이에 나는 H-1 비자로 시작하여 결국은 미국의 영주권까지 아내는 물론, 두 아들과 함께 얻었고,이런 신분을 확보하면서 군부 정권에 대한 나의 비판적 논조는 점점 하늘을 찌를듯하였다."은인자중"하던 군부 정권에서는 나를 핍박하는 대신 신문사의 경영자들을 압박하여 나를 면직케 하였고, 졸지에 나는 퇴직금을 아내에게 넘기고 혼자 귀국하였다.아내는 워싱턴 DC의 옆에 있는 버지니아나 메릴랜드에서 세탁소나 열어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살자고 하였으나 나는 꽤 비장한 각오로 귀국 비행기를 탔었다.하지만 정치적 바탕이 없는 우국지사를 국내에서 받아줄 수 있는 곳은 여야 모두 자신이 없는 지역구 출마이거나사설 학원 수준의 사회교육 기관들 뿐이었다. 대학은 이미 박사학위를 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집권 세력의 보이지 않는 방해도 심했다.다만 사설 학원은 한 때 최고의 엘리트가 그의 만년을 서서히 탕진, 소멸하기에 가장 좋은 가묘(假墓) 같은 곳으로 그들에게는 비쳐졌는지 모른다. 밥은 먹여야 하는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이 이리떼인지, 엘리뜨인지 하는 작자가 죽음을 각오할는지도 모르니까---.학원가에서 나는 서서히 명성을 얻으며 내 지식을 내다 팔았다.마침 대학에서 논술고사가 시작되면서 나는 빛나는 필력을 휘둘렀던 실력과 명성으로 그 방면의 일인자가 되었고 덧붙여서 영어 해석, 작문, 요약 등을 메가톤급 무기로 하여서유학원계에서도 최고 강사로 뛰어올랐다.이제 지식 시장에 발을 들여놓아 자칭 성공을 거두고나자꺼져가던 허명과 매명, 그러니까 이름 팔기 욕심이 또 생겼다.논술고사와 관련하여 젊은 어머니들의 독서 열기가 높아졌고 급기야 이런 시대조류와 함께 "독서 지도 연구소"라는 성격이 좀 애매한 조직이 여기저기 생겨났다.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관이 "온누리 독서 연구소"라는 사단법인으로 강남의 지적인 부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나중에는 부천과 인천 등지에도 지부가 설치될 정도였다.시사와 문화 부분이 내가 맡은 특강의 영역이었고 역사, 문학, 예술 부분에도 기라성 같은 명사가 초빙되어서 나와 반열을 함께 하였다.어느날 강의가 끝나고 "역삼 분원"을 걸어 나오는데 대형 외제 승용차가 내 앞에서 멈추었다.검은 색조의 옷을 주로 입고서 눈에 열정을 매달고 강의를 듣던 인상 깊은 중년의 여인이 핸들을 잡고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