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연구년을 내가 있는 기관으로부터 연구비와 함께
받아서 미국 동부의 어느 대학으로 가려고 수속을 하는 도중에,
내 연구주제가 거창하게스리 “해외 교포 문학 리서치”라는 것을
아는 어떤 동료가 중국의 동북 지방, 과거 "만주 지방"이라고
했던 “연변 자치주”도 이 기회에 포함해서 한번 가보라고
꼬드겼다.
뉴욕이나 LA 교포만 해외 동포이고 미주에 가 있는 분들의
문학적 모색과 그 형상화 만이 리서치의 대상이란 말인가---.
그 동료는 좀 흥분해 있었다.
어쩌다 그런 이야기를 인사동 전통밥집 골목에서 나누게 된
탓인지 어떤
역사적 비감함 같은 것도 대화에 문득 비빔밥처럼
섞이고 하여,
나는 만시지탄의 대오각성을 하면서 내 일정의 약 40%인
5개월 반을 떼어내어 1차 방문지를 "연변"으로 작정하였다.
“연변”과 그 인근에는 몇 개의 대학이 있지만 마침 “연변 과학
기술
대학”과 내가 있는 기관은 얼마 전부터 자매관계 협정을
맺고 있어서,
조금 촉박하게 서둔 나의 연구 계획과 체류
신청이었지만
큰 무리없이 추진 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부분까지의 과정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숙식과 연구실 제공
문제도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나는 이제
조용히 그 곳 도서관의 자료를 이용하면서 부분적으로는
현지여행 등을 통하여 필드
워크를 하는 정도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리라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또한 다행히도 지난 학기 나의 대학원
세미나에는 중국
한족(漢族)으로 "연변 과기대"를 나온 학생이 수강을 하고
있어서 연변 생활 전반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은 이미
그 유학생으로부터 꽤 많이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수속이 끝나는 시점에서 새롭게 국내외로부터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 되면서 나의 “연변 계획”은
지극히 정적인 수준으로 부터 몹시 동적인 양태로 변모
되었다.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 나의 연변 체재 계획이 완성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주위로부터 이 대학의
여러
관계자들과 특히 한국 담당 L부총장을 소개 받고 만나게
되었다.
건설업과 조경 사업을 크게 하는 이 분은 나의
중등학교
후배로서 원래는 연변에 사업차 갔다가 그 곳 연변대학의
거의 전설적인 인물인 K총장으로부터 깊은 권면을 받고
감화, 감동하여 연변 과기대의 이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해 동안 이 후배는 돈벌이 보다 학교 발전을 위하여
크게 봉사를 하다가 마침내 지난해 부터는 현재의 부총장
직분을 받고 더욱 신실한 봉사자가 되었다.
이 분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제는 "연변 과기대"가
상당한
정도 궤도에 오르자 같은 맥락으로 “평양 과학 기술
대학”을 건립하는 사업의 추진 단장을 이 후배는 맡고
있었다.
아울러 “연우 포럼(www.younwooforum.com)”이라는
모임의 회장직도 이 분이 맡고 있는데,
그 동안의 기고문을 묶어서 발간한 저서 “윈-윈 패러다임”은
두꺼운 분량임에도
예지와 재미와 설득력을 함께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최근 수년간 이 나라 정치판에서 전개되는 서툰
개혁의
바람소리와 낡은 앙샹레짐의 지친 노래가락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망과 좌절감을 이 나라에
만연
시켰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군상들도 위기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
창출하기는 커녕 탄식이나 백일몽의 자폐적 스토리만
자아낼 따름이었다.
너나 없이---.
이 우울한 나날들 속에서 나는 갑자기 한 덩어리의 예지와
행동의지에
가득한 선지적인 인물들을 순식간에 대면하게
되었고,
새롭고도 밝은 지평을 내다 볼 기회를 오랜만에 찾게 되었다.
"연변 과기대"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에 국내 기독교계의
여러
교단들이 힘을 합쳐서 종교심을 근간으로 삼지만
표내지 않고 중국의 낙후된 변방이자 어려운 우리 동포들의
처지를 과학 기술력으로
일으켜 세운다는 목표 아래
힘든 설립 과정을 거친 다음 개교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래로 이 대학에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봉사를 자청한
수준 높은
스칼라들이 모여들어 놀라운 교육과 연구업적이
축적되고 있으며,
드러내지 않는 전교 활동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금년에도 12명의 교수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조리영양사
등이 여러
나라에서 자원하여 파송 되는데 그 파송 예배가
지난주 강남의 요지에 있는 S교회에서 있다고 하여서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 예배에
참석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은지도 십년이 넘은
세월이었다.
한편 내가 관심을 갖는 “연변 문학계”의 활동상과 현황은
한마디로
매우 왕성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 수 있었다.
연변 자치주에 사는 문단의 동포들은 "연변 문학"이라는
이름의 원간 잡지를 내고
있었고,
많은 문학 서클들이 연변 뿐 아니라 하얼빈 등 인근에서도
왕성한 동우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저작 활동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 곳의 문단자료는 태산같이 축적되어 있고
문학 활동도 질풍노도와 같다는 소식을
확인했으니
나의 계획도 크게 수정되어 소극적 문헌 연구 수준에서
적극적인 취재활동이 겸비 되어져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기다리던 수요일 저녁, 파송예배 시간이 왔다.
한 세대 이상
서울생활을 했어도 강남역 그 번화가에 그렇게
큰 교회가 있는 줄을 나는 몰랐다.
또한 지표 아래로 깊이 파 내려가서 거대한 지하
공간의
교회를 지은 그 담대한 역사에는 말 할 수 없이 놀랐고
유명한 목사님들이 이 날 합동으로 파송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도 경이, 경외 그 자체였다.
또한 평일의 저녁, 바로 인근에서는 먹고 마시느라 난리가 난
마당에
이렇게 수백, 수천의 경건한 예배자들이 모여든다는
사실도 대단한 충격이었다.
예배의 과정을 여기에서 더 이상 이야기하면 또 다른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고 그런 부분에서는 내가 감당할 범주를 넘어
서기에 나의 개인적 감동, 감화만 전하면서 이 닐 밤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줄이고자
한다.
수요 저녁이 지난 그 다음날에는 S대학에서 “평양 과학 기술
대학” 추진 위원회가 열리고 나도 초청을
받았으나
오래전에 어떤 포럼의 지명 토론자로 선정이 되어서 일단은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북핵 문제로 정말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슴이 답답한 시점에서 이 분들은 그들을 위하여 이렇게
아낌없이 나눔과 배품을
한다는 사실에,
무언가 해답 없던 답답함이 조금씩 풀리고 어떤 새로운 한줄기
구원의 섬광을 보는 듯도 하였다.
(과연,
어제부터이던가 북측의 자세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어오고 있다---).
어쨌든 목요일 저녁이 왔다.
포럼이 열린 곳은 “정신문화 연구원”,
지금은 “한국학 중앙 연구원”으로 개칭이 된 곳이었다.
아직 현판은 갈아달지 못한 상태였다.
발제를 맡은 분은 대표 직함으로 “경실련 중앙 의장”과
“조선족
교회”를 이끌고 있는 S 목사님이었다.
종교적인 행사는 물론 아니었고 이 시대를 진단하고
걱정하는 한 마당, 포럼이었다.
‘뉴 라이트‘의 핵심이라고 최근에 언론에서 떠들어서
평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중도적 설득력을 기본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서는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그 분은
일단 탄식으로 발제의 말문을 열었다.
특히 최근에 벌어진
시민 환경 운동가들의 독선적인
몇 가지 사태와 그 추이를 보면,
이제 이 시대 이 나라를 풍비하였던 시민 운동도 쇠퇴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는가, 이 분은 개탄하였다.
시민 운동은 시민의 지지가 기본인데 이제 이 운동가들의
극히 일부가
특권의식을 구축함과 아울러 준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자가당착에 이르르는 지경이 된다면
마침내 다른 대부분의 시민운동도 억울하게
내리막길을
걸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통찰력에 가득한 걱정과
염려였다.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지명
토론자와 플로어에 있는 구성원들은
다양한 질의와 응답을 교환하였는데,
다른 어떤 부분 보다 한 나라와 한 민족이 이 지구촌
시대에서
다른 나라, 특히 강대국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살려면 무언가
국가적으로 존경 받는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것은 돈이 좀 들고 경제 발전의 지수가 좀 떨어지더라도
반드시
추구해야할 절대적 가치, 절대선 같은 것이라고 S목사는
강조하였다.
그렇지 않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수출 좀 해서 갑자기 번 돈으로
졸부들의 돈 자랑 행태 같은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 이 나라의
행태로는 초 강대국 미국과 곧장 우리를 추월할 인접국
중국으로부터 무슨 대접을 받겠느냐는 우려가 이날
아젠다의 결론 같은 것이었다.
구체적인 여러 실증적
토론과 변증법적 진행 과정은
장황스럽기에 여기에서는 줄이고 싶다.
이 우울한 시대에 그래도 이 나라의 시민운동을
초창기에
조직하고 주도했던 이 성직자의 시대를 읽는 평형감각이
참으로 미덥고 든든하게 와 닿아서 잠시나마 조국을 외면
했던
내 심사에 자괴감을 불어넣었고 마침내 이 나라에
대한 숙명적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여 주었다.
빛
보다는 어둠에 더 친숙하였던 이 몇 년의
시대 정신에 새로운 광망은 진정 닥아 오는가 ---.
나에게는 각성과 함께
기대를 부풀게한 이틀 저녁이었다.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늦은 보고기 (0) | 2006.06.12 |
---|---|
리더스 클럽 정기 총회 개최 (0) | 2006.05.11 |
[스크랩] [스크랩] 매스미디어를 인터넷으로 (0) | 2005.02.08 |
결혼식장에서 들은 이야기들--- (0) | 2005.01.22 |
신정 연휴와 시무식 일지 (0) | 2005.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