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폐궁에서 찾은 DNA

원평재 2009. 2. 24. 08:18

 

지방 국립대학에서 민속학 교수로 있는 내가 인도 여행을 처음 한다는 것은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만 나의 주 전공은 아메리칸 인디언과 고대 동아시아 선주민들간의 민속적 관계를 따지는 일에

집중되다보니 이런 편향이 생긴 것 같다는 변명은 가능하다.

반대로 내가 깍듯이 모시는, 같은 과의 원로이고 이제는 명예교수로 은퇴한 박문식 선생님은 나의 이런

자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중국과 일본의 고미술이 전공이던 이 분은 두 나라는 물론이고 남들이 생각지도 않던 시절부터 인도

문화와 민속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거의 독학으로 진행하여서 적어도 국내에서는 독보적 위치를 선점한

분이기도 하다.

그는 인도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고 한두 해 정도는 ‘연구 년’으로 아예 그곳에서 생활도 하고 배낭여행으로

인도 전체를 돌고 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인과 함께 갔으나 몇 달 만에 부인이 풍토병을 앓는 바람에 혼자서 두해를 보내고 온 관록이

학계에서는 아직도 회자되곤 한다.

청년 시절부터 원래 머리칼이 하얘서 인도에서 이발이나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인도 전통 옷을 휘감고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며 우리는 성자가 따로 없다고 놀란 적도 있었다.

 

 

"어떻게 혼자 지내셨어요?"

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여기 우리나라에서도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을 내가 많이 해요. 집 사람이 몸이 약하잖아---."

"에이, 그게 아니라 어떻게 그 곳에서 독신으로 지내셨어요?"

"아, 인도 여자하고 연애했지. 하하하."

그렇게 유머가 있고 호방한 성격인데 사실은 인품이 고결하였다. 그렇게 역동적이던 그분도 나이가 들면서

언제부터이던가 인도 이야기를 삼갔다. 심지어 학문적 차원으로 인도 쪽에 관하여 물어 보아도 그는 별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이러저런 대중잡지 같은 데에도 가리지 않고 핑크 빛이 도는 내용으로 인도 이야기를 많이 써내던

분이었다.

 

"학문하는 분이 좀 주책스럽지 않은가---."

그런 말도 돌았지만 민속학이라는 것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잡학 대접을 받고 무시되는 세태에

누군가라도 자꾸 그 방면에 대하여 선전 문구를 돌려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박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런 잡문을 원로께서 자꾸 쓰시니까 잡학 대접 받지요---."

팔팔한 젊은 학자들이 반발도 하곤 했으나 그분의 지론을 꺾지 못하였는데 어느 때부터이던가 그는

말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저 이번에 인도 갑니다. 선생님."

마침 그분이 명예 교수로 강의를 나오던 날에 만날 기회가 있어서 내가 말했다.

"어? 학회 일로?"

그분이 예의 그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그냥 관광 여행입니다."

 

사실은 내 친구 하나가 크게 사업을 하는데 내 이름을 그 회사의 사외 이사로 올려놓고 있었다.

물정에 어두운 백면서생(白面書生)을 편리한대로 써먹는구나 싶으면서도 사실은 고마울 때가

많았다.

서울 본사에서 분기별 정기 이사회와 때로 임시 이사회를 할 때면 왕복 여비와 출장비를 내가 있는

지방으로 두둑하게 보내주었고,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던 나 같은 사람에게

새로운 지평으로 눈을 뜨게 하여주었다.

이번에도 그 회사에서는 인도에 투자 계획이 있어서 회장과 참모들이 현장 확인을 나가는데, 나를 그

일행에 넣어준 것이었다.

델리에서 가까운 구자라뜨 지역이 투자 대상 지역이었고 현장 답사가 끝나면 짧은 여행 계획도

들어있었다.

타지마할, 카마수트라, 바라나시, 그런 이름들이 두서없이 비서실로 부터 내게 전달이 되었다.

 

 

"학기 중에 관광 여행이라---, 팔자 좋군."

박 교수가 조금 힐난하는 기색으로 내 말을 받았다.

"추석 연휴가 금년에는 공교롭게도 조금 긴 여가를 허락하네요, 선생님---."

나는 사외 이사로 있게 된 경위와 여행의 관계를 대충 설명해 드렸다.

"아이구, 그렇다면 축복이오. 그런데 인도가 처음이라고---? 그럼 누가 여행안내를 하누?"

"그건 제 친구 회사에서 알아서 다 준비를 한답니다. 한국 담당으로 있는 인도 최고 가이드를 섭외해

두었다는군요. 한국말을 아주 잘하고, 한국에도 왔다갔고, 앞으로 제 친구 회사에서 일을 할지도

모른답니다."

"건방진 젊은 녀석들이 그곳에 좀 있지---."

그가 좀 의외성 발언을 하며 내 시선을 비꼈다.

"아는 사람이 있으신지요?"

"아, 아닐세. 잘 다녀오시게."

 

 

내 인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재미있게 진행이 되었다.

사업상의 문제는 내가 관여할 바가 못 되었는데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아무래도 인도 사람들의

전반적인 구매력이 확보될 때 까지는 좀 기다려야하겠다는 쪽으로 투자 계획의 가닥이 잡혔나갔고

그건 어쨌든 여행길은 애초의 계획대로 부담 없이 실천되었다.

큰 회사의 회장실이 움직이는 카라반 여행과 같아서 기획은 철저했고 따라서 안내를 맡은 인도

청년도 예고된 데로 최고 수준 같았다.

자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나라가 그나마 이 정도로 먹고 살게 된 데에는 이런 기업의 조직들이

바탕이 되어서 가능하구나, 하는 감탄사도 저절로 나왔다.

안내를 맡은 인도 청년도 한국의 그런 강점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동감을 표하였다.

 

 

"원자폭탄을 인도가 만들면 무얼 합니까. 원자력 발전소도 없어서 맨 날 전기가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런 정도는 약과였다.

"한국 고속도로 타보고 부러워서 미치겠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달리는 이 도로도 공식 서류상으로는

4차선 포장도로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2차선도 포장이 제대로 안되었잖아요. 공무원들이 물자를 다 팔아먹은

결과입니다.

정치인들도 다 썩었어요. 한국이 부러워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었다.

 

델리 근방에서는 인도가 갖고 있는 외형적, 공식적인 부분에 대한 불만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더니

우리가 바라나시라던가, 타지마할과 같은 문화와 예술, 혹은 종교와 감성적 부분을 접하기 시작하자

그의 감정토로도 내면적인 부분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인도에 카스트 제도가 있는 줄은 다 아시지요?"

그가 바라나시를 떠나면서 화두를 던졌다.

"그거 지난 세기의 유물이고 이제 점점 사라지는 거 아닌가?"

회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반응을 보였다.

기업가의 투자 마인드는 현재 상황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 미래 가치에 더 큰 관심을

갖기 때문이리라.

"회장님, 죄송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에서 카스트가 사라지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원래 최하층

수트라 계급, 그러니까 언터처블은 15퍼센트 정도였는데 최근 인도 중부에서는 정책의 잘못으로 그

숫자가 60퍼센트 정도로 늘어나고 있거든요.

정부에서 무관심하다보니 먹고 사는 정도의 보조금만 받는 하층민들끼리 모여서 마구 인구 생산을

해대는 바람에 인구 폭발이 되고 있지요. 결국 교육 받을 기회를 죽어도 얻지 못하는 절대 빈곤층만

양산되고 이들은 지금 이 현세에서는 희망이나 기대도 갖지 않지요.

그냥 굶어죽지 않고 연명하면서 막연하게 내세의 복락만을 꿈꾼답니다.

어제 보신 갠지스 강변의 그 바라나시의 풍경이 대표적이지요.

사실은 갠지스 강변이라면 한국의 역 전 앞과 같습니다. 갠지스가 이미 강변이라는 뜻이거든요---. "

 

 

"야아, 이 친구. 우리말이 가히 완벽하네."

회장이 감탄하였다.

"힌두 어는 제 모국어이고 영어도 자신 있습니다"

이 친구가 회장 앞에서 자기 피 알을 작심한 듯하였는데, 인도에 대한 자가비판은 조금 도가 지나친

듯도 하였다.

"아, 미안하지만 영어 잘하는 거야 특별한 게 아니지. 이곳에서는 영어가 모국어 같은 것이잖아---."

회장이 조금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닙니다. 수트라들은 영어를 전혀 못합니다. 그런데 그 계층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인도에서 영어

못하는 사람 계속 늘어납니다."

그도 회장의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 사람아, 회장님께 너무 인도 욕을 하지 말어. 그럼 인도 투자가 한정 없이 늦어지고 자네 일자리도

날아갈 거야---."

투자를 추진했던 기획실 간부가 그에게 조용히 주의를 준적도 있었다.

 

"아닙니다. 투자를 하시려면 신중하게 하셔야죠. 회장님이 사정을 다 아셔야합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항변을 하여서 기획실 간부가 쩔쩔매게 만들었다.

이 친구가 인도보다 한국으로 나가서 정착하고 싶은 생각에 올 인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퍼뜩 떠올랐다.

 

"인도 여자들 예쁘고도 불쌍하지만 재미없어요."

밤 시간의 환락을 조금 주선하려는 기획실 사람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인도에 카즈라호의 카마수트라 사원이 있어서 오해가 많지만 인도는 매우 도덕적분위기가 사회에

꽉 찬 나라입니다. 강남의 룸살롱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하지요. 물론 부자들은 외국에 나가서 재미를

다보지만요---. 남녀 간의 데이트도 참 힘들어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놀아요.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무슬림들이 침략하면서 힌두

남자들이 여자들을 보호 하다 보니 그렇게 생활 전통이 되고 율법이 강화되었어요.

결혼도 반드시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지참금을 갖고 가지요. 그런데

학교 다니는 젊은 남녀가 밖에서 어찌 교제가 없겠어요. 사랑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해야 합니다. 아니면 가문에서 쫓겨납니다.

결국 인도 대학생들 모두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요---."

"씽, 당신도 그렇게 결혼했고 가슴에 상처가 있어요?"

누가 짓굿게 물었다.

우리 청년 가이드의 성은 씽 이라고 하였다.

카스트의 두 번째 계급, 무사 계급의 성이라고 그는 자랑스레 이야기 하였다.

 

"제 개인적 문제는 프라이버시니까 말씀 드릴 수 없고요. 하여간 인도 젊은이들 상처가 많아요."

그의 눈에 우수가 끼는듯하였다.

 

하지만 비서실 사람의 이야기는 달랐다.

"저 친구 성이 씽이 아니더라고요. 평민 계급 같은데 자가발전을 해서 풍선을 띄우는 거 같아요."

비서실 사람이 내게 낮게 말한 적이 있다.

"회장님이 저 녀석을 워낙 좋아하시니 잘못하면 음해한다 하실까봐 말씀도 못 드리겠고---.

교수님이 대신 좀 말씀해 주세요."

"나도 그런 점을 느껴요. 좀 자기 피 알이 세고 과장이 있지요---."

나도 동의했지만 회장의 앞이 되면 특별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높은 사람 앞이라서 그에 대하여 할 말을 다 못한다기보다도 그의 눈에 가끔씩 묻어나는

우수와 슬픔,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 감성에 나도 동정심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슴에 멍 든 인도 청년이 많다고 했을 때에---.

 

하지만 그를 의심하는 것이 근거 없는 발상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혐의점이 그의 말과 행동에 묻어

있었다.

카즈라호 에서였다.

그는 그 유명한 성애의 장면 설명을 결코 재미 위주로 과장하지 않았다.

그저 센세이셔널하면서 민망한 그 여러 장면에서 해석을 도덕적,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는 이성적

자세를 보였다.

예컨데 스와핑이나 쓰리섬, 포섬 등의 집단 성교 장면 같은 것은 사람이란 정염을 함께 발산해야

그로부터 해방 될 수 있다는 조각품 제작 당시의 깊은 철학과 명상의 결과이지 단순한 성애숭배

예술은 아니라는 설명이 그러하였다.

 

거기까지는 참으로 좋았다.

카마수트라의 경전 자체가 그런 식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런 윤리를 강조하며 진지한

목소리를 낼 때에는 모두가 감동을 하였다.

뉘라서 저 조각상에 나타난 질펀한 섹스의 장면에 관하여 그렇게 차분하고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가 있으랴.

흥분과 과장이 따르지 않는 정도라도 다행일텐데 그는 거기 더하여 그렇게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지성, 진정성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카마수트라 사원 앞에는 가짜 골동품에서

부터 기념품까지, 그리고 특히 수많은 성애 사진첩들이 팔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국 관광객들

에게 가장 잘 팔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소개한 책의 한국어 번역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책에는 물론 번역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책 표지에서 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표현이 전혀 통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결국 그가 진정 그 사진첩의 번역자라면 그의 한국어 실력 내지 전반적인 능력에 대하여 크나큰

실망과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말은 잘 하는 듯도 하지만 책을 번역한 내용을 볼때, 기초적인 상식이나 사고 자체가 매우 부족한 듯

보였다.

 

성애의 장면을 모두 수록한 화집의 제목은 "카즈라호의 상이다"였다. 무언가 뜻이 있는 듯 하면서도

오역이고 오리무중의 제목이었다.

그 다음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이곳 폐궁, 시크리 성으로 오면서 일어났다.

당시 무굴 왕조의 수도인 아그라에서 이 폐궁까지는 37킬로미터 가량의 거리였다. 우리 이수로 따지면

100리 길이었다.

그는 누누이 이 점을 강조하였다.

지금도 이렇게 멀고 또 험한 길인데 몇 백 년 전에는 정말 그 고통이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힘든 길이라는 설명에는 악바르의 첫 번째 부인, 힌두 출신의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었다.

 

안내인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그 당시, 무굴제국의 수도가 아그라였는데 왕은 아직 왕자를 보지 못하였다.

어느 날 기도를 하기 위하여 맨발로 아즈메르라는 이슬람 성지로 갔는데 그의 시종이 "여기에서

가까운 시크리에 사는 슬림지스키라는 성자에게 물어 보면 언제쯤 왕자를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여 그에게 찾아가 물으니 1년 안에 큰 부인에게서 아들을 볼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1년 후, 왕비 조다바이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자한길이라고 지었다.

악바르 황제는 시크리의 성자 슬림지스키를 지극히 신뢰하게 되고 그에게 소원을 물으니 시크리를

번성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악바르 황제는 아그라에서 37km 떨아진 시크리로 수도를 이전 하였다. 시크리성이 생긴

연유였다.

이런 설명 중에 그는 특별히 왕비가 이곳의 성자와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악바르 왕은 징기스칸과도 혈통이 닿는 터키계로서 이 곳 인도에는 이방인으로 쳐들어온 셈이다.

그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것은 오랜 전란으로 전장을 전전하면서 육체적인 문제가 발생하였거나

여러 이방의 여자들과의 관계에 따른 성적인 부작용, 그러니까 성병까지도 포함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안내강조하였다.

어쨌든 힌두 왕비가 낳은 왕자는 악바르 왕의 혈통이 아니고 그 수행 성자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이

청년 안내인의 암시적인 결론이었다.

 

내 친구 회장은 이런 설명을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옛날에 말이야---" 하는 식으로 어떤 종교에서 탓을 하자면 큰 일이 날 민간

전래 설화를 재미있게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그래, 그래, 그 백리 길을 걸어와서 다시 기도하느라고 여자는 정신이 없고 몸도 얼마나 피곤했겠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별별일인들 안 일어났겠어, 흠흠흠. 회장님이 덧붙여서 한 이야기는

"야담과 실화" 같은 이야기에다가 전설의 고향 같은 데에서 흔히 들었던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참모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통 사회에 이방인이 들어오면 아무리 권력이 대단했더라도 어쨌든 텃세에 휘말리고 눌리게 되는

것이지요.

인도인들은 보시다시피 피부나 머리칼 색갈이 모두 아주 검습니다. 에보니 느와르라고 아주 흑단

색깔입니다.

그곳에 몽골 계통의 왕이 군사 몇 만 명을 데리고 쳐들어와서 눌러앉게 되니 아무래도 주위에

휘둘릴 수 밖에요---.

저도 사실은 좀 그래요. 왠일인지 저 머리칼은 철회색이에요. 아이언 그레이라고 하지요.

사람들이 놀려요. 제 피가 순수하지 않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머리 염색약을 쓰는데 화학 염료가

아니고 순 식물성, 허브로 만든 약제입니다.  제가 한통씩은 선물로 드릴게요---."

 

그렇게 해서 그는 출처가 불명인 머리 염색약을 이제 흰머리가 성한 회장님께 잔뜩 팔기도 했다.

그의 머리칼 색갈은 물론 흑단이었다.

그런데 염색을 잘해서 그렇다니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장사 행위는 또 그러려니 한다 치더라도 일단 시크리 성을 들어갈 때의 일이 아무래도 또

석연치 않았다.

물론 사나흘 만에 인도의 대표적 관광지를 묶어서 본다는 계획에도 무리가 있었겠지만 그는

아그라에서 37킬로 밖에 되지 않는 곳을 탐방하는 것이 자신의 특별한 배려인 것처럼 말을

하였다.

그런데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그 곳 시크리의 현지 가이드를 자칭하는 사람들과

힌두어로 많이 싸웠다.

내용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가끔 그들의 말싸움에 등장하는 영어로 추리해 보면 동쪽 문인지,

서쪽 문인지로 들어가겠다는 우리 가이드의 주장과 이 지역 가이드 사이에 서로 자기네가 안내를

하겠다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는 것 같았다.

 

결국 씽이 이겨서 우리는 그를 따라 차를 타고 들어갔지만 떠나는 우리를 보고 현지 지역 가이드라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듯 욕을 하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래도 시크리 성 안의 한 두 곳, 주요한 부분을 빼먹은 것 같았다.

물론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처지도 있고 하여서 우리 안내인 씽을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절 설명이 없었고 마치 자기의 공으로 이곳을 다 구경한다고 생색을 잔뜩 내는

것이었다.

 

시크리 성에서 우리 청년 가이드가 특히 강조한 것은 악바르 왕의 왕비에는 힌두, 이슬람, 심지어

크리스천 부인 까지 있었는데, 모두 따로 따로 궁을 주어서 개별적으로 쓰게 하였으되 그녀들의

침소에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통로가 따로 또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악바르의 힌두 왕비는 이곳에서 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로 임신을

하였다는 사실을 가이드는 심혈을 기우려 암시하였다.

내 친구 회장이 그런 설명에 잠시 즐거워하는 낌새를 눈치라도 챘는지 그는 이곳 시크리 성에 관한

일반적 설명 보다도 해설의 상당 부분을 그런 사실에 할애하여서 이래저래 시크리 성 관광은 전반적이

못되고 편향되어 버렸다.

 

마침내 기획실장이 한마디를 하였다.

"여보게, 왕자 탄생에 너무 편향적인 견해야. 다른 문헌에 보면 왕비가 임신과 출산을 한 것은

아그라 성에서였던 것 같네. 다만 이곳에 있는 수도승은 오로지 왕자 출산을 예측한 것이고 왕이

그것을 고마워하여 별 볼일 없던 이 곳 성채를 크게 세웠어. 그리고 나중에는 수도로 삼아서

무리하게 이전한 것뿐이야."

"아닙니다. 왕자 탄생에 대해서 제가 하는 말은 모두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 책들에 그런

내용이 많아요."

그가 지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변호하였다.

"답답해 죽겠네. 내가 읽은 인도 역사책들은 다 그렇지 않은데 어디에서 갖고 온 엉터리 설화,

야담 같은걸 같고---. 공연히 회장님이 재미있어 하시니까 어거지를 막 쓰네."

수행비서도 이제는 힌두 청년의 본심에 의심을 품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갖고 물고

늘어졌다.

아무래도 투자 우선순위가 후순위로 밀린 데에 이 인도 청년의 입김이랄까, 말발이 먹혀 들어간

듯하여 투자 주창자인 수행 비서로서의 미운 감정이 묻어난 것 같았다.

이런 다툼은 물론 회장님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가 거짓말 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인도 청년인데도 한국에서 소고기 불고기를 먹었고 심지어

보신탕도 맛보았다는 이야기를 솔직히 다 털어놓았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세례도 받았지요. 제 이름은 이제 '마가'라니까요.

영어로 '마크', 제 집에서도 이런걸 알고 저를 내 쫓다시피 했다는 거 회장님께 다 말씀드렸어요.

저는 참말만 해요. 거짓말 못해요."

일이 이상하게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힌두 청년은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 사람아, 자네 정직성에 쇠고기와 보신탕은 왜 들어가나. 내 말은 악바르 왕의 아들이 탄생한

이야기를 너무 빙빙 돌려서 재미 위주로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일세. 토론의 주제를 돌리지 말라구.

그리고 이제 그만하세."

회장님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저는 제 진실성이 의심 받아서 참을 수 없습니다. 회장님께도 말씀드리고 판단을 부탁해야겠습니다."

그가 원군의 모습이 보이자 가만있지 못하겠다고 씨근대었다.

"아이구, 정 교수님. 무슨 말씀 좀 해주세요. 이거 제가 죽일 놈 되네요---."

비서가 내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무슨 일들입니까?"

회장이 경직된 분위기를 파악한듯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 회장님. 별일은 아닙니다만 제가 설명 드리지요."

친구간이지만 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당연히 존대 말을 썼다.

"여기 시크리 성에서 악바르 황제가 자식을 보았는데 그 자식의 DNA가 왕의 것이냐 여기 수도승의

것이냐에 의견이 나뉜 것입니다. 재미있으시죠?"

"하하하,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저 재미있게 상상해 보는 것이지---, 하하하."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다.

 

“제 말씀은---."

씽이 억울한 얼굴로 나서려고 하였다.

"어이, 씽. 그런 일로 다툴 필요 없어. 그건 아무도 모르니까. 당사자들 말고는---. 최근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생물사회학이라는 학문이 뜬다고 하지, 아마. 원앙이 금슬 좋고 학이 고고하다지만

그것들이 품는 알을 조사해 보면 30 퍼센트 이상이 자기 수컷 짝의 것이 아니라는 거야.

동물이 복합 교미를 하는 원인을 캐보면 모두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는구만. 보호해주는 후견인이 하나

생기면 자신의 DNA 생존 가능성도 두 배로 늘어나잖아. 신라시대 때 나온 화랑세기 같은 데에도 귀족

계급에서 귀부인들이 풍월주들과 관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면서요, 정교수님?"

"아, 네, 그건 우리 학자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 이두 문 해석에 차이가 있지요---. 화랑세기가 1980년대

후반, 일본의 어떤 지방 도서관에서 발견된 이래 그것을 우리 학자가 약식으로 복사하여 발표한 과정에도

소홀한 부분이 있구요.

화랑세기는 원래 우리의 화랑과 원화의 기원, 삼국 통일 위업에 기여한 젊은이들의 조직과 그 유래 등을

적어 놓은 것인데 그게 일부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남녀 간의 프리섹스 야사로 악의적 왜곡이 된 부분이

있지요.

물론 화랑제도는 고려와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변질된 측면이 있습니다.

화랑이란 말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지요.

심지어 우리나라의 현재 일부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구요.

최근 우리나라 신진학자들에 의하면 오히려 화랑세기의 이두 문이 당시 일본 왕실의 상용어였으며

의전구문이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지요."

나는 회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씽의 이야기 흐름을 차단하려고 슬슬 말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아, 그것 참 통쾌하군요. 내가 문외한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걸 언젠가 한번 읽고는

분통이 터진 적이 있어요."

"네, 하여간 회장님의 독서 범위는 우리 같은 학자들도 못 따라갈 지경입니다. 제가 요즈음 경기도 일산에서

포교, 시무하시는 불교의 정덕 스님과 학문적 교류를 좀 하는데 참 재미있는 내용이 많더라구요. 석

가무니께서 오랜 힌두 전통의 인도에서 새로운 종교, 불교를 갖고 나타나셨을 때에 많은 저항과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불교의 대경전은 한 백가지 이상 되는 방대한 섹션으로 구성됩니다만 그 중의 약 절반가량은 인도 고전

설화의 내용이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아직까지 별로 연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사실은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을 단적으로 요약해 보자면 먼저 힌두적인 가치랄까, 힘이랄까, 질서랄까, 그런 현실적인 여건이

먼저 이야기 속에 제시된 다음, 그러나 마침내 가장 힘이 세고 세상을 구제할 주체는 역시 부처님 공력이고

불교이다---라는 식으로 전통, 전래의 힌두 전설에 색채를 가미하고 덧씌우는 그런 콘텐츠랍니다.

인도는 본래 물이 부족한 나라라서 이 물과 관련이 있는 용왕, 그들 말로는 나가(Naga) 전설이 많은데 이

나가, 즉 용왕이 힌두 왕에게는 복종을 안 하여도 부처님에게는 복종을 한다는 내용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불교경전에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악바르 왕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지금 악바르 왕에 관한 전설이나 역사적

이야기도 여러 가지가 전래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바뀌고 지배 계층이 달라지면서 여러 가지 가치와 형식이 윤색되고 전도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걸 어느 한 가지만 맞다고 누가 주장한다면 그게 좀 편협한 난센스가 아닐까요. 악바르 왕이 두루두루

모든 종교를 다 수용했듯이 우리도 야담 차원의 어느 한 설화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이것 저것 다 수용

하면서 그 의미를 알아 볼 필요가 있겠지요---."

 

"역시, 내 친구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 교수께서는 학자로서 대단한 연구 안목을 갖고 계시는군요.

학문하는 자세가 아주 존경스러워요. 결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평형감각을 유지하시는 접근 방식이

놀라워요."

대 기업의 회장은 역시 회장이었다. 이제껏 한쪽으로만 관심이 있는듯하더니 문제가 생길 듯 하니까 얼른

양쪽을 아우르고 있었다.

 

"아, 이 분은 교수님이세요?"

씽 청년이 펄쩍 뛸 듯 놀랐다.

"아니 이때껏 그런 눈치도 없었나?"

기획실장이 핀잔을 주었다.

"저는 그저 이사님인줄로만 알았지요. 내내 정 이사, 정 이사 하고 회장님이 부르셔서---.

어느 대학에 계시는데요?"

"자네가 어디라면 알겠나?"

또 기획실장이었다.

 

"그럼요, 제가 한국에 자주 나가고 한 일 년가량 사업도 했는데요---."

"무슨 사업을?"

"아, 네---. 밥장사를 했지요. 강남에서요."

"카레 장사?"

"아뇨. 그건 벌써 자리 잡은 식당과 체인도 많아서 완전히 인도 전통 음식을 했지요."

"그런데?"

"망했지요. 반년 만에 몇 십만 불 꿀어박고 문 닫았어요."

"왜?"

"손님이 없었어요. 너무 인도 전통식이어서---."

"그래도 한국에서 사기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네."

나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망한 일은 가슴 아팠지만 내 동포가 사기를 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을 또 그대로 핑계대지 않고 말하는 씽의 자세가 진정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사기 당하는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요. 어리석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교수님은 무슨

전공이세요?"

"나---, 민속학이라면 알려나. 포크로어라고 하지---. 앤쓰로폴로지, 인류학하고는 사촌간인데---."

"민속학이라는 말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런데 어느 대학 교수님이신가요?"

"어디라면 자네가 알려나. 한밭 대학교라고---."

"네에?"

그가 입을 활짝 열고 화들짝 놀라며 다시한번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이내 입을 다물고 그 이상

말이 없었다.

"왜 놀라나? 우리 학교를 아는가?"

"아니오."

그는 짧게 대답하고는 일행에게 사진 찍는 시간을 준다며 자신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떴다.

 

이윽고 시간은 황혼을 예보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걸어서 성채를 빠져 나와야만 했다.

아까 들어올 때 시비가 있었기에 타고 온 차는 아래로 일찍 내려가 있도록 씽이 조치하였기 때문이었다.

걷는 거리가 만만치는 않았지만 회장 이하 모두 걸어내려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웠던 날씨도 석양이 되면서 견딜 만 하였고 내려오면서 살피니 이제껏 보았던 복구된 유적지

못지않게 허물어진 폐허도 만감을 주면서 우리를 배웅하였다.

 

"교수님, 박문식 교수님을 아시겠군요?"

씽이 혼자 걷는 내 옆에 붙었다.

"아, 은퇴하신 박문식 명예 교수님? 그분을 어떻게 아는가?"

"네, 그분이 인도에 계실 때 저희 집에 와 계셨답니다."

"아주 옛날이야기인데---?"

"네, 오래 전이지요. 30년 전에 한 2년간 계셨답니다."

"아, 그럼 두 가정이 잘 알겠군? 특히 아버님하고."

"네, 아버지는 10년쯤 전에 돌아가셨지요. 어머니는 살아계시고."

"그럼 형제는?"

"저 혼자입니다---."

"한국에 와서 식당까지 했다니까 박 교수님하고는 연락이 잘 되었겠네."

"네, 많이 도와주셨지요."

"그럼 왜 우리한테 피 알도 하고 그러시지 아무런 말씀이 없었을까. 손님이 없어서 망할 형편이었다면서---."

"폭삭 망했지요. 그런데 아버님, 아니 박 교수님은 돈은 좀 보태주셨어도 일절 모른 체 하셨어요."

"아버님이라고?"

"아, 아뇨.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 되시는 분이라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인도의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고."

"그럼 박 교수님 부인에게는 어머님이라고 하는가?"

"그 분은 만나 뵙지 못했지요. 워낙 몸이 안 좋으셔서 누워계신다고 하고 또 신경이 예민한 분이라서 복잡한

일에는 나서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뇌졸중, 그러니까 중풍으로 오래 누워계시지. 마비증세 말이야. 심장병, 하트 어택도 왔고.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한번 물어보세. 박 교수님이 경제적 손실이 컸겠네---? 인도에 인연을 잘 못 맺은 덕분에---."

"죄송하지요. 폐를 많이 끼쳤어요."

'자네 몇 살이라고 했나?"

"스물아홉입니다."

"박 교수님이 인도에 오래 계실 때 태어났구만---. 그분 별명이 방문식이야. 앉아있지를 못하셔. 반드시

방문하여 현장 답사, 필드 워크를 해야 한다는 그분 주장 때문에 나온 말이지만 그분 성함이 또 방문식으로

발음 되잖아. 내 말 뜻을 알겠는가?"

"네, 저도 그 말 들었습니다."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구만---."

"지금은 가깝지 않습니다. 멉니다. 제가 손해를 많이 끼쳤습니다. 안 만나시려고 합니다."

"정말 큰 손해를 끼쳤나 보네---."

"가시면 저를 만났다는 말을 꼭 전해주십시오. 언젠가 다시 가서 찾아뵙겠다는 제 뜻도---. 박 교수님은

아들이 없습니다. 딸만 한분인데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아니 두 사람이 뭘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해요?"

내 친구 회장이 임원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가 우리 쪽으로 닥아 왔다.

"아, 아니올시다. 이 사람이 한국을 좋아해서---."

"참 신기한 녀석이지요? 한국말도 기가 막히고, 우리 본사로 발령을 낼까?"

회장의 말이었다.

"네, 가고 싶습니다."

인도 청년의 눈이 등잔 만해져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회장님, 우리말 잘하는 이런 일꾼은 인도에 있어야 빛이 더 납니다. 본사에서도 할 일이 있겠지만 이곳에서

더 값어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그런 순발력이 나왔는지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정 교수께서는 항상 날카로운 판단을 하신단 말씀이야, 하하하. 자네는 여기

인도에서 나를 도와 일하게."

회장은 다시 느린 걸음으로 뒤쳐졌다.

 

"교수님, 너무 하십니다."

씽이 울먹이며 조금 후, 나에게 말했다.

'아니야, 난 이번에 돌아가서도 박 교수님께 자네 만났다는 말 하지 않겠네. 나를 끼워 넣을 생각은 말게.

최근에 박문식 선생님이 왜 그렇게 피폐해지셨나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자네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면서---. 모든 것은 박 교수님의 판단에 따르게. 그리고 내가 이 회사의 사외 이사로 있는 한, 자네는

본사로 들어올 생각을 말게."

그가 눈에 눈물을 비쳤으나 박 교수를 생각하는 내 마음에도 이 곳 사람들이 오매불망하는 비가 내렸다.

갑자기 폐허의 수풀 속에서 힌두 소년 하나가 불쑥 나타나서 내 눈에 신기루처럼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사라진 소년의 잔영이 마치 30년 전, 씽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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