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고 선생님!"
"명희, 명희가 맞지?"
두 사람은 <가마토 지옥(がきど 地獄)> 앞에서 동시에 소리쳤다.
"가마토 지옥이란 '가마' 그러니까 '솥을 걸어놓은 지옥'이라는 뜻이니까
'부뚜막 지옥'이라고도 할수 있답니다. 벳부에서도 대표적으로 뜨겁게 분출하는
온천을 '지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주교를 박해하던 막부 시대에 예수를 끝까지
부인하지 않은 신도들은 그 뜨거운 열탕 온천 속으로 몸을 던져야했기 때문이지요."
빨간 깃발을 든 아가씨 관광 가이드가 젊음을 과시하듯 높은 소프라노 육성으로
벳부의 여덟군데 가장 특징적 온천, 그러니까 여덟 지옥을 차례로 설명하는 배경 앞에서
갑자기 두사람의 남녀가 소스라치게 소리를 지르며 이상한 막간극을 연출하였다.
소리를 외친 남자는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신사였고 여자는 마흔을 갓 넘었을까,
부녀간이든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쯤으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시선이 꽂혔다.
"여보, 대학 때 은사님이신 고제찬 교수님---, 내가 제일 존경하던 분이셨어요. 자주 성함을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글쎄, 당신이 대학 시절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잖아."
남편이라고 소개된, 그러나 여자 보다 더 젊어보이는 날렵한 몸매의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을
받으며 고 교수에게 고개만 까딱해 보였다.
얼굴이 붉콰한 것이 벌써 낮술을 걸친 모양새였다.
"반갑소이다."
고 교수도 내키지 않는 반응을 보였다.
"저희 장똘뱅이 부부들이 벳부 온천장을 함께 찾았습니다. 점심에 기꾸표 청주를 한잔씩
걸쳤답니다. 용서하십시오."
남편이 그래도 인사는 차릴줄을 알았다.
"여보, 나는 선생님하고 따로 시간 좀 가질래요. 먼저 일행을 따라가세요."
명희가 교수의 팔을 끌고 지옥의 뒷편에 줄줄이 서있는 초가 마을의 한 귀퉁이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지옥에서 나오는 유황을 굽는 곳>이라고 한글 설명의 팻말이 친절하게 붙어있는 초막들이었다.
한글은 친절하게도 이 곳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 '유황 채집 시설'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름하여 '유노하나 유황재배지'라고 하였다.
'유노하나'란 '유황의 꽃'이란 뜻으로 유황을 채집하여 꽃잎처럼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였고
일본어 '노(の)'라는 표현이 동격을 나타내어서 '유황 꽃'이라는 표현도 되었다.
"이보게 명희, 신랑을 두고서 이리로 온 건 좀 잘못된 발걸음같다---. 동반한 다른 부인들 시선도
그렇고---."
고 교수가 염려스러운 낯빛을 하였다.
"걱정마세요. 장똘뱅이 부부들이 맨날 주위 사람들 험담하는걸로 재미 붙여 살아가요.
그러니 아예 신경 끄세요. 하여간 선생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네요.
맨날 두려워 떨며 두리번 거리시기나 하고---."
"명희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막무가내, 저돌성, 허허허."
"지금은 그렇지도 못해요. 시댁 등살에 참고 살다보니 제 성질에 못이겨 울화병이 생겨서
많이 앓기도 하였고, 지금도 몸이 시원치 않아요."
"사람이 맘대로 하면 쓰나. 세상의 규율도 있고 또 참는게 미덕이기도 하고---. 여기 일본
소학교에서 맨 처음 배우는 문장이 무언지 아는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것이라네."
"제가 폐끼친게 뭐 있나요. 그때 사모님에게 전화를 드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는데, 그만
폐를 끼친 것 처럼 처리되고 말았지요. 참 억울했어요.
사모님이 막 화를 내시고, 학생이 교수님을 그렇게 스토킹하면 되느냐고---.
사실 제가 뭐 폐를 끼친 일이 있었나요. 그냥 제자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안부가 궁금하여
전화 한번 한건데 그걸 사모님이 받으셔서는 대뜸---."
"지나간 이야긴 그만하자. 그 사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데---."
"네? 돌아가셨나요?"
"벌써 두어해 지났지---."
"그때 제가 전화하고나서 마음이 상하셔서 병을 얻은건 아니셨겠지요, 설마?"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벌써 오래 전 이야기잖아. 그때도 아내는 이미 몸이 좋지
않았어."
"저도 그렇지만 사람이 모두 마음 때문에 병을 얻는데요. 사모님 혈액형이 A형이셨지요?"
"그건 어떻게 아누?"
"그때 우연히 강의시간에 그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잊지 않고 간직했죠. 하여간에 A형은
요즈음 뜨는 말로 소세지 형이라고 하네요."
"소세지 형?"
"막말 한다고 흉보지 마세요. 인터넷 같은데 한동안 떠다니며 난리를 친지도 오래 되었어요.
소세지 형이란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같은 성격이래요."
"허허허, 그럼 B형은?"
"단무지 형이래요. 단순하고 무지하고 지랄같다나요. 선생님은 O형이시잖아요. 제가
선생님에 관해서는 그때 이래로 잊은게 하나도 없어요."
"그때 이래라니깐 우리 사이에 뭐 대단한 사건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키스, 그래 그걸
키스라고 해도 될는지. 명희가 졸업반이었지, 아마도 그때가. 종강을 하던 날 마침 첫 눈도
내리던 날이었구나. 명희가 굳이 칸막이가 된 민속 주점에 나를 데리고 가서는 어느 순간
인가 내게 입을 맞추었지?"
"선생님이 화장실 간 사이에 제가 동동주에 소주를 탔거든요. 그때 우리 서로 무지하게
취했잖아요."
"어쩐지---. 그때 이래로 내가 술을 끊었다. 전에도 내가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하여간 취한 나를 대신하여 우리 집으로 명희가 전화를 했었지."
"가까운데니까 모시고 가라고 사모님께 말씀 드렸지요. 저도 엉망이었으니까요."
"차라리 술집의 종업원을 시켰어도 좋았으련만---. 그 다음 날은 또 잘 들어가셨느냐고
우리 집으로 재차 전화를 했으니 집사람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당시에도 집사람은 몸이 좋지 않았었는데, 명희 말대로 성격이 소세지였으니까
며칠 몸져 들어누웠을 수 밖에 없었지. 그건 그렇고 O형은 또 뭐라고 하는가?"
"오이지래요. 오지랍 넓고 이기적이고 지랄같다네요. 호호호."
"명희는 무슨형이지?"
"저는 악명 높은 AB형이랍니다."
"천재 아니면 바보라던가?"
"그건 옛날 식이구요, 요즘은 쓰리지라고 한데요."
"쓰리지?"
"지랄같고 지랄같고 지랄맞데요. 오랜 만에 뵙는 선생님에게 왜 이런 말이 나와버렸죠?"
"그리스 비극이 신탁에 따른 운명의 결과라면 현대인의 비극은 성격의 결과라는 말이
있잖니. 우리가 뭐 비극의 주인공들은 아니겠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 극장의
등장 인물들이라고 할 때, 다들 자신의 성격이 미리 감아 놓은 태엽처럼 그렇게 풀리며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DNA 세계관이지.
네가지 혈액형으로만 성격을 나눈 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 같다만. 어쨌든 일리는 있는듯
하네, 듣고 보니---.
하긴 사주팔자나 점 같은 것을 쳐보면 모든 무당들의 진단과 예단의 말들이 워낙 짧고
상징적이어서 자성예언이 되면서 인간을 아예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도 같더라만."
"선생님, 여기는 강단이 아니고 벳부예요, 벳부, 호호호"
"나도 이제 강단을 떠날 날이 얼마남지도 않았어. 그래서 착잡한 생각도 들고하여 추석
연휴와 내 강의 시간을 조절하여서 혼자 여행을 왔단다.
일본이 좀 가깝고 만만한 느낌이랄까, 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 사실 내가 일본을
겉으로는 욕을 하지만 이네들이 살아가는 삶의 예술성, 운명론적인 자기 포기의 모습들,
때가 되면 철저히 받아들이는 적멸 의식 같은 것이 정년을 맞는 내 처지와 기호에 딱
들어맞는듯 싶어서 일단 이쪽으로 훌쩍 떠나와 본거야.
나는 아직 종교인이 못되지만 이들이 읊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는 소리도 생소
하지는 않고---. 내가 둘러메고 온 이 캐논 카메라도 '관음'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네,
허허허."
"그럼 단체관광으로 오신게 아니세요?"
"아, 나는 원래 혼자 잘 다니잖아. 병약한 집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도 그런 편이었어.
일본에 오면 나는 '료깐', 그러니까 오래된 '여관'을 징검다리처럼 삼아서 다니고 있다네.
진정한 일본 여행은 료깐 숙박이라야 한다는 내 나름의 생각이 있지.
이제는 여관 시스템도 인터넷으로 예약이 되고 아주 괜찮아요. 값도 싸고---.
그나저나 명희는 단체관광인가본대, 어서 돌아가 봐야지---."
"괜찮아요. 저희 일행은 여기 벳부에서 제일 크다는 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고 떠니기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봐야 밤새 술추렴에 고스톱 판일테지만요.
여자들은 또 이번에 오지 않은 부인 회원들 욕이나 하다가 밤을 새울 것이구요.
그런데 내일은 선생님 어디로 가세요?"
"하우스텐보스로 가볼까 하네. 전에 화란을 가보았지만 거기하고 비슷하게 만들었다니까
비교도 할겸---. 역시 모방의 천재 일본의 본색을 들여다 보는것 같기도 하고."
"아이, 잘되었네요. 우리는 내일 그 안에 유일하게 있는 덴하그라던가 그런 호텔에서 일박을
한대요. 거기서도 우리 다시 만나요, 선생님."
"글쎄, 나는 오후가 되면 일찍 나와서 사세보나, 나가사키의 료깐을 찾아보아야 하는데---.
향방이 정해지지 않아서 아직 예약을 안해두었거든---."
"선생님,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내일 함께 지내요. 남자들은 따로 어울려서 밤을 세우니까 제
방으로 오셔요, 네?"
"그건 약속 못하겠네."
"또 겁이나서 두리번 거리세요? 그때 제가 시를 써서 선생님 연구실을 기웃거릴 때에도
주위를 의식하신다면서 들어오게 하지 않으시더니---."
"그건 자네가 야간부 학생이어서 강의가 끝나면 한밤중인데 어떻게 연구실로 들이겠니.
낮에도 나는 내 방을 개방하지 않는 편인데---.
그리고 아, 그래---. 그때 나보고 자꾸 속살을 보여주겠다고 하여서 내가 놀라자빠진
기억이 나네, 하하하. 아이구, 명희야. 웃음이 터진다. 하하하."
고 교수가 진정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여 크게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에이, 제가 어디 제 속살을 보여드린다고 했어요? 제가 쓴 엉터리 시의 제목과 내용이
여인의 속살이라는 것이었지요---. 부끄럽게시리, 호호호."
"그래, 맞어. 시의 제목이 속살이었지---."
"제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았잖아요. 그래서
여자상고를 나오고 은행에 근무하다가 남들보다 서너살 더 되어 국문과로 진학
했지요.
그러다보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같은게 무슨 전생의 업보처럼 저를 짓눌렀어요.
교수님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싶었고 또 현대시를 강의하시니까 저 나름의 하찮은
창작 욕구와 결부되어서 정신을 못차리겠더라구요.
그래서 정말로 유치한 제 시 뿐만 아니라 진짜 속살을 보여드리고도 싶었다니까요.
제가 그때 얼마나 백옥같은 가슴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공동탕에 들어가면
온 여자들이 다 제 가슴을 봤어요, 호호호. 하여간 제 속살을 보여드리고 싶었던
제 마음은 제 신체적 갈망하고도 결부되어 있었다니까요, 선생님."
"그것봐. 그래서 내가 이성적으로 잘 대처했지---."
"그 이성적 대처가 제겐 한으로 남아요, 선생님."
"그 속살을 명희는 그때 백옥같다는 표현이 아니라 연두부 빛갈과 촉감으로 비유했어."
"아, 선생님. 기억해 주셔서 감동이예요. 그러고도 시치미를 떼셨군요, 한스럽네요."
"그런 정한이 남아있었으니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따로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지, 허허허.
그래 그 연두부 빛갈의 아름다운 속살 가슴에는 아이들 몇이나 물렸어?"
"겨우 딸아이 하나 키웠어요. 제 신랑이 저보다 나이가 어려요. 캠퍼스에서 만났으니깐
대학을 늦게 들어간 제가 연상이었지요. 그래서 어린이 취급을 했는데 이 다 큰 어린이는
밖으로만 돌고 저를 잘 돌보지 않아서 연두부 같던 제 속살은 아주 다 망가져 버렸지요.
선생님 이리로 와보세요."
그녀가 그의 여행용 배낭의 끈을 잡고 이끌었다.
두사람은 유노하나 유황 재배 초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가운데로 들어갔다.
극성스런 관광객들도 그렇게 까지는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 베두부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니-. 베두부가 뭘까?"
"제 가슴이 그렇게 변했어요."
그녀는 헐렁하게 입은 여행용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얼른 트더니 빵빵하게 붙은
브래지어를 거침없이 쓸어올렸다.
연두부처럼 하얀 젖무덤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칼질이 곱게난 절벽이 드러나있었다.
마치 삼베에 짠 베두부같은 빗살 무늬와 칙칙한 색조의 절벽이 오래되어 평평하게된
부조물 처럼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선생님을 뵈면 언젠가 꼭 이런 제모습을 친정집 아버지에게처럼 보여드리고
떼를 쓰고 싶었어요. 인공 보형물을 살 속에 넣으라고도 했지만 의학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하여간 선생님께 제 이렇게 변한 속살을 꼭 보여드리고 한번 울고 싶었어요.
내일 하우스텐보스 호텔에서는 꼭 저를 안아주세요, 선생님."
뒷말은 내던지다시피하고 그녀는 일행을 좇아서 달려갔다.
잠시후 고 교수도 유노하나 초막을 떠나서 벳부의 중심부로 나왔다.
조금만 기다리면 국도를 달리는 버스들이 떠날 채비를 차리고 부릉거렸으나 그는
얼른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스미마셍, 조금만 달려봅시다."
조금 후에 '하우스텐보스'와 '나가사키'로 갈라지는 도로표지 판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물어보기 전에 고 교수는 담담하게 향방을 일러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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