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주는 “섬”이라면 치를 떨었다.
결코 가서는 안 된다는 금제의식이 얼마나 강했냐하면 교사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가야하는
수학여행도 섬이라면 인솔 책임을 회피하고 결근이었다.
따지고 보면 대학 때의 수학여행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남쪽의 항구 도시에 있는 교육대학을 나온 그녀는 지금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영어전담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물론 함께 나온 동기들은 대체로 고향인 남해안 근방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다.
제주도 졸업여행은 그 동기들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났었다.
재학 중에 군대를 갔다 온 세살 위의 남학생 강민경도 일행 중에는 있었다.
"오빠, 민경이가 뭐예요. 이름이 여자 같다."
"내가 니 민경 같은 존재 아이가."
그는 사투리가 셌다.
"민경이 뭐야, 면경(面鏡)이고 거울!"
"그래, 내가 니 거울이다. 내 거울 속에서 니가 아름답게 웃으며 평생 살게 할끼다."
그의 집안은 항구 도시에서 사립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하고 있었다.
둘째 아들인 그가 교대를 선택한 게 그런 사연과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았으나 가르치는
일에 그는 큰 뜻을 둔 것 같지 않았다.
세상에는 팔자와 궁합이 있는지 군대를 갔다 온 그가 복학을 하여 한 클래스가 되자 두 사람
사이에는 급속도로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교류의 허용 영역은 한국의 보수적 여자 대학생, "정진주"의 사고방식 범주 이내였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졸업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말하자면 파경이었다.
사실 민경과 진주 간에 사랑의 감정이 무르익으면서 그는 그녀의 몸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면경이며 거울 같은 존재인 자기에게는 몸을 다 보여주고 또 허락하여야 한다는 소리를 그는
입에 달았다.
그녀는 그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다만 깊은 키스와 헤비 페팅만이 허용범주였다.
가끔 들린 비디오 방에서는 그가 그녀의 젖꼭지도 혀와 입술로 빨았다.
하지만 정작 입은 무거워서 친구나 특히 동기들에게 그들의 사이를 결코 발설하지는 않았다.
정념과 금제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더니 갑자기 그는 그녀의 몸을 요구하지
않고 키스와 페팅도 멀리하였다.
강민경으로 인하여 깊은 키스와 짙은 페팅의 즐거움에 조련된 그녀는 가끔 몸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여러 달 그런 갈망의 신호를 체면 유지의 수준에서 계속 보냈으나 그는 안면을 싹 바꾸고
꿈도 꾸지 말라는 태도를 보였다.
마침내 그의 눈치만 보며 몸을 뒤틀던 그녀는 졸업학년의 가을이 올 때 쯤 부터는 독이 올라서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하였다.
우선 가슴이 조금 보이던 투피스 상의를 터틀넥으로 바꾸고 하의 쪽으로는 통짜 칠 부 내의에 꼭
끼는 거들을 하나 더 걸쳤고 스커트 대신에 바지만 입기 시작하였다.
뜨겁게 즐거웠던 그와의 지난 기억을 마모시키고 혹시 있을 앞날의 급작스런 정념의 기회에도
재갈을 물리기 위함이었다.
갑옷에 정조대까지 찬 이 패션은 서릿발 같은 복수심의 발로였다.
그리고는 집에서 말하는 부자 집 청년들과 선도 보기 시작하였다.
그때만 해도 졸업학년 때에 떠나던 수학여행에서도 그녀의 전투적 방어 복장은 마찬가지였다.
객지에서 혹시 그가 벌일 만일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거들과 바지는 그녀 자신이 입고 벗기에도
힘이 드는, 꼭 끼는 것으로 골라 입었다.
난공불락!
한때 머리에 쥐가 나도록 즐거움을 깨우쳐 주고는 이윽고 유기해버린 자에 대한 응징이라는
결심도 다시 가슴깊이 새겼다.
동기들 간에는 그가 무슨 몹쓸 성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빠, 소문이 좋지 않아. 정말 그런 건 아니겠지?"
"나 성병 걸렸다는 소문? 이 자슥들이 내가 요즈음 술을 묵지 않으려니까 악담을 까네. 하긴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면 그건 전적으로 옷 안 벗은 정진주, 니 채금이다."
"세상에! 말하는 폼이 벌써 불결하고 더러워. 나 다른 데 시집 가 버릴까봐. 그동안 여럿 남자와
맞선을 보다가 하나 잡았어."
"그기 정말이가?"
"그럼, 아주 멋지고 깨끗한 청년이야."
그녀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래도 그에 대한 일말의 미련은 남아서
이런 수준의 공갈 협박성 대화도 있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떠난 바로 그날 뱃전에서 그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져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성병 때문일끼다. 그기 많이 아프기도 하거든---."
과대표가 경험자의 유식함을 뽐내는 가운데 여행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두들 제주항에 발을 딛자마자 다시 배를 갈아타고 되돌아올 운명이었다.
인솔 교수의 얼굴은 반나절 만에 새카맣게 탔다.
그 와중에 그가 몸을 던진 이유들이 근거 없이 불거져 나왔으나 큰 이유의 하나가 정진주 때문
이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다.
그의 입이 그렇게 무거웠었다. 애통하는 속에서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찾을 생각은 접었다.
망망대해는 차라리 포기를 빨리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워낙 입이 무거워 뜨지 않는가 보다’라는 친구들의 허탄한 농담처럼, 며칠이 지나도 그는 결코
떠오르지 않고 깊이 심해로 침잠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으면서도 그녀는 그냥 독신으로 지냈다.
강민경이 살아있을 때에 그녀가 공갈을 친 대로 ‘깨끗한 청년들’은 주위에 많이 나타났으나
거들 떠 보지도 않고 그녀는 독신을 고집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유행처럼 불기 시작한 초등학교의 조기 영어 교육 바람을 타고 ‘테슬(TESOL)’,
그러니까 ‘영어 학습 교육학’의
박사과정을 밟으러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 교육부에서 장학금을 일부 지원하고 휴직 상태를
인정해주는 좋은 조건의 파견교사 시험에 합격을 한 것이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어떤 대학에서 테슬 과정에 도전을 하면서 그녀는 자메이카 출신의
피부색이 짙은 미국 시민권자와 결혼하였다.
그렇게 싫어하던 ‘섬’ 출신에 피부색까지 짙은 외국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전생에
‘섬’과는 무슨 필연적 업보, ‘필업’같은 게 있는 모양 같았다.
아무튼 남편이 된 사람은 성취동기가 아주 높아서 툭하면 자메이카 출신인 당시 중동 전쟁의
영웅 파월 장군을 들먹였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사랑이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둘은 결혼에 이르렀고, 그녀는 부산물로 미국
영주권을 얻게 되었다.
‘테슬 박사학위’를 딴 후에 그녀는 장학금을 댄 교육부와의 조건에 따라 귀국 후, 일정 기간
다시 교직에 근무하게 되었다.
갑자기 원어민 교육이 강조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영주권은 교육 공무원 신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지며 두 사람은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정씨 성을 되찾았지만 영주권은 반납하지 않았다.
자메이카 출신의 남편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영어는 물론이려니와 강민경 이후 그녀가 감추어 덮어놓았던 섹스의 세계까지도---.
지-스폿(G-spot)이라는 은밀한 말과 그 성전에 도달하는 밀교적 회랑에서 수행되는 절정의
의식과 경지도 모두 그가 깨우쳐주었다.
테슬이 관념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 훈련에 가까워서 오관은 물론 온몸의 보디랭귀지를
사용하는 습득 체계이듯, 섹스도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으며 온몸의 떨림이 필요한 생리적
미학이었다.
귀국 후 의무 복무 기간 동안에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서 교육부 산하의 영어 조기 교육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그런 관련의 연구직을 수행하다가 다시 일선 초등학교의 영어 전담 교사로
나가서는 이론과 실제를 병행하는 경력도 쌓았다.
그녀는 곧장 어린이 영어 교육의 전문가로 대접을 받았고 TV와 라디오 강의도 하였으며 교재도
여러 권 출간하였다.
그녀는 연구와 교재 발간을 위하여 방학 때마다 미국 출장을 가면서 부수적으로는 영주권 유지를
위한 절차도 해결하였다.
출장지에서는 자메이카 출신의 전 남편과도 분야가 비슷하여 만남이 있었으나 공식적인 자리로
국한하였다.
그의 탐욕에 찬 유혹에 그녀도 몸이 떨렸으나 자존심이 길을 막았고 함께 간 일행이 또한 방패가
되었다.
"정 선배, 도대체 뭐요. 전 남편이 이 방면의 국제적 학자라 칩시다. 한번 헤어진 후에도 다시 이런
자리에서 밍기적 거리면 더티한 야합입니다. 야합은 이쪽저쪽 변경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변경인들의
작태랍니다. 재결합을 위한 진지한 자세라면 내가 말도 하지 않겠어요."
"박 선생, 내가 할 말은 없네. 그래도 경계인에다 야합이라니 좀 심하군."
박준수 선생은 수도권에서 교대를 일등으로 졸업하여 영어 조기 교육 연구원에 막 부임한 젊은
교사였다.
정진주 보다는 일곱 살이나 나이가 젊은 학구적 면모의 청년 교사였다.
같은 연구원에 근무하다 보니 미국 출장을 몇 번 함께하며 정진주의 개인 사정을 조금 알게 된
사이였다.
그의 맑은 얼굴과 마음이 아니었으면 정진주의 출장지에서의 일상은 다소 망가졌을는지도 몰랐다.
"내가 전 남편에게 밍기적거리는 게 보여요? 하지만 박 선생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내가 남자를
모르는 생과부도 아니고, 하하하."
그녀는 민망하여서 남자처럼 하하 웃었다.
"정 선배님, 그러니 제 품으로 오시라는 겁니다. 이거 출장지에서의 유혹이 아니라 정식 프러포즈
입니다."
"이보게, 막내 동생. 누님을 이런 식으로 놀리면 귀국하여서 성희롱으로 보고서에 올릴 거예요."
"정 선배님, 요즈음 '누나 여보'라는 유행어가 있다는 것도 모르세요? 연상의 아내가 그렇게 많다는
겁니다."
"박 선생도 큰일이구만. 그런 트렌드에 빠져서 칠년 연상의 이혼녀를 유혹하다니---."
그러나 정진주는 박준수의 접근이 일시적 장난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진지한 청년이어서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끌리게 하는 것, 그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는
그녀였다.
그런 만큼 미국 출장은 시스템 자체가 어쩔 수 없어서 자주 동행이 되지만 한국에서만은 사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그의 여러 가지 제안들을 그녀는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독사모"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무슨 입회원서 비슷한 것을 들고 왔다.
"또 누님에게 장난이야? 독사모가 모야?"
그녀가 입술을 모아서 말하며 장난처럼 물었다.
"정 선배! 독사모도 몰라요? ‘독도를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자연보호 연합회의 산하 모임인데요.
정말 독사처럼 독한 마음으로 독도를 지키자는 모임이지요."
"으이그. 난 뱀이라면 질색이야. 난 좀 빼줘요."
"거 봐요, 정 선배는 역시 경계인에 다름 아니네요. 결국 미국 영주권이 있는 분이니까 독도고
백두산이고 다 관심이 없어지는 거라고요."
"아, 정말 너무 그러지 말아. 어쨌건 난 독사모는 싫다. 독도, 거긴 섬이잖아. 난 섬이 뱀만큼
싫어. 혹시 백사모나 천사모는 없어요? 백두산 천지 사랑하는 모임 말이야."
"그런 모임 쪽은 뭐 고구려, 발해사에 대한 한중 분쟁 우려 관계로 우리 같은 교육 공무원이 끼긴
힘들 것 같아요. 우선 독사로 시작하여 백사, 천사까지 나갑시다. 울릉도, 독도는 화산섬이라 뱀도
없구요."
"나같이 변경지대에 사는 경계인을 그렇게 비웃는 박 선생은 그래 백두산은 가봤어?"
"솔직히 돈이 달려서 아직 못 가봤어요. 제가 주택 부금을 엄청 붓거든요."
"독사모에도 회비 같은 게 있겠네?"
"당연하지요. 연간 삼만 오천 원입니다. 자연보호 비용이지요. 정 선배 회비는 내가 다 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아이구, 백두산 갈 비용도 달린다는 사람이---."
그녀가 마침내 독사모에 가입된 건 그런 사연의 결과였다.
그녀를 독사모에 가입시킨 박준수는 이어 독도에 관한 여러 종류의 학술 대회와 세미나에 그녀를
이끌고 갔다.
예컨데 한국 영토학회니 독도학회니 하는 데에서 벌이는 ‘학술 대토론회’가 그것이었다.
"정 선배, 백범 기념관 알아요?"
"알고말고. 잘 알지요."
"아니, 질투 나는대요. 누구랑 거기 효창공원 데이트 했어요?"
"이런 청년을 봤나. 질투에 눈이 어두워서---. 내가 BBB운동 회원인줄 알잖아요. 거 왜 한국 방문
외국인들이 말이 통하지 않을 땐 휴대폰으로 즉각 통역을 의뢰할 수 있는 시스템 말이야---.
그 회원들을 일 년에 한두 번 교육시키는 곳이 효창 공원 안의 백범 기념관 아니오. 그래서 내가
가끔 간다오."
"아이구, 잘 되었네요. 거기에서 독도 영유권과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 그러니까 한일 간에 새로
그은 EEZ 경계 획정에 관한 문제성을 두고 이제나마 때늦은 학술 대 토론회가 있어요."
"사람 살려! 박 선생, 난 그런 거 몰라요. 관심도 없고---."
"정 선배! 회색분자, 경계인이란 소리 안 들려요? 겁 안나요?"
박 준수가 다그쳐서 그들은 백범 기념관으로 갔다. 일본이라면 손가락도 작두로 자르고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리며 민족혼을 일깨우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학술 대회장은 썰렁하였다.
두 사람은 군사 독재 시절의 한일 협정 보다 더 못한 경제수역 협정이 민간 정부 때에 이루어졌다는
통탄할 사연을 알게 되었고 또 실효성에 의문이 가는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서도 이럭저럭 깨달음이
생겼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다만 학술 대회가 끝나고 철 이른 가을 단풍의 효창 공원을 거니는
것으로 반분은 풀었다.
"정 선배, 왜 하필이면 흑백 혼혈 자메이카 인과 결혼했어요?"
"박 선생, 내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대가 나에게 동료관계를 넘어서 남녀 사이로 관심을
갖는다니까 내가 이해를 한다고 쳐요. 하지만 왜 국제결혼을 했느냐는 정도라면 혹 몰라도, 앞에다가
한정어는 넣지 말아야지. 흑백 혼혈이니 뭐니 그런 수식어는 빼고 그냥 왜 국제결혼 했냐 하는 식으로
묻는 것도 사실은 좀 월권이긴 하지만 말이야---."
"정 선배,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특권이라구요."
"특권 인정 못하겠지만 하여간 좋아요. 내가 순혈 청년 박 선생의 진지한 얼굴에 지쳤어요. 다만 지쳐서
인사이드 스토리를 여기 백범 선생 동상 앞에서 털어놓아요. 그러니까 내 이야기 잘 들으시고 사랑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그치세요. 여기 건국의 아버지 동상 앞이니까 꾸밈없이 고백성사 보는거야. 여기니까
나중에 입이 가벼웠다고 자학은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예전에 교대 다닐 때 첫 사랑이 있었어. 첫 사랑이라고 하고나니까 신파 같네.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들릴까 억울하기도 하고---. 하긴 그 후 내가 국제결혼을 했으니 두 번째 사랑은
있었구나.
아무튼 첫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 못할 그 남자가 자살을 했어. 연애기간 동안 그는 줄 창, 몸을 요구
했는데 내가 완강했지. 그랬더니 이 청년이 아마도 사창가에 갔다가 허피즈인지 아니 에이즈에 걸렸는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거야. 그걸 그는 내 책임이라고 장난하듯, 놀리듯 말하더니 그냥 바다로 뛰어든
거야. 수색인지 조사인지를 나온 해경 사람들은 그걸 전문용어로 ‘자진 입수’라고하대."
"음---, 비극이었네요!"
박준수가 신음을 하였다.
"평가나 분석은 하지 마, 위로도 하지 마!"
정진주가 낮게 명령하였다.
"그래 시신은 찾았어요?"
"나 참, 그런 현실적 질문이 왜 나오나, 이 추억어린 낭만적 고백을 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여인 앞에서."
"선배가 과거를 너무 생생하게 반추하여서 솔직히 질투도 나고---. 아니 그럼 내가 이 시점에서 '불쌍한
누님!' 하고 부둥켜안아야 어울리겠수? 아무튼 부산 앞바다의 제주 해류라면 동해안을 타고 북쪽으로 흘러
가는데 거기 무슨 이야기의 실마리가---."
"야, 이 사람 눈치가 두렵다---. 하여간 이야기 더 듣고 싶어, 말어?"
"선생님, 더해 주세요."
그가 아이들 목소리를 흉내 내며 과거지사에 대한 그녀의 무거운 성찰에 가벼운 반항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코믹 전술은 분위기에 떠밀렸고 그녀는 흔들리지 않으며 진지한 톤을 유지하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대 다닐 때 영어교육 전공 쪽의 필독 리스트에 헤밍웨이가 쓴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가 있었어. 거기 여주인공, 브렛이 출정하는 약혼자의 몸 요구를 거절했지. 약혼자는
전장에서 죽었고 그녀는 간호사로 지원하여 병사들에게 몸을 마구 맡기며 속죄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나도 그 남자의 자살 사건 이후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떠올랐어. 물론 내가 자메이카 출신, 전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건 서로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지만. 그런데 둘이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바로
그 순간에 브렛 생각이 떠오른 거야. 그가 흑백 혼혈이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막가는 심정으로 이러는 건
아닌가하는 의문과 미안함이 고문처럼 날 짓눌렀어."
"정 선배! 자학하지 말아요. 이 순간 깨끗한 내 가슴으로 선배를 안아주고 싶네."
"저거 봐! 가까이 오지 마, 후려칠 거야!"
"선생님,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그가 초등학생 목소리를 다시 냈지만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이른 낙엽이 한두 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아무래도 기대고 서있던 나무에 그녀가 너무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기 때문 인 듯하였다.
"정 선배, 내가 활동하고 있는 자연보호 중앙회에서 독도 탐방을 가는데 거기 함께 가 봅시다. 삼일간의
여정이니 우리 연구원에는 금요일 하루 월차를 내고 다녀오자고요."
"난 섬에는 안 간다니까. 알잖아."
"기회가 좋아요. 그리고 '자연보호 사람보호', 캐취 프레이즈가 또 마음에 들잖아요. 이제는 자연보호와
환경문제 같은 데에도 다양하게 관심을 쏟으면서 그 과거의 미망으로부터 해방 되셔야 해요. 갑시다."
박준수가 떼를 쓰듯이 밀어부쳤다.
"이번에는 회비가 삼십만 원이어서 제가 전액을 대납하기는 힘들지만, 초기 신청금은 두 사람 분을 이미
다 냈어요. 이럴 때 아니면 독도 구경도 힘들어요."
"섬이라면 난 아주 죽어버릴 것 같아---."
그녀가 또 몸을 떨어서 벌레 먹은 나뭇잎 몇 개가 다시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 다음 날부터 사흘간 그녀는 몸살을 몹시 앓았으나 결국 박준수를 따라서 자연보호 독도탐방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연보호 중앙회"의 "울릉도 및 독도 가을 탐방단"은 정확하게 104명이 참가하여 신 새벽, 네 시 반에
서울역을 버스 세대로 출발하였다.
박준수는 이전부터 그 모임에서 많은 활동을 한 듯 중앙지도 위원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었으며 백여 명이
움직이는 이번 행사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세 시간이 넘게 달려서 묵호항에 도착하였고 밝은 햇살 속에서 맑은 바다 위로 쾌속정이 다시
세 시간 남짓을 나르듯 항진하여 울릉도 도동항에 접안을 하였다.
울릉도는 사람들이 감동, 기절하도록 망망대해 속에 문득 솟아있었고 정진주도 탄성을 질렀다.
"야아, 우리나라도 대단하네. 항상 풍광이 빈약하다고 탄식만 했는데---."
"아는 만큼, 또 열심히 다니는 만큼 보여요. 회색, 경계인 선생님!"
"또 그래~!"
그녀의 항변하는 목소리가 어리광처럼 가볍게 코에 걸렸다. 여행은 그래서 좋은 진화의 과정이다.
아니 혁명과 같을지도---.
일행은 3개 선단으로 크게 쪼개어져서 다시 그 아래에 있는 2개 선대 중의 하나로 배속이 되었다.
그와 그녀는 당연히 1선단 1선대, 같은 소속이 되었다.
"우리 같은 방 쓸까요?"
박 선생의 말이었다.
"미쳤어. 아니, 아니, 그러지 뭐. 내가 누님이니까, 호호호."
그녀도 오랜만에 여성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일행은 남녀 별로 대략 4명이 한방을 배정받았다.
박준수는 본부 일로 바빠서 호텔 로비에 남고 정진주는 새로 인사를 나눈 여성 룸메이트들과 산의
중턱에 걸린 독도 박물관을 먼저 방문한 다음 케이블카를 타고 성인봉 정상에도 올라가 보았다.
이윽고 첫날 저녁 시간이 오자 박준수는 본부 임원들과의 식사도 마다하고 정진주와 시간을 내고자
하였으나 그녀는 둘만의 시간을 내일로 기약하자고 하였다.
일행의 눈치도 보였지만, 그와 갑자기 이 섬에서 혁명적으로 가까워지기에는 무언가 정리할 일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적어도 독도는 다녀온 뒤라야 되겠어---."
그녀는 강민경이 죽은 후 얼마 후에 났던 신문기사를 잊지 않고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한 관광버스는 마침내 울릉도를 굽이굽이 돌며 정상에 펼쳐진 나리분지까지
힘겹게 올라갔다.
박준수와 정진주는 일행과 함께 이 곳 특유의 수수 막걸리를 한잔하고 손을 꼭 잡은 채로 칼데라 분화구의
초원을 한참 걸었다.
'너와집'에 붙은 굴뚝은 울릉도에 자생하는 교목의 속을 파서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세워놓은 것으로
두 사람은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신 끼가 내리는 걸 느끼기도 하였다.
"기분이 묘해. 우리가 신 내림 받는 거 같네. 이 나무가 살아있을 때에는 신단수 같았을 거야."
"그래요. 신단수 옆에 서니 정 선배가 샤만 같아요."
이날 오후 그들은 독도 탐방의 물길에 올랐다. 잔잔한 바다 위를 쾌속정은 단숨에 달려서 두 시간 만에
그들을 독도에 쏟아놓았다.
저 동해의 거친 파도와 해풍과 또 왜구의 노략질에 견뎌내려면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섬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졌고 그나마 바닥 전체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있어서 마치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 중세의
기사와도 같았다.
모두 묶어서 '독도'라고는 하지만 암벽 봉우리로 구성된 두개의 섬은 방위에 따라서 다시 '동도'와 '서도'
라는 이름이 부여되어 있었다.
발이 섬의 바닥에 닿자 흥분한 어떤 대원은 흙이야 있건 없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교황처럼 입맞춤도
하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기념사진부터 찍기도 했다.
박준수는 정진주의 손을 꼭 잡고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보살폈다.
입도 후에 주어진 시간은 단 이십분이었다.
"정 선배, 저기 '서도' 쪽을 봐요. 지금 중년의 남녀가 암벽 밑의 거처 같은 데로 손을 잡고 들어가지요?
그 분들이 여기에 주민등록을 하고 사시는 부부랍니다."
벌써 세 번째 이곳에 왔다는 박준수는 이것저것 열심히 정진주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조금이라도 더 바다
쪽으로 나가서 맨 땅과 자갈과 모래를 그녀가 직접 밟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이 내린 '동도' 쪽은 독도 주민부부가 사는 '서도' 보다는 조금 더 넓었고 접안시설도 더 잘 되어
있었으나 손바닥만 한 상륙구역을 제하면 더 이상의 진입은 차단되어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는 그쪽 멀리 바다와 면한 낮은 위치에 비석 같은 물체가 두어군데
서있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정진주는 디지털 카메라의 모니터를 주시하며 줌 장치를 최대로 당겨보았다.
그 망부석 같은 두어 개 물체는 과연 비석들이었다.
하나는 제법 갓머리도 쓴 괜찮은 비석 같았고 또 하나는 그런 것도 없이 온몸이 풍상에 씻긴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모니터에 어른거렸다.
"박 선생, 저 비석이 무언지 저기 젊은 해경에게 좀 물어봐요."
그녀가 급할 때면 찾는 사람이 박준수였다.
"아, 저기 비석들은 광복 직후에 미군의 오폭으로 희생된 우리 어부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비석이지요."
젊은 해경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럼 저 왼쪽의 밋밋한 비석은요?"
정진주가 무언가 답답한 마음으로 디카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해경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아,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만 여기를 지키다가 이곳에서 돌아가신 여러분들을 위무하는 복합적인 비석일
것입니다.
저도 여기 배치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만---."
"그럼 옛날에 여기에 표류해 온 우리나라 사람의 유구 같은 것을 장사지내고 묘지를 쓴 경우는 없었나요?"
"유구가 뭔가요?"
해경이 조금 짜증을 내며 물어보았다.
"아, 해류에 떠내려 온 시체 말입니다."
그녀는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 네,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가 우리나라 땅이니까 우리나라 사람의 시체라도 떠내려 오면
옳다하고 여기에 매장을 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듯해요. 모두다 국제 관계 때문이라지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해경이 친절하게 추측까지 겻들여서 설명을 해 주었다.
"아이구, 엄마야!"
디지털 카메라의 줌을 최대로 당겨서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해경의 설명을 경청하던 정진주는 그만
시멘트 둑에서 바다 쪽 자갈 해변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면서도 그녀는 카메라를 품에 꼭 안고 구르느라 온 몸에 심한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었다.
생명 까지는 몰라도 골병이 들 정도의 부상이었다. 몹시 아픈 쪽은 어깨와 가슴이었으며 팔과 무릎에서는
붉은 피가 철철 흐를 지경이었다.
갑자기 작은 소동이 일어났지만 배에는 응급실이 있어서 간호사가 우선 과산화수소로 소독부터 하고
지혈 조치를 취한 다음 설파제에 항생연고까지 듬뿍 뿌리고 발랐다.
간호사는 뼈가 부러지거나 탈골된 징후는 없다고 진단을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고 정진주도 아픈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듯 싶었다.
"웬일이야, 자연보호는 나 혼자 다 한 것 같고 부끄럽고 창피해---."
그녀는 아픈 중에도 민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독도에 입도하면서 그녀가 처음부터 품었던 어떤 참혹한
기억과 기분은 오히려 많이 여과되고 세척되어 있었다.
"그 남자, 아니 그분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여간 첫사랑의 묘지를 마침내 이곳에서 찾은 듯해요, 정 선배님."
선장실 옆의 응급실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박준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간호사의 시선을 비키며 말문을 띄었다.
"그래요, 박 선생, 전모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확인이 되었다는 확신은 오네요. 그 당시 사고가 났을
때에 죽은 사람의 집안에서는 백방으로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반년 가량이 흘렀을 때에 신문 한 조각에 제주에서 실종된 수학여행 학생의 시신이 독도
근해에서 발견되었고 가족의 동의로 독도에 매장한다는 기사가 났더라구. 동기들은 모두 발령을 받아서
뿔뿔이 흩어진 후였고 나도 나설 계제가 전혀 아니어서 그 일은 그렇게 개인적 사건으로 흐지부지 되었지.
다만 나는 지난 십 여 년 이상 동안이나 그 신문 기사를 내 가슴에 혼자 묻어두고 살아왔나보네."
그녀는 여기저기 온 몸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많은 말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조용히 참배라도 하도록 손을 써 볼까요? 속 시원하게. 정 선배."
"필요 없어요. 20분간만 정박한다는 배가 지금도 내 부상 때문에 연발을 하는데 말도 안돼요. 그리고 나도
이제는 숙제를 다 푼 기분이구만.
내 첫사랑의 묘지라고 아까 박 선생이 말할 때 나는 깨달았어. 그래 지난 사랑은 다 묘지에 묻었어. 난 이제
더 이상 지난 일에 묶여있지 않아도 될 듯싶어. 정말 속이 시원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박 선생!"
그녀는 아픈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배가 떠나네---."
그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멀어져가는 독도를 선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간호사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우등실로 옮길까요? 여긴 좁고 불편하네요."
박 준수의 말에 간호사도 긍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은 1인당 4500원을 더 내고 보통실 표를 우등실로
바꾸어서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으면서 의자를 시트처럼 눕혔다.
우등실의 특전이었다.
배는 어느새 독도가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달려와서 더욱 힘차게 항진하고 있었다.
"정 선배, 자메이카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이 파월 말고도 또 있지요?"
"가수, 해리 벨라폰테."
"전에 효창공원에서 고백성사 할 때에는 그 사람 이름을 왜 뺐어요?"
"전 남편이 그 사람 노래를 너무 좋아하고 또 잘 불러서 마음에 걸렸어. 바나나 보트 송이라던가 또---."
"자메이카 페어 웰!!"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집게 뽕!!"
두 사람은 또 동시에 말하고 상대방을 먼저 꼬집으려고 하다가 몸을 움직인 정진주가 너무 아파하는
바람에 그만 두고 조금 웃기만 했다.
"정 선배, 내가 '자메이카여 안녕'을 노래 불러 드릴게요. 이제 섬 이야기는 섬에다가 다 묻어버리고
이 쾌속정처럼 우리의 목적지로 달려갑시다."
정말 쾌속정은 쾌속으로 달려서 금방 울릉도 도동 항구에 접안을 하였다. 일몰이 오자 자연보호
전 회원들은 도동항에 있는 광장으로 모였다. 독도수호 결의문 낭독 행사가 있었다.
박준수는 준비에 바빠서, 몸이 아파 가까스로 나간 정진주를 만난 건 한참 후였다.
"난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어,"
그녀가 소리죽여 투정을 부렸다.
"정 선배, 미안합니다. 본부 일이 바빠서요---."
"나 집으로 갈래."
"그래요. 지하철 타는 데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하하하."
그가 어둠 속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아이구 아파! 나 온 몸이 다 아파요. 그리고 이러지 말어. 소문나---."
"여긴 섬이라 소문도 섬 밖으로는 못나가요. 아니 사실은 소문 좀 났으면 좋겠어요."
"그래, 하여간 우리 여기에서만은 남 눈치 보지 말고 꼭 붙어 함께 있자. 저기 진행 같은 건 다른
사람이 하게 두고 여기 있어요. 박 선생."
그들은 광장의 외지고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박 선생은 어디에선가 울릉도 호박 술을 한 병 사와서 정진주에게 조금 권하고는 혼자 은밀하게
마셨다.
광장에 급히 설치된 무대 쪽에서는 꽤 유명한 여류 연극인이 미리 와서 낭독문을 점검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 선배, 저 연극인 강은희씨라는 분이 전에 어떤 여성 잡지에 보니까 자기 연인이 손아래 남자라고
떳떳이 커밍아웃 하던데요---,"
"그러니까 나도 박 선생의 숨겨놓은 연인이나 되어줄까? 그래, 그거 좋겠네.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소리도 듣지 않고---."
"저는 아내와 연인은 같다고 봅니다."
"난 누님이야."
"그럼 내 누님, 내 아내, 내 연인, 내 동료, 내 친구, 내 정부."
"그리고, 내 웬수!"
두 사람이 사랑싸움을 하는데 순서에 따라서 그 연극인이 단상에 올랐다. 어제 오늘에 걸친 울릉도
자연보호 활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감을 피력한 이 여류 연극인은 잔잔한 목소리에 갑자기 힘을
넣더니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 행사가 역사적으로 명증적이고도 타당함을 조목조목 천명하고
마침내 독도에 해경이 아닌 국군을 상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녀가 열 가지 항목으로 독도 선언문을 선창할 때마다 광장을 메운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화답하였다.
그녀가 선언문을 선창하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열화와 같이 화답을 한 연후에는 모두들 그녀에게
노래 한 곡을 생음악으로 또 청하였다.
그녀는 기침과 함께 목청을 돋운 다음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을 열창하였다.
노래는 부드럽고 감미롭게 시작하여서 마침내 슬픈 서정으로 마감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가을에 한번쯤은 자신들도 실연을 하고야 말았다는 듯이 앙 콜도
요청하지 못하고 쥐죽은 듯 고요 속에 빠져버렸다.
"박 선생도 가을을 남기고 떠날 거야?"
"그건 말이 되지 않죠. 저는 기쁘게 정 선배를 사랑하여 평생을 함께 즐겁게 지낼 겁니다. 아이들도
여럿 낳고요.
생각해 보세요. 정 선배는 내가 저렇게 슬픈 노래 부르며 슬픈 사랑을 나누자고 할 줄 아셨나요?
저는 운명의 순종자가 아니라 개척자가 될 겁니다. 절 따라오세요."
두 사람은 조용히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저기 산 중턱에 대아 리조트라고 지금 완공 단계에 있는 콘도가 있어요. 아직 정식 개관은 안했지만
모델 하우스 쪽에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답니다. 그리로 가시지요."
두 사람은 이탈리아식으로 지어놓은 리조트 콘도 단지로 택시를 타고 갔다. 마치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은 텅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은 다 준비되어 있었다.
호화 '수이트 룸'으로 장만된 어떤 공간에서 박준수는 정진주를 침대에 눕혔다.
"나 몸이 불편한건 그렇다 치고 샤워조차 못했는데---."
"아까부터 정 선배의 몸에서 해초 냄새가 나는 걸 내가 간과하지 않았어요."
"젊은 사람이 플레이보이 같아. 못됐어!"
"플레이보이 치고는 제가 너무 서툴고 서두르는 것 같지 않아요?"
"박 선생, 잘 들어요. 내 전 남편에 따르면 내 속이 조금 기형적으로 굽었다는군. Oh, Dear deviated!
이러면서 그는 사랑할 때마다 미칠 것 같다고 외쳤어. 나도 그 굴곡에서 환희의 소리를 지른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그 절정이 지나면 여러모로 기분이 나빴어. 디비에이티드라니 ‘일탈’이고 ‘항로 이탈’이라는
뜻이잖아. 제 마누라를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그 사람의 사랑이란 게 고작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래저래 난 남자에 대해서 두려움이 많고 내 몰골이 이래요---.
생각컨데 나중에라도 배신할 듯싶으면 지금이라도 나를 재미로 안아보고 싶다고 미리 말해줘. 거절하진
않을게.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오늘 밤은 나도 혼자 자기는 싫어. 다만 박 선생 같은 젊은 총각이 왜 나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넋이 빠졌는지, 그건 종내 궁금해."
정진주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렸다.
"정 선배! 비너스의 화살이 박혔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로만 부족하다면 한 가지 만 보충할게요. 내가
어렸을 때, 꽤 괜찮은 중산층 가정이던 우리 가족은 어느 날 관광지에서의 교통 사고로 어린 나만 남기고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어요. 남들에게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철이 들고 나서 세상을 둘러보니 졸지에 그렇게 된 아이들이 참 많더군요. 신종 고아들이지요. 자동차
보험 협회에서는 '희망 어린이 동아리' 같은 걸 만들어서 도움을 주고도 있지만 그런 참사와 재난은
그리스 비극처럼, 또 천형처럼 멀쩡했던 어린 아이들을 참혹한 인간형으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제가 정 선배에게 기울이는 사랑이 그런 가정적 결손 때문 만이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그저 첫눈에
반했다고만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제 말에 답하지 말아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정 선배가 바위에서 굴러 떨어져 지금 심신이 다 아픈 건 초야를 치르는 의식과 정성으로 받아들일게요.
저기 창밖에서 들려오는 해조음에 귀 기울여 봐요. 저 거대한 파도 소리가 내 청혼의 음성이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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